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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것도 없다, 보는 사람도 없다

방송은, 그 안에 포함된 컨텐츠와 그것을 볼 시청자를 전제로 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활동이다. 이 두가지 요소가 갖추어지지 않은 방송은 허무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아무리 화려한 공연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관객이 없는 무대는 활기를 띄기 어렵다. 비록 수많은 관객이 응집해 있다고 한들,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 볼품없다면, 그것 역시 가치가 없는 것이다.

지난 1일 개국한 위성방송은 컨텐츠와 시청자의 확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충족시키지 못한 채 경영상의 난맥을 보여주고 있다. 개국 첫날 위성방송을 볼 수 있었던 이들은 7000가구 정도. 50만을 넘어가는 예약 가입자의 수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수치였다. 게다가 74개 비디오 채널 중 케이블 TV와 겹치지 않는 컨텐츠를 제공한 채널의 가짓수는 겨우 스무개 남짓. 그나마 시민 채널과 디즈니 채널은 준비의 미비로 전파를 쏘아보내지 못했다.

볼 것도 없고, 보는 사람도 없는 방송. 이 당혹스러운 희극이, 소위 다매체 다채널 시대의 시발점이라는 위성 방송 첫 개국을 장식한 풍경이었다.

꿈의 방송? 일단 제대로 볼 수나 있게 해 달라

"광고와는 달리 프로그램에 따른 화질의 차이가 너무나 크다", "언제나 셋톱박스가 설치가 되는 것인가?", "설치하러 온 사람들이 기술상의 문제를 이유로 그냥 가 버렸다", 현재 스카이라이프 ( http://www.skylife.co.kr )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시청자들의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

시청자들의 가장 큰 불만은 위성방송 수신기인 셋톱박스의 보급이 늦어진다는 것. 그러나 수신기 보급은 5월 중순에 이르러서야 공급이 수요를 따라 잡을 전망. 셋톱 박스 공급을 위한 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다.

기술적인 문제도 불만 사항 중 하나. 현재 보급되고 있는 경제형 수신기는 양방향 방송이 불가능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실상 위성 방송의 장점이 구현될 수 없다는 것. 제대로 된 위성 방송을 향유하기 위해서는 8월 이후에 보급되는 고급형 수신기를 사용해야만 한다.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제대로 된 위성방송을 즐기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위태로운 출범

위성 방송 출범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지상파 재전송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방송위원회는 위성방송의 지상파 재전송을 허용하는 정책으로 나아갔지만, 지역민방과 MBC 계열사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 결과는 김정기 방송위원장의 도중 하차이다.

지난해 11월 중순 이후, 지상파 재전송 정책이 확정된 이후 디지털 위성방송에 대한 초점은 오직 지상파 재전송의 허용 유무에 대한 논의에 맞추어져 있었다. 지상파 재전송에 이해 관계가 얽혀 있는 당사자들의 치열한 논의에 가로막혀, 사실상 위성 방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한 논의나 정책 결정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결국 이 문제의 해결은 아직도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상태.

채널의 수와 컨텐츠의 질도 제대로 확보되지 못한 상태. 꿈의 방송을 자칭하며 애초에 146개의 채널확보를 장담했던 디지털 위성 방송이지만, 결국 지상파 방송 재전송 문제에 뒷덜미를 잡혀 MBC와 SBS를 재전송하지 못했다. 또한 44 개의 비디오 채널 중 약 70% 가 케이블 방송과 차이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채널과 컨텐츠를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을 확립하지 않고 무리하게 개국을 서두른 것이 그 원인이다.

