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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희식


닭을 잡으면서 나는 몇 번을 후회했는지 모른다. 날씨는 꽁꽁 얼어붙었고 처마마다 고드름이 의장대 사열하듯이 늘어선 한 겨울 어느날, 애지중지 기르던 토종닭 한 마리를 직접 잡아 먹기로 한 것이 발단이었다.

나중에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는 큰 식칼 두 개, 문구용 중형 나이프 하나가 내 손목을 자를 것만 같아 겁이 더럭 나기도 했다. 끓인 물을 대야에 담아 가지고 집 뒤꼍으로 갔을 때 닭이 죽지 않고 퍼덕거리고 있어서 나는 기겁을 했다. 차라리 잡자고 덤비지 말 것을.

손 끝에 전해지는 닭의 뜨끈한 체온…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목을 비틀어 날개 죽지에 끼워서는 커다란 쓰레기 자루로 눌러 놨는데 목이 덜 비틀렸는지 닭이 여태 죽지 않고 바둥대고 있는 게 아닌가. 다시 목을 비틀려고 쓰레기 부대를 들어내고 닭의 목덜미를 잡다가 닭이 필사적으로 버둥대는 바람에 하마터면 닭을 놓칠 뻔했다.

목을 다시 비틀어 날개 죽지 속으로 끼워 넣는데 닭이 죽기살기로 저항하는 바람에 내 팔 힘이 딸릴 지경이었다. 손목이 아파왔다. 손으로 전해지는 뜨끈한 닭은 체온이 너무 징그러웠다.

결국 칼로 목을 자르기로 했다.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고 괜히 내가 잡을 수 있다고 아내에게 큰소리 친 게 여간 후회가 되는 게 아니었다. 최대한 닭의 고통을 줄여주는 게 닭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여 나는 칼로 목을 자르기로 한 것인데 닭의 목이 도마 위에 잘 고정되지 않아 칼로 몇 번씩이나 목을 쳐야 했다.

결국은 목을 잘랐다. 칼질을 함부로 해서 나중에 보니 목 울대가 너덜너덜했다. 끔찍했다. 더구나 붉은 피가 주변에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내가 밭에 나갔다가 마당에 들어설 때마다 걸음을 옮길 수 없게끔 내 발길을 앞서 나를 반기던 귀염둥이 '갈랑꼬'의 선혈이었다. 어둠 속에서 검붉은 '갈랑꼬'의 핏자욱이 엉기면서 더욱 기괴했다.

끓인 물을 붓고 털을 뽑다가 나는 또 다시 뒤로 나자빠졌다. 닭 몸통을 움직일 때 꼬꼬~~ 꼬꼬~~ 하는 닭 울음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깜깜한 집 뒤꼍에서 귀신이라도 덮칠 것 같았다. 털이 채 덜 뽑힌 닭을 집어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급한김에 화장실로 가지고 들어갔다.

목이 잘린 닭의 몸통에서 나는 울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 전희식
나는 여간해서 놀라거나 겁을 먹지 않는다. 십여 년 전부터 명상을 해 오면서 변화된 생리이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머리가 쭈뼛거리고 가슴이 방망이 질하기 시작했다. 너무 물이 뜨거워서인지 몇 군데는 털을 뽑으면서 살점까지 떨어져 나와 닭의 몸통이 여기저기 파였다. 다 내팽개치고 도망이라도 가고 싶었다. 피가 화장실 바닥을 벌겋게 물들였다. 혹 아이들이 볼까봐 화장실 문을 잠갔다.

