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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14년만에 '20세기판 마녀사냥'의 전모가 들통났다. 더불어 '비련의 여인' 김옥분 씨(1952∼1987)도 무시무시한 '여간첩'의 누명을 벗게 되었다.

마녀사냥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의 정치적 신조를 절대화하여 이단자를 유죄로 만드는 현상"(두산세계대백과).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을 집단적 광기로 몰아넣었던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라는 절대적 '정치적 신조'는 남편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한 한 평범한 여인을 '여간첩'으로 둔갑시키는 신통술(?)을 발휘했다.

실제로는 김옥분 씨(이하 존칭 생략)의 경우 '이단자'가 아닌 '피해자'에 불과했지만, '미인계를 써서 남편을 납북하려 기도한 가증스런 여간첩'이라는 '유죄' 선고를 받은 채 14년 동안 '마녀'의 신분으로 구천을 떠돌아야 했다.

흔히 '암흑의 시대'로 불렸던 중세시대에는 '마녀 감별법'이라는 것이 있었다. <마녀사냥의 역사>(오성근, 미크로, 2000)는 그 방법을 다음과 같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마녀인지 아닌지를 감별하기 위해 여성의 옷을 벗기고 손발을 결박해 물에 집어넣는 장면. 수지김을 '여간첩'의 붉은 포승으로 묶어 '북풍사건'의 물 속에 처박은 것은 누구인가? ⓒ 출전: <마녀사냥의 역사>
"형리는 혐의자의 손발을 십자가 형식으로 묶은 뒤에 밧줄로 연결해서 세 번을 강물이나 또는 물통에 담가 보는 식으로 시험한다. 만약 그 혐의자가 물 위로 떠오르면 마녀가 되는 것이고, 그에 반해서 혐의자가 오랫동안 물 속에 가라앉으면 그는 무혐의가 되는 것이다. 이 시험은 죽지만 않으면 당연히 물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시험이다. 왜냐하면 호흡을 하지 못하고 가스가 몸에 차 오르면 자연히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건 애시당초 마녀 혐의로 몰린 여인이 100% 질 수밖에 없는 불합리한 게임의 법칙이거니와, 결국 김옥분도 그런 야만적 실험의 대상이 된 셈이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유럽인을 광란으로 몰아넣었던 마녀사냥이 이성적 세계관과 과학정신이 시대정신으로 대두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것처럼, 망각의 물 속에 말없이 잠겨 있던 김옥분도 2001년 11월 어느 날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우리 앞에 그 참담한 모습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서울지검 외사부가 지난 11월 13일 김옥분의 전 남편이자 현재 잘 나가는 벤처기업 대표인 윤○○ 씨를 살인과 사기 혐의 등으로 기소한 것이다. 그것은 살인사건 공소시효를 채 두 달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내려진 전격적인 조치. 하마터면 김옥분은 간첩이라는 누명을 영원히 벗지 못할 뻔했던 것이다.

한편 1987년 당시 이 사건의 은폐·조작을 주도했던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도 이 사건에 대한 은폐·조작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동시에 진상규명에 나서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도 몇 년 전만 해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 설사 갈짓자 걸음일지라도 아무튼 역사는 조금씩이라도 진전하기 마련이라는 징표로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다면 김옥분의 "손발을 십자가 형식으로 묶은 뒤에 밧줄로 연결해서 세 번을 강물"에 처박은 "형리(刑吏)"들은 누구인가? 과연 그녀를 목조른 뒤 흉기로 찔러 죽인 남편만이 범인일까?

그 전에 잠시 '수지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김옥분이 과연 어떤 인물인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김옥분의 인생역정을 되짚다 보면 마치 1970년대를 풍미했던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를 연상케 되거니와, 그녀는 가난한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했던 수많은 우리의 '누이' 중 한 명이었다.