일관되지 못한 방송 정책, 방송계 내 갈등의 미해결, 위성 방송을 위한 제작 인프라 구축의 실패 등 위성방송은 그 출범부터 위태로운 상황을 예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자축연

이러한 엉성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5일 한국디지털위성방송은 신라호텔 다니어스티룸에서 개국기념식을 갖고 ‘뉴미디어시대’의 개막을 선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위성방송산업을 통신분야의 IMT-2000과 더불어 대표적인 수출전략형 IT 산업으로 육성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위성방송은 방송의 세계화를 실현시키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올 것" 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이 자리에는 남궁진 문화관광부 장관, 양승택 정보통신부장관, 최재승 국회문화관광위원장, 강대인 방송위원장, 이상철 KT 사장, 박권상 KBS 사장, 김중배 MBC 사장, 윤세영 SBS 회장등 각계의 인사 300여명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는 위성방송의 부실 및 운영상의 파행을 외면한 구색맞추기에 불과한 요식행위라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작 위성방송은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행사만 거창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 비난의 요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위성방송이었을까

"방송의 혁명! 접시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 디지털위성방송이 표방했던 구호이다. 디지털 위성방송의 도래가 시청자들이 접하는 방송 환경의 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담긴 어구. 이러한 어구 아래서 한국디지털위성방송이 수행한 일은 무조건적으로 다수의 가입자를 확보한 일이었다. 엄청난 마케팅 비용과 보조금을 투자한 결과는 50만명이 넘어가는 위성방송 가입자의 확보. 그리고 3월 1일 위성방송은 개국을 했고, 5일에는 디지털위성방송 강국을 꿈꾸며 자축연까지 벌였다.

그러나 50만이라는 계량화된 수치는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정책입안자나 방송을 책임지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수치가 그들의 정책의 성패를 좌우하는 척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명 한명의 시청자들에게 이러한 수치는 의미가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접하는 방송의 질일 뿐이다. 디지털 위성방송이라는 거창한 어구도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에게 더욱 재미있는 방송을 공급해 줄 수 있을 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이 명제가 무시된다면 50만이라는 허수는 국민의 무의미한 세금부담이될 뿐이다. 50만이라는 수치는 가시적인 성과에만 급급한 정치 논리의 산물이다.

경제논리가 무시된 상태에서, 정치논리로만 운영되는 정책은 위험하다. 디지털 위성방송이 성립될 수 있는 하부 인프라나 정책적인 방안이 해결되지 못한 상황에서, 디지털 위성방송의 가입자만 억척스럽게 뽑아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결국 디지털 위성방송이 성립될 수 있는 인프라 문제와 지상파 재전송 문제등의 정책적인 사안이 해결되지 못한다면, 위성방송은 끊임없이 거대한 자본이 일방적으로 투자되지 않으면 언제 고사할지 모르는 골치아픈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과거 위성 방송을 논할 때는 언제나 환상적인 수식어가 따라 붙곤 했다. 다수의 시청자가 질높은 방송을 향유할 수 있는 디지털 방송 시대의 개막, 시청자가 직접 만들어내는 시민 방송의 실현의 가능성 그리고 좀 더 다양한 문화 생활의 향유. 위성방송 송신 설비가 전파를 쏘아 보내기만 하면 이 땅의 방송 문화가 혁신적으로 변화할 거라는 기대감이 위성방송 사업에 투자되는 국민의 부담의 보증 수표가 되었다.

그러나 성급한 위성방송의 출범은 부정적인 결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겠지만, 방송 체계를 유지시켜 줄 경제, 문화, 정책적 기반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거창한 명분과 시설이 겸비된 방송이라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교훈은 얻은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 투자되어야만 했고, 또 낭비되었을 비용을 감안한다면 꽤나 값비싼 교훈인 셈이다.

여기서 짧지만 서툰 단상을 이어 본다. 이 땅의 엘리트들은 모두 모여 있다는 방송계의 빼어난 인사들이 정녕 능력이 모자라서 이런 결과를 이끌어낸 것일까. 혹, 이러한 정책 입안자나 더 높은 분들에게 그럴 듯한 수치를 제시하기 위한 정치논리가 이러한 문제점의 보이지 않는 시발점이 된 것은 아닐까.

그렇게까지 서두르며 개국해야만 했던 위성방송은 누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정말 위성방송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시청자들의 만족을 지향했던 것일까. 아니면 50만이라는 거창한 숫자를 뽑아내기 위한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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