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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아침 참선 뒤 자유시간이 되면 나는 관음전으로 갔다. 애써 정진하지 않아도 불상 앞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출가 삼일 째 아침, 어떤 노스님께서 관음전으로 들어와 향을 피우고는 삼배를 했다. 그리고는 정근을 시작했는데 몇 분도 되지 않아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스님은 선정에 든 것 같았다. 아주 규칙적인 그 흔들림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 몸도 흔들렸다.

그날 사자좌에 올라 설법을 해주신 회주(會主) 법흥(法興) 스님이 바로 그 분이었다. 설법이 시작되자 소나기가 거세게 내렸다. 계곡 물소리가 커지니 청산유수요, 스님의 설법이 거침없으니 청산유수였다.

70대 중반이신 스님의 목소리는 계곡 물소리에 묻히지 않을 만큼 또랑또랑하였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려대학교 국문학과를 다녔다는 학력 때문인지 그 말씀에는 문학 취향이 강하게 풍겨나는 것 같았다.

이항복과 표연말의 일화들, 디오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말들, 공자와 자로의 에피소드, 효봉 두산 성철 고승의 수행담들, 그리고 박종화나 김동화의 불교 학설 등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국문시, 한시, 긴 시, 짧은 시, 순수시, 의례시 할 것 없이 시시각각 읊었다. 고개를 70도 쯤 왼쪽으로 돌렸다가는 휙 마이크 쪽으로 되돌리는 것은 기억 재생이 불러일으키는 흥겨움의 표징이었다.

율곡 선생의 생년월일부터 과거 급제 일, 서산대사의 사망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한 날짜, 효봉 스님이 입산한 해 등을 12간지의 계산법을 통해 정확하게 기억하는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노트를 보지도 않고 사명대사의 무상시(無常詩), 육조스님의 오도송(悟道頌), 효봉스님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은상의 조시(弔詩) 등을 정확하게 음송하는 비법이 무척 궁금했다.

지금까지 많은 강연을 들어보았지만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스님의 설법 방식이 승가의 전통인지, 아니면 스님의 독창적인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암송과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는 스님의 설법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여 그 법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자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단순 암기가 사고력을 저해하는 교육 방법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오늘날, 사람의 암기 능력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능력 중의 하나일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니 어찌된 노릇일까.

강의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던 나는 우선 스님의 그런 설법 방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은 오늘날 쉽게 만나기 어려운 것일진대, 스님의 설법 내용뿐만 아니라 설법 방법이 보존되고 계승되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송광사 젊은 스님들께 부탁하고 싶다. 법흥 스님의 설법 모습을 촬영하여 소중한 문화 자료로 보관하라고. 그리고 빠른 시일 내에 법흥 스님의 설법 자체가 무형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스님의 방대한 이야기 보따리는 그 탁월한 기억력에 의존한 것이었지만 또 다른 원천이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절에서 형성된 이야기판일 것이라 짐작했다. 예불을 하기 위해 절을 찾는 불자 중 여성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또 절에는 많은 행사가 있는데, 그 행사의 주역은 언제나 여성들이었다.

절에 온 여성들은 스님들을 구심점으로 하여 이야기판을 만들었다. 이야기판은 일방적이지 않다. 이야기꾼이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고, 이야기가 듣는 사람을 항상 의식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그리고 듣는 사람들이 이이기에 대해 즉각 반응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 절에서의 이야기판은 여성들의 일상적 관심이나 고민을 적극 수용하게 된다.

절의 이야기판이 여성들의 일상적 소망이나 한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은 고려 시대부터 시작된 오랜 전통이다. <안락국전>이나 <금송아지전> 등 우리나라에서 특별하게 발전된 불교계 소설들이 주로 고난에 처한 어머니를 장남이 구해주는 줄거리인 것은, 이런 소설들이 여성들의 현실적 결핍을 충족시켜주고 한을 풀어주어야 하는 절이야기판과 긴밀한 관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절 이야기판의 분위기를 한껏 담고 있는 법흥 스님의 설법은 자연스럽게 가정에서 여성들이 겪는 사연들을 들려주는 쪽으로 나아갔다.

독실하게 부처를 믿는 어떤 며느리가 시집을 가서 '아미타불'을 염송하니 시어머니가 그게 무엇이냐 물었다. 이것 잘 외면 극락간다 하니 시샘이 생긴 시어머니가 "극락은 내가 먼저 가야지"하며 하루빨리 극락 가려고 '열타불, 천타불'하였다. 과연 시어머니가 죽었는데 그 방에서 향기가 나더라는 것이다.

피하기 어려운 고부간의 갈등을 불교적 염송의 기적담으로 승화시킨 점이 독특했다. 그리고 스님은 부부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중시했다.