백숙도 닭도리탕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사람이 닭 잡는 일에 이토록 허둥대고 두려움과 죄의식까지 갖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싶었다. 남이 잡는 것이니까 괜찮았단 말인가? 내 손에 피 안 묻히면 괜찮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그렇게 설명될 수는 없다. 먹는 행위나 잡는 행위는 근본에 있어서 같은 것 아닌가. 다를 수 없다. 내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그래 닭이 아니라 사람의 가슴에는 못을 박아왔으면서 닭 목을 치면서 이 꼴이라니. 참 가증스럽고 위선적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털이 모두 뽑혀나고 점차 눈에 익숙한 통닭의 모습이 나타나자 나도 조금 진정 되는 것 같았다. 내장을 들어내고 두 뒷다리, 그리고 날개와 몸통을 절단하면서 처음에는 뜻대로 되지도 않고 여기저기 살점만 흩어놓는 꼴이 되더니 금세 요령이 생겨 관절을 골라가며 칼로 내리치니 쉬워졌다. 훨씬 쉬워졌다.

닭 한마리 잡는데 이토록 난리를 치며서 치를 떨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어지럼이 일었다. 지금 다시 익숙해지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이것도 하다보면 익숙해지는 걸까? 익숙해지겠지. 나중에는 무감해지겠지.

냉냉한 딸의 반응, "잡아먹을려고 키운 거예요?"

ⓒ 전희식
무감해질 거라는 상상에 몸서리가 쳐졌다. 이렇게 해서 베트남에서의 수많은 양민학살이 가능했을까? 쌍둥이 빌딩의 미국인과 카불의 아프간인은 다르다고 믿는 걸까? 익숙해지는 것은 편한 건가. 바람직한 것인가. 관습과 의례에 묻힌 진실들이 얼마나 나를 어리석음 속에 방치하고 있을까 하는 엉뚱한 자성이 일었다.

들통에 넣고 겨우 끓여낸 닭도리탕의 첫 숟갈을 들기도 전부터 허풍스레 몇 번씩이나 '맛있어 보인다'며 애써 피묻은 기억을 묻어보려고 하는 나를 본다. 딸애는 끝내 한 점도 안 먹고 감자만 몇 개 건져 먹다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자리를 뜨면서 누구랄 것도 없이 한마디씩 내뱉는다.

"잡아 먹을려고 키운 거예요?"

아이 눈에는 내가 얼마나 야만스러워 보일까. 난감했다. 들통에 가득한 닭도리탕을 들여다 보았다. 이때 의문 하나가 일었다. 저 아이의 정서는 바른 것인가. 저 딸 아이의 감정은 학습된 것인가. 생리적인 것인가. 오랜 기억 하나가 떠오르면서 인 의문이다.

이사가는 학급 친구가 수십 만원 하는 애완용 개를 준다고 했지만 나의 반대로 딸애가 울며불며 포기한 적이 있다. 밥과 고기를 먹여가면서 애완용 개를 기르려고 하면서도 정작 인간이 굶어죽는 현실에는 눈도 꿈쩍 하지 않고 서럽게 울기만 하던 딸애였다. 북한 전역을 휩쓴 기아가 절정에 달해 한 해 350만의 동포 어린이가 굶어죽던 시절이었다. 나는 딸을 돌려세워 따져 묻고 싶어졌다.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인간적인가를.

누가 더 야만적인가? 배고픈 백정인가, 역적들을 잡아죽인 군왕인가

그렇다. 가축의 목을 잘라 양반들의 식탁을 가꾸어야 했던 배고픈 백정들이 야만적인가 아니면 충신이네 역적이네 권력다툼 하면서 먹지도 않을(?) 사람을 잡아 수십 갈래 찢어 죽여서는 한강 백사장에 늘어놓고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했던 군왕들이 더 야만적인가?

점심을 굶는 어린이가 십 오만에 이르고 노숙자가 이번 겨울에만 350명이 동사해 죽고 있는데 이십 조원 넘는 군사비를 펑펑 써대는 이 대한민국은 그럼 인간적인가? 혼자 있을 때는 벌레 한마리 못 죽이는 여리디 여린 인간들이 하는 짓들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닭 목을 꺾었던 이 밤에 나는 야만과 인간성 사이에서 몇 차례나 곤두박질하며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다시는 두 번 다시는 내 입에 육고기를 대지 않으리라. 무지와 탐욕으로 야만을 사는 내 일상에 무뎌 있는 영성을 깨치고 무명을 벗어나는 새벽 닭 울음으로 이 밤을 기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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