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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겁게 잡은 비용으로 인해 한 사람이 균형을 잃어도 넘어질 것 같은 작은 배를 타고 양수오(陽朔)를 향한다. 그 길에서 만난 리지앙(漓江) 대나무들은 모두 머리를 강으로 향한다. 물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멀리 바다로 떠나고 싶은 이들의 그리움일까. 그 길에서 만난 대나무들은 그런 모습으로 행자들에게 말한다.

같은 배에는 올해 지아비와 아비를 잃은 다섯 명의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잊기 위해 혹은 위로하기 위해 떠난 여행이다. 그중에 나는 아비를 잃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떠난 이들의 운으로 하면 그 작은 배가 난파는 면한 채 순시선에 쫓기듯이 양수오의 작은 선착장에 닿은 것만 해도 용하다.

베이징에서 출발한 기차가 씽안(興安)을 지나면서 구이린(桂林)의 면모를 서서히 나타난다. 평지에 두드러지게 서 있는 봉우리들이 서서히 말을 걸어온다. 구이린에만 10만의 봉우리가 있고, 그 가운데 이름을 가진 봉우리는 6백 개 가량이라니, 이름 없는 봉들이 행자들에게 말을 걸어 ‘꽃’이 되고 싶은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싱안의 들판에 서 있는 홍군 장정군의 ‘상지앙(湘江) 도강(渡江) 기념비’도 또 다른 봉우리가 되어 행자들의 눈에 띈다. 루이진(瑞金) 등지에서 출발한 장정군은 초반 행군 노선이 국민당군에게 완전히 노출되면서 뼈아픈 패배를 연속한다. 그나마 최대의 위기로 여겨졌던 상지앙 도강을 성공하고, 행군 길을 완전히 틀어 귀저우성 준의(遵義)로 향하면서 장정군은 생기를 찾는다.

중국 근대사 가운데 내부에서 치렀던 가장 큰 획을 긋는 길을 지나며 나의 상념은 ‘전쟁’으로 향한다. 얼마간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전쟁에 대해 너무나 무감해하는 것을 봐서 좀 충격을 받았던 탓일까.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던 이들이기에 전쟁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노파심이 있지만 그들은 작은 판단에 따라서도 전쟁을 하자고 할 것 같다.

▲ 특이한 모습이어서 여행객들이 좋아하는 낙타봉. 클린턴이 이 아래에서 연설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 조창완
전쟁에 관한 텍스트들이 머리에 오간다. 그중에 나에게 가장 확실히 살아 있는 텍스트는 베트남 작가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이 아닌가 한다. 더욱이 구이린이 있는 광시(廣西)는 역사상 백월(白越)이 있었던 나라로 ‘월남’(越南)과 역사적인 맥을 같이 한다. 실제로 광시성의 주인인 좡족(壯族) 등 소수민족의 모습에서는 베트남인들과 유사한 느낌을 받는다.

호치민의 낙조와 구이린의 낙조

구이린은 스스로가 천하에 제일 경치라고 자랑한다. 디차이산(疊彩山)에서 바라본 시내의 모습은 특이한 지형과 시간을 거듭하면 쌓아온 유산이 뒤섞여 다양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천연동굴인 루디옌(蘆笛岩)은 수억 년 동안 만들어진 바깥 경치와 비견될 만한 시간 동안 갖가지 풍광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중국은 관광지로의 집중적인 개발을 위해 구이린 자체를 완전히 다른 도시로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시내의 몇 곳을 둘러보고 저녁 무렵에 상비산(象鼻山)을 보기 위해 구이린 시내를 관통하는 리지앙 유람선에 오른다. 배는 물이 줄어 움직이기 어려운 강가를 천천히 움직인다. 배 안에서 만나는 구이린의 낙조와 강가 풍경은 내 기억의 한편으로 나를 이끌어간다. 바로 수년 전 떠났던 호치민 여행에서 본 사이공강의 낙조 풍경 그것이다.

▲ 천연동굴의 천장이 마치 구이린의 모습을 닮았다.
ⓒ 조창완
한가로이 강가에서 목욕하는 이들, 강가와 맞닿은 집들의 풍경. 하지만 그 평화로워 보이는 땅이 끝없는 전쟁의 굴레를 지고 있었다. 영화 ‘하얀전쟁’에서 스케치된 노인이 쓸쓸한 읊조림. “그 길로 프랑스군이 가고, 일본군이 가고, 미군이 갔다”는 것. 베트남 이들은 미군이 떠난 후에도 인도차이나 전쟁이라는 혹독함을 맞봐야 했지만 자신들을 지켜냈었다. 그 인고의 역사 한 가운데 ‘전쟁의 슬픔’에 작가 바오닌도 있다.

