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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있으면 드나드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문도 문 나름. 문의 격이 다르면 드나드는 사람도 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대로 같은 문을 사용할 리 없는 사람들이 함께 드나드는 문도 있다. 교도소 철문이다. 전직 대통령에서부터 10원 짜리 동전을 한 웅큼 훔친 가출소년에 이르기까지 교도소 철문은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신분의 높고 낮음을 차별하지 않으며 재산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는다. 물론 현실이 그렇다는 게 아니다. 이론상 그렇다는 말이다.

나고 드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 교도소 철문이지만 가끔은 유난스레 눈에 띄는 사람이 있다. 얼마 전 그 문을 나온 세 사람과 들어간 두 사람이 그렇다.

나온 사람은 탈세혐의를 받는 신문사주들이다. 김병관 동아일보 명예회장,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국민일보 조희준 회장은 모두 법원의 보석 결정을 받고 풀려나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들어간 두 사람은 '예진 아씨' 황수정 씨와 가수 싸이다. 황 씨는 필로폰 복용 혐의, 싸이는 대마초 흡연 혐의를 받고 있다.

언론개혁운동을 하는 시민단체에서는 불만을 표시하지만 나는 언론사주들에게 보석을 허용한 법원의 결정을 환영한다. 우리 헌법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다. 법원의 유죄판결이 내리기 전까지는 사람을 죄인 취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헌법의 정신을 존중한다면 범죄의 증거를 없애버리거나 재판에 출석하지 않고 도망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아닌 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하는 것이 옳다. 세무관련 서류는 모두 증거물로 압수되어 있고 신문사주들이 어디로 도망칠 리도 없으니 굳이 구치소에 잡아둘 이유가 무에 있겠는가. 나중에 법원이 실형을 선고하면 그때 교도소에 가두면 될 것이다.

헌법에는 또한 '평등의 원칙'이 있다. 국민은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죄 추정의 원칙'을 신문사주만이 아니라 황수정 씨에게도 똑같이 적용해야 앞뒤가 맞다. 황 씨는 필로폰인줄 모르고 복용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함께 구속된 남자가 필로폰이라고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복용한 건 사실이라고 시인했다고 한다. 물증은 검찰이 이미 확보해 두었지 않겠는가. 온 국민이 얼굴을 아는 황수정 씨가 어디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증거를 없앨 수도 없으니 구속해둘 필요가 없는 일이다.

혹시 황수정 씨가 신문사주보다 더 못된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똑같이 대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스포츠신문들이 벌인 작태를 보면 적어도 기자들 중에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 같다. 특히 황수정 씨에 대한 보도는 그야말로 막가파 식이다. '최음제인줄 알고 마셨다니!' '황수정의 남자들 떨고 있다!' 이런 식의 사건과는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고 진위도 불확실한 사생활 보도를 통해 '화냥년' '죽일 년'으로 몰아간 것이다.

탈세와 마약 복용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확실한 범죄일까? 말할 나위도 없이 탈세다. 탈세는 헌법이 규정한 납세의 의무와 조세관련법을 위반함으로써 불특정 다수의 국민에게 금전적 피해를 주는 범죄다. 법원이 국세청의 추징금 가운데 10%만 인정한다고 해도 신문사주들의 탈세액수는 중형을 선고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이런 행위를 엄격히 단죄하지 않는 문명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반면 마약 복용은, 환각상태에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운전을 하지 않는 한, 남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다. 마약을 제조하고 유통하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 남을 해치는 범죄이지만 그것을 소비하는 행위는 근본적으로 자해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필로폰이나 대마초 소비와 같은 자해행위를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저지르면서 살아간다.

담배도 중독성이 약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약의 일종이다. 간접흡연으로 남에게까지 피해를 준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 동안 국가는 담배 생산과 판매를 독점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전매청이 담배인삼공사가 되었다고 해서 마약 제조·유통이라는 전매사업의 본질이 변하는 건 아니다.

민간기업이 제조·유통시키는 술도 습관성 중독성을 지닌 마약이다. 술은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를 유발하고 가정과 거리의 폭력행사를 증폭시킴으로써 가정을 파탄에 빠뜨리고 수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위험한 마약이다. 하지만 담배와 술의 소비행위를 처벌하지는 않는다.

자해행위는 처벌하기로 하자면 수없이 많다. 뚱뚱한 중년남자가 육식을 지나치게 하는 것, 치아가 약한 사람이 단 것을 먹는 것도 자해행위다. 골다공증과 거식증의 위험을 무릅쓰고 다이어트에 매달리는 여성들의 행위도 자해의 일종이다.

마약 복용을 옹호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마약 제조나 유통과는 달리 마약 소비행위를 형법적 단죄의 대상으로 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결국 마약의 소비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그것이 남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이 아니라 마약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하는 사람은 일종의 정신적 질병에 걸린 것과 같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치료다. 그래서 북유럽과 서유럽 국가에서는 마약 소비자를 감옥에 집어넣기보다는 치료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신문사주는 공인(公人)이다. 언론이라는 공적 행위를 비즈니스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수정 씨는 유명인일 뿐이다. 탤런트와 가수는 공론의 영역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를 비즈니스의 무대로 삼는다. '공인의 책임성'이니 '팬들에 대한 배신'이니 하는 것은 법률적 책임과는 무관한 것이다. 신문사주에게 무죄추정과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적용한 것이 옳다면 이 원칙은 탤런트와 가수에게도 그대로 적용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말이 난 김에 한 마디 더. 연예인뿐만 아니다.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하여 국가보안법과 노동관계법 위반으로 구속당한 이른바 시국사범들에 대해서도 법원은 평등의 원칙에 따라 보석 조처를 내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디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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