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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동안 중국의 안방극장을 점령하고 있는 드라마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상당수가 강희제나 옹정제, 건륭제 또는 명조시대 주원장등의 봉건시대의 황제와 왕조시대에 관한 사극물들이 반수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지금도 황금시간대에는 거액을 들여 제작한 ‘강희제국’이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고, 새해부터는 각종 ‘영웅물’시리즈들과 ‘강호’를 활개치는 진용(金庸)의 무협극들이 대기하고 있어 중국의 안방극장은 옛 영웅들의 부활과 그들에 대한 향수로 긴 겨울밤의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바야흐로 WTO 가입과 함께 세계무역질서를 바꾸고 있는 현대국가의 거인 중국에서 왜 갑자기 시대를 역류하는듯한 ‘황제열풍’과 ‘영웅열풍’이 불고 있는지 문득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중국에서 TV드라마나 서점가를 중심으로 봉건왕조시대에 대한 회고와 역사속의 각종 영웅들 및 황제들에 대한 ‘복고’ 열풍이 불기 시작한 시점은 아마도 90년대 중반이후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그 절정은 ‘옹정왕조’, ‘수호지’, ‘삼국지연의’와 ‘환주거거’등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이 ‘황제열’과 ‘영웅열’은 본격적인 유행의 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했고 잇따라 강희제와 주원장등을 소재로 한 각종 사극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다.

‘인치’에서 ‘법치’국가로의 전환과 ‘신민’에서 ‘인민’으로 그리고 다시 ‘공민’으로의 신분변화를 추구하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이들 봉건왕조시대의 황제들이 어떤 심리적인 대리만족을 시켜주길래 이렇게 인기리에, 절찬리에 팔리고 있을까.

그것은 영웅이 없는 시대에 옛 영웅들을 그리워하는, 그리고 또 중국적인 영웅을 만들고 싶어하는 중국인들의 심리 근원에 내재된 소망 때문이다. 이러한 추측은 99년도에 ‘옹정왕조’ 신화를 만들어낸 그 드라마 감독 후메이(胡玫)의 말에서도 입증되고 있다.

흔히 중국역사에서 폭군으로 인식되어온 옹정제를 강희제나, 건륭제, 진시황제보다도 더 위대한 업적을 쌓은 ‘영웅’으로 재부활시킨 의도에 대해 그녀는 “프랑스인은 나폴레옹을, 미국인은 워싱턴을 영웅으로 받들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그럼 중국에는 이러한 영웅이 없는가? 나는 중국인을 위해 한 명의 또는 몇 명의 위대한 인물들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고 그 속내를 밝혔다.

현대 중국인들의 잘못된 ‘영웅사관’과 그 근원에 대한 해부

‘황제와 건달’(皇帝与流氓)는 바로 이러한 중국인들의 ‘속내’와 잘못된 영웅관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고 있는 왜곡된 문화현상에 대한 비판서이다. 책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은 중국전통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던 양대축인 ‘황제’와 ‘건달’ 또는 ‘부랑자'문화가 오늘날 중국의 현대화에 어떠한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으며 또한 중국의 대중문화를 어떻게 오도하고 있는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상■중■하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지난 몇 년간 중국의 주요한 잡지등에 게재된 관련글들을 모아 편집한 책으로 참여한 필진들 대부분이 중국의 학계와 문화계등에서 ‘글발’깨나 날리는 유명인사들인지라 그 필치들이 자못 매섭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맥’은, 중국 전통사회의 ‘황제’와 ‘건달’은 결국 배다른 형제와 같으며 본질상 한 핏줄을 이루면서 중국의 장구한 역사속에 섞여 함께 흘러왔다는 것이다.

즉, 진시황의 중국통일 이후 중국역사속에 등장한 수많은 황제들의 행적과 ‘황권주의’로 불릴 수 있는 중국봉건시대 정치문화의 기저에는 사회주변을 떠도는 ‘유민’(游民)문화와 유민지식인들이 이끈 반사회적 문화가 침잠되어 있다고 본다. 이들 유민집단에서 파생되어 나온 ‘유맹’(流氓, 건달이나 부랑자)문화 그리고 이러한 ‘건달‘문화의 영향은 문화대혁명의 홍위병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고 현재 유행하는 대중문학이나 문화속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중국에서 ‘유민’(游民)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은 대략 송대이후라고 할수 있다. 송대이후 중국사회에는 잦은 자연재해와 기아, 전쟁등의 원인으로 각 도시마다 농촌에서 올라온 유민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일정한 사회적 지위나 고정적인 연고등이 없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사회계층인 동시에 기득권 및 주류사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반사회세력으로 자리잡아 갔다.

때문에 이들은 일정한 문무를 갖춘 같은 계층의 지식인들의 지도하에 각종 농민봉기등에서 실제로는 농민들보다도 더 주요한 역할들을 담당했었고 ‘황권주의’의에 대한 적대감이 가장 강했던 집단이었다.

