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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골목에서 따끈한 차 한 잔을 하고 찾은 운현궁은, 마침 유난히 추웠던 날씨 때문이었는지 여느 때보다 방문객들이 적어보였다. 그래서였을까. 1993년 말부터 1996년까지 약 32억 원을 들여 시행한 중수·복원공사로 잘 다듬어진 운현궁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과 함께 한말 비운의 역사가 갖는 처량함이 답사 내내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운현궁에 들어가자면 평일 점심시간이 아닌 다음에야 입장료를 내야 한다. 성인(25세~64세)이라고 해도 7백원이니, 부담이 가는 액수는 아니다. 여하튼 입장권을 사고 조용히 들어서면 넓은 마당을 만나게 된다. 왼쪽으로는 전통 찻집이 없어진 이후 만들어진 간이 음식점이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운현궁의 관리와 경비 등을 담당하던 이들이 기거하던 수직사(守直舍)를 볼 수 있다.

없어졌던 것을 다시 지어 그런지 아직 시간의 때가 덜 탄 수직사를 잠시 돌아본 후, 들어온 대문의 맞은편을 보면 한 그루의 추자나무와 함께 솟을대문이 보인다. 그런데 이 솟을대문에는 세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먼저 이와 같은 중행랑채에는 솟을대문이 아니라 행각의 용마루와 대문의 높이가 같은 평문을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라는데, 여긴 뭔가 좀 특이하다. 아마도 임금님의 아버지가 살던 집이자 임금님이 어린 시절 살던 집이라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

또 자세히 보면 솟을대문이 어딘지 모르게 우뚝선 느낌이 드는데, 문 바로 옆의 청지기 방의 지붕 높이가 행각보다 낮음으로 해서 생기는 상대적인 느낌의 영향인 듯하다. 그래도 가장 특이한 점은 보통의 문과는 달리, 당시 문을 잠그는 데 쓰이는 빗장이 문 안쪽이 아니라 문 바깥쪽에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상상의 나래를 펴보자.

왜 당시 권력의 핵심부에 속했던 이가 살던 집의 문이 ‘비정상적으로’ 달렸을까. 당시 대원군이 가졌던 권력이란 것이 지속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진퇴를 거듭했던 점을 상기할 때, 대원군이 소위 ‘가택연금’을 당했을 당시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노안당(老安堂) 행각의 중문인 이 솟을대문은 ‘정상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1993년 중수를 하면서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바꾸어 놓자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문지방도 없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운현궁의 사랑채인 노안당이다. 위엄있게 자리한 노안당은 대원군이 기거하던 생활공간이자, 고종 즉위 이후 섭정을 하던, 한말 정치의 중심이다. 지금은 내부로 들어갈 수 없게 줄이 쳐져 있어 내부를 샅샅이 돌아볼 기회는 없었지만 밖에서 문과 창을 통해 들여다보기만 해도 정돈된 모습이 여느 양반 집 같지가 않다. 특히 툇간의 여느 한옥들과는 달리 노안당의 삼면을 빙 두르고 있는데. 그 마루가 여느 초등학교의 나무 바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길다란 나무 널빤지의 장마루와는 달리 마루 중 최고급으로 꼽힌다는 우물마루이다.

한편 노안당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면 아담한 굴뚝과 함께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보인다. 아마도 그 아랫목이 대원군이 잠을 청하던 침실이었으리란 상상을 해본다.

이왕 하는 답사, 구석구석 부족함 없이 돌아보아야 할 일이다. 온 길을 잠시 되돌아가 영화루를 끼고 노안당 뒤꼍으로 나간다. 개방형이던 앞 모습과는 달리, 여기서 보는 모습은 상당히 폐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영화루의 주초석 부분이 꽃담으로 메워진 것과 함께 무슨 이유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게 마련인데, 목수 신영훈씨는 이를 두고 ‘자객이 스며들거나 폭탄을 장치하는 것을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 보기도 한다.

“당시 영의정에서부터 울릉도 사또까지 죄다 안동 김씨였던 것이라... 흥선은 외척세력에 대해 혐오감을 갖고 있던 터에 미스 민(민자영; 명성황후)에게 호감을 갖게 됐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가 열린 현장을 보기 위해 다시 노안당 쪽문을 거쳐 노락당(老樂堂)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노락당 행각의 툇마루쪽에서 구수한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희끗한 아저씨 한 분이 방문객들을 행각 툇마루에 죽 앉혀놓고 운현궁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 소리였다. 그 설명이 흥미로웠기 때문일까,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그 설명에 집중한다.

요즈음 대원군과 명성황후, 고종을 중심으로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운현궁에 갑작스레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다며, 서울대 이태진 교수가 1904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잡지 “르 투르 뒤 몽드”에서 발견한 명성황후의 모습이 담긴 기사 스크랩까지 보여주며 설명에 열을 올렸다. 특히 이곳 노락당은 명성황후와 고종의 가례가 열린 곳으로 유명한데, 가례(嘉禮)는 왕이나 왕세자가 왕비나 세자빈을 맞는 혼례를 의미하며, 국혼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번 답사의 마지막이랄 수 있는 이로당(二老堂)은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 씨가 거처하던 곳으로, 왕궁으로 치자면 중궁전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이로당은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사면이 서로 연결되어 아늑한 구조로 되어 있다. 특히 이로당에서 주목할 만한 건물은 노락당 북쪽 행각과 이로당이 만나는 부분에 조성된 ‘면’이랄 수 있겠다. 후원과 이로당의 앞마당을 구분해주는 병풍 역할을 하는 이 행각은 좌우 비대칭형으로 만들어졌는데, 특히 왼쪽으로 약간 치우쳐 설치된 당판문에 아름다운 낙양각이 있어 그 멋을 더해주고 있다.

그러나 운현궁에서는 이런 멋을 맛볼 수 있는 반면 부족함 혹은 안타까움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지하철 3호선의 안국역 4번 출구에는 당시 운현궁과 창덕궁을 감시하는 기능을 하던 일본 헌병대가 사용하던 건물이 남아 있는데, 현재는 ‘일본 문화원’이라는 이름으로 이름과 기능이 바뀌어 운현궁과 어깨를 거의 맞대고 있다. 또한 현재 덕성여대 소유인 양관은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을 위해 일제가 지어준 건물로, 일설에 의하면 운현궁의 지위를 낮추는 동시에 감시하는 기능을 수행했다고 한다.

한편 대원군의 큰아들인 재면 내외는 일본 문화원과 운현궁 사이의 영로당(永老堂)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영로당 앞에 있는 김&장 법률사무소의 김영무 변호사가 살고 있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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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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