1952년 태어난 바오닌에게는 다양한 수사가 따라다닌다. 69년 27청년여단에 입대한 소년병 500명 중 가운데 끝까지 살아남은 10명 가운데 하나라는 것 자체가 그의 삶의 고통을 말해준다. ‘전쟁의 슬픔’에도 각종 수상 경력이 붙어 있지만 사실상 그 책은 그런 수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아이러니가 담겨 있다. 그에게는 세계 최강의 미국을 이겼다는 자존이 아닌 전쟁 자체가 가진 엄청난 파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베트남인이 적대감을 가졌으리라고 생각하지마라. 작가 바오닌이 한국 독자에게 주는 말에서처럼 베트남인들은 온후하다. 내가 다낭에서 후에에 가는 미니버스 안에서 살을 부대고 가면서 눈짓으로만 이야기한 베트남인들 모두는 내가 남한 사람이라는 말에도 정겨운 눈빛으로 맞아주었다. 전쟁이 끝난 것이 76년이니 불과 반세기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를 온화한 눈빛으로 맞아주었다.

베트남과 닮은 구이린의 풍경

소설에서 주인공 키엔은 69년 청년병으로 전장에 나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전쟁의 비극을 현장에서 맛본다. 입대 때 500명의 여단이었던 동료들 가운데 10명만이 살아남았고, 그 당사자인 작가 바오닌의 분신인 끼엔에게 전쟁은 지옥의 다름아니다. 자신들의 동료가 몰살했던 고이혼이나 폭격으로 처참한 비극을 겪었던 기차 등, 그에게 하노이에서 사이공의 탄손 나트 공항에 이르는 길은 지옥으로 가는 길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탄손 나트 공항을 점령한 후에 교육받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 끼엔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 프엉과 결별한다. 슬픈 오해와 상처로 헤어진 끼엔이 이후에 의탁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수단인 소설이다.(작가 자신처럼) 프엉은 끼엔이 어린 시절부터 사랑했던 유일한 짝이자 영적으로는 화가인 끼엔의 아버지와 교통하는 신비한 여인이다.

둘은 난관 속에서 계속해서 마음을 확인하지만, 끼엔의 아버지처럼 분방한 정신을 가진 이답게 분방하게 몸을 돌리는 것에 분노한 끼엔의 버림을 받는다. 하지만 이 역시 전쟁과 단절의 시간이 주는 오해와 숙명들.

이 소설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미국을 통해 받아보던 베트남의 텍스트 속에서 보던 교만과 오만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제목처럼 작가는 전쟁에서 이긴 것을 부각하기보다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 앞에 좌절해가는 인간 군상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사고처럼 이웃의 삶 속에서 위대한 서사시를 만들어낼 수 있음에도 자신은 전쟁이라는 폭력에 내던져지고, 그것을 기록하는 운명에 들어선 것의 비극이다.

▲ 민속풍경원 안에서 한가롭게 일상을 즐기는 동족 소녀. ⓒ 조창완
구이린 풍경의 절정은 물이 줄어서 구이린과 양수오의 중간에서 출발한 리지앙 유람선에 있다. 새벽 대지를 타고 가다가 만난 리지앙의 자태는 하늘이 만들어낸 절경 그 자체다. 우뚝 솟은 기봉들 사이로 난 강을 타고, 강가에는 아이의 몸통만한 대나무들이 조화를 이룬다.

싱핑(興坪) 등 강가 마을에서 나온 이들은 빨래도 하고, 작은 배를 타고 학교를 가기도 한다. 그 가는 길에 있는 기봉은 다양한 모습과 나름대로 부여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불법으로 운행하는 작은 배를 가진 이는 어촌(漁村)에서 잠시 내려 산 유자(柚子)에 바가지를 씌워 불쾌하게 했지만 다시 양수오 근처에서 펼쳐지는 장관이 그것을 잊게 했다.

양수오는 배낭여행자들의 메카가 된 곳이다. 윈난(雲南)성 리지앙(麗江)과 더불어 서양인들이 몰리는 독특한 여행지가 된 양수오는 주변에 최하 1600살을 먹은 노용수(老榕樹), 백색의 동굴인 인즈옌(銀子岩), 산에 뚫린 거대한 구멍으로 낮에 달이 보인다는 위에량산(月亮山) 등이 있지만 양수오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양수오 내부에 있는 시지에(西街)다. 이 것은 이름처럼 서구의 젊은이들이 몰리는 곳이라는 뜻이다.

5백미터 가량 길게 이어진 길의 양편에는 윈난성 리지앙의 고성처럼 수많은 게스트하우스와 각종 특산품점들이 몰려 있고, 수많은 서양인들이 중국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숙소로 오는 길에 만나는 붉은 등의 이발소들은 나를 슬프게 했다. 이발소를 표방하고 음란영업까지 하는 이들을 보면서 나는 호치민 여행에서 만난 가이드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그곳을 찾는 한국 여행객 가운데 여자를 요구하지 않는 이가 처음이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역사를 거슬러서 참회할 수 있는 도덕성이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의 어머니가 누나가 끼엔처럼 이방의 군인들에게 유린당했건만 우리가 그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 바오닌의 책에서는 그런 현실이 있지만 결코 일방적인 미움과 좌절이 있지 않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작가 끼엔을 말하는 또 다른 전달자의 입을 통해 풀이되듯 끼엔은 편집증 환자, 혁명의 시대를 산 산 증인, 수많은 생명을 죽인 죄책감에 유령처럼 밤거리를 떠돌아다닌 인물, 한 여자를 너무나 사랑했지만 영혼 속에 양성을 지닌 인물, 우리 시대에 마지막 남은 프티브르주아, 반항아, 독단주의자 등 많은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사실 인간이 어떻게 한 가지 모습에 소명을 담고 인생 내내 매진하고 살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의 극단을 겪었다는 특수성이 있는 끼엔의 모습이야말로 삶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아름다운 교과서일 것이다.

