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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부딪치는 매서운 바람은 벌써 '삭풍'이다. 얇은 돗자리를 하나 깔아봤지만 땅바닥에서 전해져 오는 서린 기운은 이내 엉덩이를 마비시킨다.

그렇게 보낸 '험한' 세월이 벌써 1년이다. 작년 12월 13일 첫 파업이후 흘려 보낸 세월. 하지만 땅바닥에서 몸을 떼기엔 달라진 현실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그곳에 있다.

지난 13일은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 회사측의 계약해지와 도급전환 방침 등에 반발해 파업을 시작한 지 1년째 되는 날이었다.

1년 전 만났던 그를 다시 만나다

이날 오후 2시 한국통신 대구본부(남구 봉덕1동 소재) 앞에는 1년 전 그날이 되돌아온 듯 '파업 365일 결의대회'를 가지기 위해 대구지역 한국통신 계약직 노동자들이 모였다.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한 사람이 있었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1년 전 한통 계약직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만났던 권혁길(27) 씨.

대구전화국에서 계약직으로 선로 담당을 맡아 일하다 계약해지 당한 권 씨는 1년이 지난 이날에도 여전히 계약직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참담하죠. 작년에 눈맞으며 힘들게 보냈던 겨울이 다시 돌아왔으니... 벌써 한 해가 흘러갔어요. 그런데도 싸움이 안 끝나니깐 부모님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권 씨는 그나마 나은 형편이다. 가정을 꾸리고 있는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더욱 힘든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덧붙인다.

"일단 결혼한 사람들은 가정 때문에 돈 나갈 일들도 많고 해서 빚을 많이 지고 있는 형편이죠. 애들이 있으면 더욱 돈 쓸 일은 늘어나니 더 상황이 안 좋죠."

ⓒ오마이뉴스 이승욱
생각해보면 수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흘러갔다. "1년이 마치 10년과도 같았다"는 권 씨의 말은 그래서 예사롭지 않다. 작년 12월 13일 첫 파업이후 한통 본사 점거농성, 1월에 있었던 한강대교 고공시위, 3월에는 목동전화국 점거 이어 8월에는 국회 옥상이 목표가 됐다. 그리고 최근에는 세상을 놀라게 했던 10월 국회 본회의장 진입까지. 굵직한 노동자들의 싸움에는 한통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긴 싸움의 끝에 '도급화 철회', '정규직화' 요구에 대한 응답은 없었다. 반면 그들에게 남은 것은 19명의 구속자와 60여 명의 불구속자, 그리고 벌금 8600만원이다.

그러나 1년간의 장기파업을 통해 권 씨는 '잃었던 것도 있지만 얻었던 것도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집회 대열에 합류했다.

"사람들을 얻었죠. 동지애라는 말 있잖아요. 이제는 그 사람들 때문이라도 포기하긴 싫습니다."

그들은 아직 점거 농성의 '텐트'를 걷지 않았다

"골을 비워버리는 것 같은 바람을 등지고/ 텐트를 세운다/ 30년 전 전태일이라는 분도 이렇게 외로웠다더라/ 외로워서 더 추웠을 거라더라/ 웅웅거리며 울던 낡은 전선을 갈아주러/ 얼어붙은 전봇대를 끌어안았을 때도/ 이렇게 이가 갈리진 않았다/ ... (중략) ... / 동지들, 텐트가 세워졌다/ 겨울 빈 들판에 선 전봇대에 매달려/ 맨홀 뚜껑 아래 하수구 통신선로를 타고/ 안내 부스에 묶여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던 우리에게// 동지들, 겨울은 봄의 뿌리다"(한통계약직노조 홈페이지 게시판에 실린 시-ID : 박흥열, '봄의 뿌리')

ⓒ오마이뉴스 이승욱
권 씨의 말처럼 한통 계약직 노동자들을 현재까지 끌고오게 한 것은 '함께 텐트를 세우던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까워진다.

한통 계약직 노동조합 대경본부 유준영(34) 본부장은 "노상철야농성 도중에 쓰러졌던 여러 동지들을 생각할 때면 안타깝다"면서 또 "최근에는 국회의사당까지 들어가 구속을 각오하고 싸웠던 분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더했다"고 심정을 비쳤다.

유 본부장은 "하지만 무엇보다 작년 20년만에 불어왔던 추위를 함께 견디며 싸웠던 동지들이 지난 3월 목동전화국 점거 후 떨어져 나가야 할 때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토로했다.

지난 3월 29일 새벽 목동전화국을 기습 점거했던 계약직 노동자들은 경찰의 진압 이후 구속, 불구속으로 이어지는 압력으로 인해 대열을 떠나야 했던 과정이 있었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그러나 그들은 또 다른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파업 1주년을 맞는 이날 전국적으로 벌이는 결의대회 외에도 같은 날 사이버 상에서 '청와대 홈페이지'(www.cwd.go.kr)를 통해 사이버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또 오는 15일에는 2차 '1000인 실천단'을 꾸려 대국민 선전전에 힘을 쏟을 계획이다.

유 본부장은 이에 대해 "우리가 벌일 싸움은 무궁무진하다. 많은 투쟁이 남아 있는 것이다. 패배의식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에 악으로 깡으로라도 싸울 것이다"고 말했다.

