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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이다. 대문에다 입춘대길이라는 글 써 붙이고 한해의 길함을 빌던 옛날 어른들처럼, 아는 스님께서 보내주신 입춘대길을 아파트 문에다 붙이고 하루를 시작한다.

입춘답게 참 따뜻하다. 눈처럼 하얀 서리가 초록의 보리밭에 내려 출근길 풍경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서리가 많이 내린 날은 따뜻하다고 하더니 흐린 하늘아래 푸근한 기온은 두터운 겨울 외투를 잠시 벗어 두게 한다.

개학을 한 학교는 겨울방학 동안 쑥 커버린 키 때문에 교복 바지가 껑충 올라간 남학생들과 뽀얗게 피어나는 여학생들의 해사한 얼굴, 그리고 조금은 엄격한 우리 학교 교칙을 벗어난 삐죽삐죽 장발(담임 선생님께 야단 맞고 곧 자르겠지만)… 개학한다고 아주 짧게 머리를 잘라버려 군인같이 보이는 모범생 등등 방학을 맞은 아이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머리를 짧게 잘라 단정하게 보이는 상정이가 방학 숙제를 안고 교무실로 들어섰다.

첫 시간 2학년 수업을 들어가니 때쟁이 경환이는 머리가 엉켜있는 데다가 책도 가져오지 않고 내내 졸고 있다. 매일 늦잠을 자다가 개학을 해서 학교에 오니 영 기분이 말이 아닌 모양이다. 제 앞가림을 잘하는 은주는 영어단어 시험을 친다고 공부하느라, 국어공책 대신 영어단어장을 내 놓고 앉아있어 조금 얄밉다.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람이도 오늘은 건강해 보인다. 정우는 살이 조금 빠진 것 같아 하얀 얼굴의 윤곽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나 보인다.

2학년은 마지막 단원 하나를 남겨두고 방학을 했다. 이번 주에 남겨 둔 과목을 다 배우게 되면 강마을 아이들은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있다. 바로 '책씻이' 시간이다. 책을 다 배우면 그동안 공부하느라 수고했다는 의미로 내가 아이들에게 사탕을 돌리기 때문이다.

책씻이의 어원과 풍속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하면 원래 책씻이는 서당에서 책을 한 권 다 배우면, 부모님이 떡을 해 와서 잔치를 하는 우리나라의 전통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을 책씻이, 지방에 따라서는 '책거리'라고 했었다.

책씻이는 일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베푸는 것이었다. 당시의 풍습 속에서 부모가 자식에 대한 교육열을 엿볼 수 있다. 대체로 학부모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물질 보상 보다 노력 보상이 많았기에 서당 훈장은 작은 논농사나 밭농사 등은 손에 흙 한번 안 묻히고 지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학부모들이 계란이나 감자, 고추, 호박 등 부식거리도 감사의 뜻으로 훈장에게 주었기 때문에 훈장은 먹고 남은 것을 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수시로 책씻이(洗冊)라는 잔치가 자주 있었는데, 자녀가 천자문이나 동몽선습을 떼면 이를 축하하여 시루떡을 쪄 서당에 보내어 아이들로 하여금 나누어 먹게 하고, 닭 한 마리 삶고, 술 한 병 받아 스승을 위한 상을 따로 차려 보낸 풍습이었다.

국어 책을 끝내는 날은 때쟁이 경환이도, 졸음대장 정우도, 새침한 소영이도 모두가 즐거운 수업시간이 된다. 책을 다 배우는 날이 가까워지면 모두가 눈을 반짝이면서 어떤 사탕을 줄 것인지 기대에 찬 모습으로 기다린다.

수업은 교사와 아이들의 공동작업 공간이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다. 나역시 수업을 통해 아이들에게 배우기도하고 나에게 배운 지식이 아이들의 머릿 속에서, 생활 속에서 번져감을 볼 때 선생 된 기쁨이 충만하다.

내일 모레면 우리 아이들은 내가 고민해서 사 가지고 온 예쁜 색깔의 알록달록한 사탕을 먹는 즐거운 수업시간이 될 것이다. 달고 맛난 책씻이 사탕을 함께 먹는 수업시간은 나 역시 참 즐겁다. 아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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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경남 의령군 지정면의 전교생 삼십 명 내외의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교사 이선애입니다. 맑고 순수한 아이들 눈 속에 내가 걸어가야할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죠.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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