영감과 부부싸움을 한 어떤 부인이 성철스님을 찾아갔다. 부인은 자기 영감이 소실을 두고 그 소실에게 재산을 다 주었으니 영감이 원수라고 하였다. 그러자 성철스님이 조언을 주었다. 부인이 먼저 영감에게 삼천 배를 하고, 자주 시장에 가서 술과 안주를 사서 영감에게 잘 대접하며, "아이고, 영감님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해보라 했다. 시킨 대로 하였더니 과연 영감의 태도가 달라지고 마침내 부부관계가 원만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패러디되기도 했다. 환갑 진갑 지난 영감이 소실을 두고 본처를 천대했다. 본처가 큰 스님께 그 사실을 고해 바치니, 큰 스님은 부인과 영감은 전생에서는 반대의 관계였는데 현생에서 영감이 본처를 천대하는 것은 전생의 앙갚음이라 했다. 전생의 죄업을 회계하는 뜻으로 영감과 소실을 잘 섬기라 충고했다. 그래서 본처는 매일 진수성찬을 차려 영감과 소실에게 바치며 "내생에서는 절대 부부로는 안 만날 것이오"했다. 영감은 그 말에 자기 행실을 반성하면서도 부인으로부터 받는 극진한 대접을 놓치기가 싫었다. 그래서 "여보, 내생에서도 같이 살자"했다는 것이다. 영감은 내생에서는 자기가 다시 부인이 되는 것을 모르고 그런 말을 하였다.

이렇듯 부부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충분히 있음직한 것이면서도 좀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있음직한 이야기라는 인상을 준 것은 절 이야기판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생활 정서를 담았기 때문이겠고, 작위적이라는 인상을 준 것은 일상적 이야기가 결국 불교적 의미를 추출하는 쪽으로 활용되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도인 스님과 어느 농부 간의 다음 일화도 어떤 의미를 추출하기 위해 상당히 꾸며졌다는 느낌을 주었다.

농부가 도인 스님께 일생동안 교훈으로 삼을 글을 부탁했다. 도인 스님은 이삼일 생각해 보겠다 해놓고서는 삼일이 지나도 아무 말이 없었다. 농부가 떡을 해 가지고 가서 다시 간절히 부탁하니 그제서야 참을 인(忍)을 강조하며 '참는 것이 덕이 된다(忍之爲德)'이란 글을 수십 장 써 주었다. 농부는 그것을 방의 벽과 천장 등에 붙여 두었다.

얼마 뒤 큰 댁에 제사가 있어 아내에게 문단속 잘 하라 부탁하고 길을 떠났다. 그러나 아내가 좀 수상한 일을 할 것 같아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려 몰래 돌아왔다. 담을 넘어 와 방안을 보니 중이 아내와 동침하고 있었다. 칼을 들고 그 중을 죽이려 하는데 순간 벽과 천장과 기둥에 붙어 있던 참을 인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참고 죽이지 않았다. 그 중은 중이 된 자기 누이동생이었다.

현실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말이라는 가르침을 이 이야기는 주었다. 실천은 평범한 말을 가장 유용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아무리 특별하고 고상한 말이라도 실천으로 귀결되지 않으면 부질없는 것이 되니, 일상적 실천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다. 백낙천 이야기는 그 점을 압축하여 보여 주었다.

백락천이 목민관이 되어 순시를 하다가 나무 위에서 참선을 하고 있는 어떤 스님을 보았다. "그 위에 사는 것이 위험하지 않으시요?" 물으니 그 스님은 "당신들이야말로 참 위험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소?"라 반문했다. 백락천은 그가 보통 스님이 아닌 것 같아 설법을 요청했다. "죄악 짓지 말고 모든 중생에게 선행을 베풀라"는 것이 설법의 전부였다. 문인으로서 멋들어진 답을 기대한 백락천은 실망했다. 그래서 "그건 너무 쉬운 일이고 너무 자주 듣는 말이다" 하니, "삼척동자도 법문 들을 줄은 알고, 팔순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법흥 스님은 이 이야기를 발판으로 삼아 한 단계 더 나아가, 위로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교화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래서 입산수도는 염세가 아니라 구세 행위라는 점을 역설했다.

이런 생각은 더 근원적인 인생관과 연결되었다. 죄악을 짓지 않고 중생에게 선행을 하기 위해서는 나의 육신은 잠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짜이며 나의 본질은 마음이나 영혼이다는 생각을 가지라는 것이다. 영육의 이분법은 사람의 정신 구조를 여러 틀로 나누어 체계적인 설명을 하고 또 나의 마음 혹은 나의 영혼이라 지칭되는 것도 순간순간 달라지는 과정일 따름이어 참된 나가 아니라는 불교적 가르침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았다. 법흥 스님의 영육관은 아마도 설법 듣는 사람들의 수준에 맞추어 단순화된 것일 듯하였다. 그리고 그 단순화는 이야기를 재미나게 만드는 데는 꼭 필요한 것이다.