한통 계약직 노조의 싸움 1년,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나

경제 한파로 불어닥쳤던 구조조정의 1차 희생양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차가운 아스팔트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그 대열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추위에 잔뜩 웅크린 계약직 노동자. 그들은 또 다시 혹독한 추위와 싸워야 한다 ⓒ오마이뉴스 이승욱
집회에서 만난 한통 계약직 노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은다. "내가 이렇게 투쟁하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러나 그들은 그 투쟁을 1년이나 넘게 하고 있다. 이제 그들을 생존을 위한 '발버둥'에서 자유롭게 해줄 수는 없을까. 또 다시 반복해야 할 1년이 그들에겐 가혹하지 않는가.

집회 대열 뒤에서 발을 구르며 추위를 쫓는 이명숙(28. 고장신고담당) 씨는 그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 끝났으면 했는데 또 겨울이 오네요. 사실 오늘이라도 당장 끝을 보고 싶지만... 작년이 워낙 추웠지만 견뎠는데 올해는 괜찮겠죠.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소홀히 지냈는데 꼭 승리해서 가족들하고 오붓한 시간을 가지고 싶어요. 그리고 안정된 일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성명서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 파업투쟁 1년에 부쳐 

단 하루를 살아도 정규직으로 살고 싶다! 
사람에게는 살아가면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쉼 없이 전진하고, 마음속의 소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한국통신은 계약직, 소위 개 잡부라는 고용형태를 만들어 십 수년간 정규직을 시켜주겠다는 것을 당근으로, 처참하게 일만 시켜왔다.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기본권 마저 보장받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한 아무런 보호장치도 없이 단지 착취만을 당하며 살아왔다. 계약직 노동자들의 단 하나의 소망은 "하루를 살아도 정규직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해왔다. 그러나 추악한 한국통신은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을 내세우며 정규직 임금의 절반도 받지 못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해고의 칼날을 휘둘렀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삶의 기본권조차 무시당한 채 착취의 세월을 견뎌왔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정규직화도 아니었고, 서럽던 차별대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생존권을 무참히 짓밟히는 해고의 고통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더러운 한국통신과 정부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비정규직 완전철폐·정규직화 쟁취"를 외치며 파업을 시작한지 꼭 일년이 되었다. 

짧은 아쉬움... 그러나 힘찬 전진! 
지난 1년 동안 수 없이 많은 싸움을 해왔다. 지금도 모든 것을 걸고 투쟁의 전선을 지키고 있으며, 다시 찾아온 겨울의 추위에 맞서 또 어제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지난해 12월 13일 파업 돌입 이후 한국통신 본사 기습점거, 한강대교 고공시위, 3·29 목동전화국 점거에서부터 국회본회의장 농성 등... 계속해서 죽음을 담보로 한 투쟁을 전개해 왔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다. 계약직 노조의 투쟁은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싸움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힘든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민주노총이나 공공연맹은 계약직노조의 싸움에서 여러 차례 오류를 범하고 투쟁을 상급단체의 뜨뜻미지근한 자세가 계속되는 한 언제나 어려운 길을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약직 노조는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있다. 비단 계약직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켜내는 것뿐만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비정규직 싸움을 안고 투쟁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고개를 돌리려 한들 눈에 보이는 현실이다.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민주노총, 공공연맹의 조직적인 지원과 확실한 보증으로 투쟁의 판을 만들지 않는다면 계약직노조의 싸움은 점점 더 어려운 투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다. 탁상공론과 장고로만 점철된 계약직 노조의 투쟁을 확대하거나 승리로 이끌어 낼 수 없다. 

연대의 소중함 그 따뜻한 마음의 잔상.... 
혼자서는 힘든 싸움이었다. 계약직노조가 지치고 힘들어할 때 마음속의 무거움으로부터 고개를 들지 못할 때 곁에서 힘이 되어 주었던 뜨거운 연대의 손길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노동자의 대의나 투쟁의 명분을 떠나서 계약직노조에게 크나큰 힘이 되었다. 또 한번의 힘찬 전진을 준비하는 계약직노조의 투쟁에 앞으로도 더 큰 힘을 실어주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투쟁의 승리로만 그 고마움에 보답할 수 있다는 것을 계약직노조는 알고 있다. 

계약직노조의 희망 사그라지지 않을 불꽃 "정규직화 쟁취" 
계약직노조의 투쟁이 힘들게 진행되었지만 실천적으로 투쟁하고자 하는 마음은 1년이 지난 지금에도 변함이 없다. 아니, 오히려 더욱 강고하게 발전하고 있다. 우리의 요구는 오직 정규직화다. 이것을 현실로 만들지 않는 이상 계약직노조의 투쟁은 물러설 수 없다. 앞으로 또 한번 죽음을 요구하는 시련이 닥치더라도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고 투쟁 할 것이다. 실천적인 투쟁으로 정부와 한국통신이 자행하는 만행을 온몸으로 막아 낼 것이다. 기억되는 계약직노조의 투쟁이 아니라 이 나라 1300만 노동자 그리고 800만이 넘는 비정규직노동자의 가슴에 뚜렷이 각인시키는 투쟁으로 다시 한발 더 전진 할 것이다.<끝> 

                            2001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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