▲ 1976년 홍콩으로 건너가기 전 호스티스와 일본인 현지처 시절의 김옥분. ⓒ 출전: <신동아> 12월호 기사에서 재인용.
1952년 충북 충주에서 1남6녀 중 차녀로 태어난 김옥분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다가 산업화 초기인 1972년 밥벌이를 위해 상경했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의 그녀는 시내버스 안내양, 호스티스, 일본인 현지처 등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면서도 가족에게 현찰을 송금한 억척스런 '처녀 가장'이었다.
김옥분은 1976년 '홍콩드림'을 탈출구로 여기고 중국계 남성 량칭화와 위장 결혼해 홍콩으로 빠져나갔다. 애초에 돈벌이가 목적이었던 그녀는 홍콩으로 오자마자 량칭화와 이혼한 뒤 또 다시 호스티스가 되었다. 당시 그녀는 한국계 술집인 '코리아 가든' '리무진' '가림' 등에서 일했는데, 이때부터 사용한 이름이 바로 '수지김'이다.

중국계 홍콩 남성 우민밍의 '세컨드'가 되어 딸 '쏘냐'를 낳으며 잠시 행복한 시간을 갖기도 했던 김옥분은 34세가 되던 1986년 우민밍과도 사이가 벌어졌다. 그 무렵 그녀는 홍콩에 와 있던 여섯 살 연하의 한국 남성 윤(당시 28세) 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신혼이 채 세 달도 지나기 전인 1987년 1월 2일경(검찰 추정) 남편의 사업자금 문제로 부부싸움을 하다 살해되면서 서른 다섯의 나이로 이국 땅에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여기까지는 그저 한 여성의 불행한 사생활에 불과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김옥분의 비극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광주학살과 5공비리 등의 원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전두환 정권이 철권통치를 펼치던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했던 한 여성의 죽음은 전혀 엉뚱하게 왜곡되기 시작한 것이다.

비명횡사한 김옥분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당시 절대권력에 의해 '여간첩 수지김'으로 둔갑했다. 특히 당시 코너에 몰려 있던 전두환의 심복인 장세동 부장이 이끌던 안기부는 일거에 국면을 전환시킬 어떤 계기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김옥분의 죽음은 개인에겐 '불행'이었지만, 당시 정권에겐 '호재'였던 것이다.

물론 '여간첩 쇼'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김옥분의 남편인 윤 씨의 거짓말이었다. 그녀가 살해되고 3일이 지난 1987년 1월 5일 싱가포르 미국대사관에서 한국대사관으로 인계된 윤 씨는 "조총련의 사주를 받은 여간첩 수지김과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홍콩에서 싱가포르 북한대사관으로 끌려와 납북 당할 뻔했다가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했다"고 진술했다.

한국 언론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1월 8일부터 이 사건을 '북한 공작조직에 의한 한국 상사원 납북미수 사건'으로 대서특필하기 시작했다. 도하 신문 지면에 '여간첩' '미인계' 등 첩보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용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외무부 대변인도 거들고 나섰다. 이 사건을 영화배우 윤정희 납치 기도, 신상옥·최은희 납북사건과 연계시키는 논평을 발표한 것이다.

물론 당시 싱가포르 북한대사관은 납북기도를 전면 부인하면서 윤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국내 언론에 의해 철저하게 묵살 당했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윤 씨의 거짓말에 속수무책으로 속아넘어갔다는 말인가.

▲수지김 사건의 진실은 14년이 흐른 뒤에야 세상에 밝혀졌다. ⓒ <신동아> 12월호 표지에 소개된 이정훈 기자의 기사.
최근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이하 <신동아> 12월호 '이정훈 기자의 수지김 피살사건 7년 추적기' 참조)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은 이미 처음부터 윤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싱가포르 한국대사관은 미국대사관으로부터 윤 씨를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고 넘겨받은 상황이었으며, 윤 씨의 진술도 횡설수설 일관성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기부를 비롯한 전두환 정권의 상층부는 이 사건을 '여간첩이 미인계를 써서 한국 상사원을 납북하려 획책한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몰아가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 씨의 진술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간첩사건으로 몰아가려 했던 것이다.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도 의인(義人)은 있었다. 당시 이장춘 싱가포르 한국대사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본국의 안기부와 외무부 상층부가 주도한 '간첩조작사건'에 따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1월 8일로 예정된 기자회견도 싱가포르가 아닌 태국 방콕으로 옮겨서 열리게 됐다. 애초에 안기부는 이 대사에게 싱가포르 대사관에서 윤 씨 기자회견을 열라고 요구했지만, "윤 씨의 증언이 횡설수설해 진실이 무엇인지 명확치 않기 때문에 섣불리 기자회견을 열 수 없다"고 끝까지 버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장춘 대사는 외무부 본부에 불려가 시말서를 쓰기까지 했다.