우리는 영화 '람보' 등을 통해 무참히 쓰러지는 베트콩을 보며 통쾌함을 느낀 편견과 무지의 덩어리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그 무지를 넘어서는 위대함이 있다.

결코 평범해질 수 없는 슬픈 군상들

▲ 리지앙의 중류에 있는 싱핑 부근의 모습. ⓒ 조창완
구이린이 속해 있는 광시성은 베트남과 붙어 있다. 광시성 난닝(南寧)이나 베이하이(北海)에서는 영화 ‘인도차이나’로 알려진 하롱베이로 가는 여행상품이 있을 정도다. 난닝에서는 기차로 한 시간만 가면 베트남에 닿는다. 양수오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우연히 연락이 된 우리 배낭여행자들과 술자리를 늦게까지 하고 호텔에 든다. 다음날 버스편으로 구이린시로 나와 민속풍경원(民俗風景園)에 들렀다. 쿤밍에 비해 휠씬 작고,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더욱 박제가 되어버린 소수민족의 슬픔 같은 것이 느껴진다.

저물 무렵 기차에 몸을 싣는다. 우연히 만난 한국 청년 배낭여행객들이 눈에 띈다. 기차 시간 때문에 중요한 코스를 놓친 이들에게 베이징여행에 알려줄테니 시간 나면 오라고 말한다. 같은 칸에 탔으니 오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여행에 대해 물을 마음이 없다. 나 역시 ‘졸라’를 연발하는 이들의 대화를 듣고, 억지로 말을 붙이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다. 결국 앞에 가는 이들이나 후에 가는 이들이나 똑같이 되고 만다. 베이징 서역에서 내려 서로 말도 없이 각자의 길을 간다.

베트남 여행길의 마지막에 들른 곳은 일찍이 프랑스인이 '통킹의 알프스'라 불렀던 사파였다. 그곳에서 기차역이 있는 중국과의 국경 리오카이로 내려오는 작은 미니버스를 탔다. 내 옆에는 작은 체구의 한 베트남 여인이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서먹해진 나는 용기를 내어, 옆에 앉은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40살이지만 미혼인 그녀는 공무원으로 있었다. 내가 남주딘이라고 밝혔을 때, 그녀의 눈가에 잠시 스치던 작은 원망의 눈초리. 난 솔직히 변명을 했다. 우리나라도 어쩔 수 없노라고. 나이로 보면 그녀도 참전을 했을 나이였을 법하다. 능숙한 영어에,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을 보면 전쟁 당시 전사였을 가능성은 더욱 높다. 쉽사리 말을 더 붙일 수 없을 때, 난 그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녀의 눈빛에서 드러나는 슬픈 원망에서 난들 어찌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바오닌의 슬픈 독백이 떠오른다. “나도 너처럼 깨져버린 꿈을 안고 괴로워하며 사는 군인이야. 그런데 우리 시대는 끝났어. 동무. 전쟁에서 영광스런 승리를 거두었지만 우린 사실 패배했어. 우리 같은 사람은 이제 절대 평범해질 수 없어. 우린 이제 정상적인 목소리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말할 수 없게 되었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인간다운 목소리를 찾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덧붙이는 글 | <책소개> 베트남의 시각서 본 베트남전

바오닌의 ‘전쟁의 슬픔’은 1991년 베트남문인회 최고상을 비롯해, 1994년 영국 <인디펜던트>지 최우수 외국소설 선정된 작품으로 베트남의 시각에서 본 베트남전을 선명하게 보여준 소설이다. 1969년 하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북베트남인민군에 입대했다가 500명의 부대원 가운데 살아남은 10명 가운데 하나인 바오닌은 캄보디아, 라오스 전쟁에도 참가하고 1975년 사이공 함락 전투에도 참여했다가 종전후 시체처리반을 마지막으로 제대해 1977년에서 1982년까지 하노이 종합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다. 한국 작가들과의 만남에서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소설을 통해 한번도 이루지 못한 진정한 사랑을 꿈꿉니다”라고 자신의 창작관을 말한다. 

베트남을 이야기한 우리 문학작품도 적지 않다.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을 비롯해 안정효의 ‘하얀전쟁’,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이상문의 ‘황색인’ 등으로 바오닌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한 짙은 회의가 어조의 중심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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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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