어떻게 보면 가장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세력이 될 수 있었던 이들 ‘유민’ 집단들이 중국역사속에서 진보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결국 ‘건달’로 밖에 남을 수 없었던 것은 사회에 대한 올바른 개혁적 대안을 가지지 못하고 사회의 주변에서 맴돌면서 사회의 공공질서와 안정을 해치는 ‘부랑자’들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이들중 집권에 성공해서 ‘황제’로 탈바꿈한 ‘건달’들은 황제가 되자마자 예전의 적대세력이었던 귀족들과 지식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을 하기 시작했고 ‘제도’를 중심을 한 개혁보다는 또다른 ‘정통’을 내세우며 황제전제주의를 확립해 나갔다. 이들 ‘건달’황제의 대표적인 예는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에게서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서구의 봉건주의와 비교되는 중국특색의 ‘황권주의’ 정치제도와 문화를 형성하면서 중국이 영국이나, 프랑스, 일본등의 국가와 같은 근대적인 개혁에 뒤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즉 합리적인 관료정치의 기제가 없이 황제 일인의 ‘전제’에 의존하다 보니 사회적 부패와 무질서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다.

필자들의 주된 인식의 흐름은, 이러한 전통적인 황권주의 문화는 중국의 근대화를 늦췄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현대적인 정체제도와 정치문화 형성을 방해하는 ‘악령’이라고 지적한다. 즉 마땅히 ‘공민’이 되어야 할 중국인들이 여전히 정치에 대해 수동적이고 심지어는 ‘신민’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정치제도속에 남아있는 ‘황권주의’의 책임이 크다는 얘기다.

뿐만아니라 과거의 ‘유민’ 집단이 오늘날 ‘민공조’ 현상으로 대변되는 도시 민공들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이들은 또다른 현대의 ‘부랑자 문화’와 대안없는 반 사회세력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그리고 이들 ‘부랑자’집단의 문화는 흔히 왕슈어등으로 대표되는 ‘痞子文學’ 즉 룸펜문학과 룸펜문화를 양산하는 근원이 되고 있다고도 말한다.

중국적인 ‘영웅’은 누구인가?

중국의 많은 시청자들은 현재 방영되고 있는 ‘강희제국’이나 진용의 무협물 시리즈들, 그리고 예전의 ‘옹정왕조’같은 재미있는 역사드라마등을 보면서 무슨 거창한 ‘역사인식’이나 진정한 인과관계의 본질따위를 염두에 두고 보지는 않는다. 즉 분석하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즐기면서 보는 것이다.

이 책의 필자들은, 바로 이러한 대중들의 심리를 악용해서 ‘옹정왕조’나 ‘수호지’, ‘삼국지연의’같은 엉터리 역사극들이 나오고 있고 이것은 중국인들에게 잘못된 영웅관을 심어주고 있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역사의 폭군을 역사의 ‘영웅’으로 둔갑시켜서 중국적 영웅을 만들려고 하고, 강호의 건달들에 불과한 패거리들을 인간관계의 의리와 정의의 표본으로 미화시켜서 역시 ‘영웅’들로 둔갑시키는 오늘날 중국의 ‘살아있는’ 대중문화들속에 담겨있는 논리는 모두 ‘죽은 것’들이라고 냉소한다.

그러나 그 ‘죽은’ 영웅논리에 탐닉하고 있는 13억의 대중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정말로 떠받들어 모실 현대의 영웅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과거의 황제와 강호의 건달들 속에서 어떤 중국적인 영웅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중국인들의 상당수가 이러한 영웅신화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중국에 이렇게 많은 영웅이야기들이 나돌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속의 한 필자도 바로 이점을 들어 중국인들의 잘못된 영웅관을 꼬집고 있다.

“중국인은 언제나 하나의 순진한 꿈을 가지고 있는데, 이 꿈속에는 하나의 이상국가가 있고 이 이상국가 안에는 단지 한명의 좋은 황제와 좋은 정부, 청렴한 관료들만 있다면 천하가 더욱 태평해 질거라고 믿는 것이다. 중국인이 믿는 신은 절반 이상이 모두 인격화(人格化)된 형상이며, 어떤 피안의 세계를 믿는 것이 아니라 현세의 신을 믿는다. 즉 황제를 믿고 청렴한 관료들이나 세상을 구해줄 구세주를 믿는다. 그래서 ‘영웅’을 만드는 것이 중국인의 전통이 되어오고 있다. 그들은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가질 수도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세상과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웅이나 성인이 나타나서 완전한 세상을 만들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중국인이 꿈꾸는 ‘이상국’과 그 이상국의 ‘황제’가 21세기에는 어떤 영웅을 통해 실현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책 ‘황제와 건달’에서는 더 이상 영웅을 기다리지도 믿지도 말라고 경고한다. 이들이 추천하는 현대 중국의 ‘이상국’을 실현시킬 수 있는 열쇠는 ‘건달같은 황제’나 강호의 ‘영웅들’이 아닌 바로 법치와 민주적인 정치제도에 달렸다고 역설한다.

이 법치와 민주적인 제도가 있는 ‘이상국’에서 중국인들은 황제의 ‘신민’에서 정치적으로 해방된 ‘인민’이 되었던 과정처럼 이제는 다시 법적인 평등권과 민주적인 권리, 의무등을 가진 현대 법치국가의 ‘공민’으로 거듭 나야 할때라고 강조한다. 이것만이 중국의 질긴 고질병인 ‘황제와 건달’문화, 그리고 그들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중국인을 계몽하는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다는 필자들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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