당시 한국 언론도 '간첩조작사건'을 방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윤 씨는 방콕 기자회견 다음날인 1월 9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해 다시 한번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언론은 그런 윤 씨를 '사지에서 탈출해온 반공투사'로 미화하기에 바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로부터 17일이 흐른 뒤인 1월 26일 윤 씨 부부가 함께 살던 홍콩 자택에서 김옥분이 목이 졸리고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시신으로 발견됐는데도 어떤 언론도 이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미제로 끝날 뻔했던 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 기자의 끈질긴 추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동아>의 이정훈 기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거니와, 그는 1995년 한 언론계 선배의 귀띔을 받고 이 사건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정훈 기자는 당시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했던 사람들과 김옥분의 가족들을 만나면서 사건의 베일을 하나둘씩 벗겨나갔다. 그리고 당시 근무하던 <주간조선>(1995년), <시사저널>(1998년)에 보도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편집장의 반대로 무산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취재를 시작한 지 약 5년 후인 2000년 2월에야 이 사건은 <주간동아>에 처음으로 보도됐고, 한달 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연출 남상문 PD)에서 보완 취재해 보도하며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이후 서울지검 외사부가 홍콩경찰의 '수지 김 살인사건' 수사자료를 입수하며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고, 지난 10월 24일 윤 씨를 전격 체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김옥분의 가족들은 그후 어떻게 됐을까.

물론 '간첩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힌 뒤 온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노모 김성순 씨는 사건 당시 안기부에 끌려가 욕설과 구타를 당한 뒤 화병으로, 오빠 김만식 씨는 술로 화를 삭이다 교통사고로, 공무원이던 언니 김옥녀 씨는 직장에서 쫓겨나 정신병을 앓다가 한많은 세상을 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막내 동생 김옥님 씨는 시댁의 구박을 받다가 이혼을 당했으며, 어린 조카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다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중학교 2학년 무렵에 중퇴하고 말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서, 우리 사회에서 북풍(北風)이니 총풍(銃風)이니 하는 사건들이 왜 자꾸 생겨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많은 독자들은 반공 혹은 반북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문제라면 집단적으로 이성이 마비되고 합리적 반론조차 용납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본질적 원인이라는 생각도 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문제를 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1) 우리가 흔히 지금까지 '정설'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수많은 '북풍사건'이나 '간첩사건'이 사실은 정권의 정치적 목적이나 일부 언론의 왜곡에 따라 과장되거나 조작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2)수지 김 사건에서 확인했듯이, 아무리 평범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언제라도 간첩사건의 희생양이 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탄압이 이뤄지는 것에 대해 이제 국민들이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북풍사건'. 실제로 정권이 제기하면 언론이 맞장구를 치며 난리라도 난 것처럼 몰아갔던 금강산댐과 평화의 댐 사건, 성혜림 망명설 등은 이미 '세계적 오보'로 판명돼 '국제적 웃음거리'가 됐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반 국민들도 모두 알고 있다. 최근에는 '수지김 사건'과 같은 해에 일어났던 '김현희 KAL기 폭파사건'에 대한 각종 의혹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 '간첩사건'. 해방정국 당시와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여간첩 김수임 사건'과 '이중간첩 이수근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해방정국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간첩 김수임'. 최근 미국측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이 사건도 크게 정치적 목적에 의해 부풀려졌음이 드러나고 있다. ⓒ 출전: <민족21> 11월호에서 재인용.
'여간첩 김수임 사건'은 김수임이 동거하던 미8군사령관 헌병감 베어드 대령에게 군사비밀을 캐내어 남로당 핵심간부 이강국에게 전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처형까지 됐던 사건이다. 그러나 최근 <미 육군성 조사보고서>(일명 '베어드 조사보고서')가 공개되면서, 김수임 사건은 '증거불충분'의 과장된 사건으로 드러났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최근 공개된 미 CIC 보고서인 '이강국 파일'에는 이강국이 실제로는 미 CIA가 운영하는 대북공작조직 요원으로 남로당에 역침투된 스파이로 기록돼 있었다는 점이다.