프랑스령에 속하는 알프스 산을 오르던 어떤 사람이 목이 너무나 말라 작은 샘을 발견하고는 그 물을 마셨다. 갈증이 사라지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 앞에 세워진 안내판을 보니 'poison(독)'이라 적혀 있는 게 아닌가! 순간 그는 발작증세를 보였다. 헬리콥터에 실려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렇게 많은 독을 마셨으니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구토가 나고 머리가 아프고 창자가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병원 진단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 결과를 통보받자 증상은 씻은 듯 사라졌다. 돌아와 안내판을 다시보니 'poisson'이라 적혀 있었다. 그 사람은 s가 두 개인 것을 하나만 보고 '독'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poisson'은 불어로 물고기란 뜻이었다. 그러니까 '물고기를 잡지 마세요'란 안내판을 '독극물'로 이해하고는 독극물을 마셨을 때와 거의 같은 증상을 경험한 것이었다. 스님은 일체 일들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一切唯心造) 가르침을 베풀기 위해 이 일화를 소개했다.

이 재미난 이야기는 '세상 일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뜻으로 이해되기 쉬워, 육체와 마음의 단순한 이분법을 전제하고 또 그것을 강조하려할 때 설득력을 얻게 된다.

부모 자식 관계를 말하는 이야기도 많았다. 왕상(王祥)이 어머니를 위해 한 겨울에 잉어를 얻는 이야기, 맹종(孟宗)이 죽순을 얻은 이야기, 출가한 동산양개와 눈 먼 어머니 이야기, 박인로의 조홍감 시조 이야기, 그리고 부모은중경에 대한 이야기 등은 모두 자식이 부모에게 바치는 갸륵한 효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율곡 선생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신사임당은 율곡이 16살 때 돌아가셨는데,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재혼을 하였다. 율곡의 계모는 성질이 참 좋지 않았는데, 그런 계모를 율곡은 지극 정성을 다 들여 봉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곡이 먼저 죽자 계모는 진심으로 애통해 하며 3년간 소복을 입었다고 했다.

그러나 스님의 이야기는 가부장제적 인정주의에 기울기도 하였다.
'1964년 12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독을 방문하셨지. 박 대통령은 뤼브케 서독 대통령께 청자와 병풍을 선물했다네. 박정희 대통령은 돈벌이 하기 위해 그곳까지 가 있던 간호원과 광부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다가 통곡하셨단 말씀이야. 먼 이국땅에서 나라와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그들을 보니 괜히 자기가 고생을 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던 게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박 대통령은 계속 울었지. 옆에 앉아 있던 뤼브케 대통령이 자기 손수건을 꺼내 드리자 박 대통령이 그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네. 돌아온 박 대통령은 더 큰 힘을 얻어 이 가난한 나라를 구원하시기 위해 증산 수출 건설을 다짐했지. 그리고 서독 고속도로를 본따 우리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했단 말이야.'

스님은 당신이 감동하는 만큼 청중들도 감동하리라 확신하며 이야기를 꾸려갔다. 정치적 성격이 복잡한 이야기도 가정의 화목을 중시하고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마냥 위해주는 인정주의의 입장에서 풀어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스님의 도가 이런 수준이 아니라고 확신한 나는 스님 이야기의 이런 통속적 인정주의가 스님이 거쳐온 이야기판의 분위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마무리짓고 싶었다. 도가 높은 스님은 이야기판에 감도는 분위기를 박절하게 외면하지 않고 그것조차 이야기에 실어줌으로써 자비를 실천하고자 했을 것이다. 스님의 이야기는 통속적인 것까지 담아, 마침내 그 통속적인 것을 부드럽게 넘어서게 하는 미덕을 경험하게 하였다.

나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람이 가진 기억의 능력이란 것이 참 소중한 것임을 되새기게 되었다. 사람의 머리가 우리네 삶의 뭇 양상들을 저장하였다가 가장 적절하고 필요한 시점에서 불러 일으킬 때의 즐거움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자질구레한 부분을 무시하지 않는 자상함의 발현이고 과거를 망각하지 않는 현재의 여유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억과 재생의 과정이 만들어내는 흥겨움은 이미 우리 시대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어렵게 되었다. 사람의 머리나 가슴대신 우리 삶과 관련된 정보를 빼곡이 저장해주는 기계들이 흔해 빠졌기 때문이다. 스님은 잊혀져 있던 우리 정신의 한 영역을 고스란히 간직했다가 우리들에게 맛보게 하였다.

그리고 이야기판이 지금도 복원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이야기란 사람의 욕망 중 가장 근원적인 것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부당하게 홀대되고 억제될 뿐이다. 이야기에 대한 욕망은 실제적 욕망이 경쟁적이고 파괴적인 시절에는 화해와 평화를 지향하는 것일 수 있다. 이야기판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만남을 전제로 하고 각자의 상상력 혹은 경험을 존중하며 사람 간의 소통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야기판은 우리 시대에서도 복원되어야 할 소중한 전통이다. 나는 스님 앞에서 젊은 여자 도반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판의 복원이 부질없는 소망이 아니고 불가능한 과업도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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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젖병을 든 아빠, 아이와 함께 크는 이야기>>(돌베개), <<한국야담연구>>(돌베개), <<조선시대 일화 연구>>(태학사),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보림), <<말이 없으면 닭을 타고 가지>>(학고재)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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