이수근 사건도 '반공투사'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마저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고 주장할 정도로 다양한 증언이 나오면서, 정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악용된 측면이 강한 사건으로 밝혀졌다.(<월간조선> 1989년 3월호 조갑제의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 참조)

같은 간첩사건이라 해도 '여간첩'이라고 하면 뭔가 더 드라마틱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거니와, 수지김 사건도 이와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설적 여간첩'으로 명성을 떨쳤던 마타하리. 최근 마타하리가 실제로는 엄청난 스파이가 아니라 정치적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 최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일고 있는 마타하리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도 주목된다.(이하 대한매일 기자커뮤니티 정운현의 '마타하리 그리고 배정자, 김수임' 참조) '전설적 여간첩' 혹은 '여성 스파이의 대명사'로 불린 마타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위해 첩보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프랑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총살당한 인물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독일에서 이미 용도폐기한 '별 볼일 없는' 심부름꾼에 불과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대독일 선전전 차원에서 일부러 미모의 무희(舞姬)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마타하리를 과대평가해 처형함으로써 정치적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재평가의 논지이다.(프랑스 역사가 레옹 쉬르망의 <마타하리, 음모의 해부> 참조)

마타하리의 본명은 M.G. 젤러. 그런데 평범한 여성이었던 그녀가 남편과 이혼한 뒤 무희가 된 뒤 새로 붙인 이름이 바로 '마타하리'였다. 마타하리의 의미는 '태양(혹은 여명)의 눈동자'라고 한다. 그러나 남성이 지배하는 제국의 지배자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연약한 여성을 '어둠의 눈동자'로 만들어버렸다.

'전설적 여간첩' 마타하리의 '허구적 신화'에서 '수지김'으로 이름을 바꾼 호스티스 출신의 한국 여성 '김옥분'의 이미지가 겹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국가안보는 중요하다. 국가안보의 중요성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수지김 같은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당한 '국가안보'가 아니라 추악한 '정권안보'에 불과하다. 결국 수지김 사건의 핵심적 코드는 양극단적 흑백논리에 기반한 분단구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분단구조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단적 광기에 빠져 마녀사냥의 '공범'이나 '가해자'가 되곤 했던 과오를 반성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마녀사냥의 원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분석은 적합하다 할 것이다.

"마녀사냥이 그리스도교 이외의 어떤 사상과 움직임도 용납할 수 없었던 중세사회에서 대다수 민중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마녀라는 이름의 희생양을 통해 대리 해소하는 동시에 마녀를 따돌린 '우리 사회'는 안전하다는 만족감과 감사함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사회적 배제·통합기제로 사용되었던 것이다."(두산세계대백과)

그렇다. 수지김, 아니 우리의 '누이' 김옥분의 "손발을 십자가 형식으로 묶은 뒤에 밧줄로 연결해서 세 번을 강물"에 처박은 "형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인지도 모른다.

김현희 KAL기 사건 14주기(11월 29일) 하루 전이자 을씨년스러운 이 초겨울의 길목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깨닫고 얻어야 할 자각과 교훈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가 11월 23일 CBS라디오 <변상욱의 시사터치>에 출연해서 방송한 내용을 바탕으로 재정리해 올린 것입니다. <변상욱의 시사터치>는 표준 FM 98.1 MHz / AM 837 KHz에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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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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