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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울타리 속으로 숨은 친일인사 오욕으로 점철된 박흥식의 행적은 후대에 귀한 교훈을 남겨줄 것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오욕의 교훈일뿐 찬미와 기념의 대상이 되긴 어렵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거기 지나가는 학생, 길가에 침 뱉지 말고 민족반역자 동상에 침 뱉도록 하세요."

"저 XX들, 그냥 내버려 둘까요? 가서 주둥이를 콱..."

아침 7시,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쌀쌀한 골목길을 가로질러 아이들이 교문 앞 언덕을 오른다. 쉼없이 지껄이며 등교하는 학생들의 모습은 여느 학교와 다를 바 없지만, 어쩐지 심상찮은 긴장감이 흐른다.

교문 안쪽으론 까만 점퍼깃을 치켜올린 수위아저씨들과 굳은 얼굴의 남자선생님들이 누군가를 노려보고 있다. 족히 열대여섯 명은 넘어 보인다. 어디선가 "저 자식들 그냥 내버려둬야 하느냐"는 볼멘 소리가 터져나오지만, "가만히 계시라"는 지시에 이내 입을 다문다.

교문 밖에선 현수막을 든 10여 명의 사람들이 교문 안에서 쏟아지는 눈초리에도 아랑곳 않고 학생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며 뭔가를 "철거하자"고 외친다.

서울시 관악구 신림10동 328번지 학교법인 '광신학교' 앞. 오늘(9일)로 세 번째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일제때 박흥식 모르면 간첩"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12명이 새벽바람으로 이곳에 달려온 이유는 간단하다. 광신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져 있는 친일파 박흥식의 동상을 철거해야 하는 까닭을 등굣길 학생들에게 호소하기 위해서다.

▲ 일흔넷의 노구를 끌고 친일파 동상철거 촉구 시위에 나선 박영환 옹.
ⓒ 오마이뉴스 노순택
"내 나이 올해 일흔넷이오. 우리 어렸을 땐 '박흥식 모르면 간첩'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박흥식은 유명한 기업가이자 조선반도 최고의 부자였다오. 헌데 부자면 뭣하겠소. 민족을 팔아서 찌운 살인걸. 비행기 회사를 차려 학생들을 동원해 노역을 시키고, 그걸 일제에 갖다 바친 자가 마치 존경해야할 위인처럼 버젓이 교육현장에 서 있다는 건 말도 안되는 얘기지..."

일흔넷의 노구를 끌고 피켓시위에 나선 박영환 옹은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 해방 후에도 처벌받지 않고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현대사의 증인. 그는 "프랑스가 나치부역자들에게 행했던 철저한 처벌을 우리가 반만이라도 본받았더라면 우리사회가 이렇듯 형편없지는 않을 것"이라며 "제발 교과서만이라도 제대로 쓰자"고 호소한다.

한편 이들을 막고, 감시해야 하는 광신고등학교 수위아저씨와 남자선생님들은 '죽을 맛'이다. 아침밥도 못먹고 나와 바리케이드 노릇하는 게 좋을 리 없다.

"저 사람들 무슨 말 하는 지 나도 다 안다. 나는 저 사람들 얘기를 부정할 생각이 없다. 뭔가 근거가 있으니까 이런 운동을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 봐라. 자꾸 이런 네거티브 운동을 해서 뭣하나. 친일파네 어쩌네 할 시간 있으면, 독립운동가를 위한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는 독립운동가도 제대로 대우해주지 못하면서 꺼떡하면 친일인사만 물고 늘어진다. 이거야말로 불공평한 것 아닌가."

과장급의 한 교사는 되레 일장 '훈계'를 늘어놓으며 흥분한다. 하지만 문제의 동상을 한 번 볼 수 없느냐는 물음엔 단호한 "N0!"

민족지도자들이 세운 학교, 친일파의 밥이 되다

친일 기업가 박흥식이 세운 것으로 알려진 '광신학원'은 원래 독립지사인 안창호, 박은식 등이 뜻을 모아 1905년에 세운 '서우사범학교'가 모체다.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오성학교'로 이름을 바꿨지만 1918년 폐교된 뒤, 1921년 다시 문을 열었다가 경영난으로 1939년 박흥식에게 넘어가 '광신학원'으로 문패를 바꿔 달았다.

광신학원의 초대 이사장이 된 박흥식은 일제의 패색이 짙어가던 1945년 4월 학교이름을 다시 '조선비행기공업학교'로 바꾼 뒤 침략전쟁에 동원될 전투비행기를 생산하는 전문학교로 탈바꿈시키면서 친일의 극단을 달리기 시작했다.(그러나 학교법인 광신학원 측은 학교연혁에서 '조선비행기공업학교'시절을 '일부러' 누락시켰다. 따라서 광신학원은 얼핏 학교연혁만 봐서는 민족지도자들이 세운 민족학교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무렵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기고했던 글에는 박흥식의 '황국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 학교 건너편 상가 옥상에서 촬영한 박흥식의 동상. 광신학원의 재단이사장인 그의 아들 박병석 씨는 동상과 함께 기념관을 학교 안에 세워두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특별지원병제 발표로 반도 2천5백만이 기쁨의 절정에 달하여 있을 때 거듭하여 이런 대전과를 접한 것을 황군 장병들에게 대하여 진심으로부터 감사하는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 존귀한 노고에 보답을 할까 하고 적지 않은 큰 부담을 느끼는 바입니다. 아무리 생산력이 풍부함을 자랑하는 적미영(赤米英)이라 할지라도 이대로 나간다면 머지않아 우리 황군 앞에 굴복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때를 당하여 반도청년들은 한층 더 자신의 숭엄한 임무를 깨달아 오는 20일 지원병 모집 기한까지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지원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 1943년 11월 10일 매일신보

"금일의 간담회는 대동아 전쟁을 이겨나가려는 광대한 전력적 규모와 생산력 확대에 증응하는 산업경제인의 새로운 결의를 보인 회의라고 생각합니다. 금일 특히 배알(拜謁)의 광영에 욕(浴)하고 감읍하였는데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대동아전 완수에 모든 힘을 바쳐 산업경제인으로서 부하된 책임을 다하기를 폐간(肺肝)에 명하였습니다."
- 1942년 12월 16일 매일신보


조선총독을 지내면서 악명을 떨쳤던 미나미 지로를 떠나보내며 그가 쓴 글에는 존경과 애정이 흠뻑 묻어나온다. 그는 미나미를 '영원히 못잊을 자애로운 아버지(慈父)'라 부르고 있다.

"재임 6년동안 내선일체라는 큰 길을 향하여 조선통치에 온갖 힘을 기울여 지원병제도, 창씨제도, 징병제도라는 큰 열매를 맺고 재임 6년동안의 자리를 후진에게 맡기고 사임하는 미나미 총독은 아마도 만족하실 것이나 우리로서는 어버이와 같이 자애가 깊은 총독을 보내게되니 참으로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미나미 총독이 조선통치에 남겨놓은 가지가지의 공적은 2천4백만 반도동포의 머리에서 영구히 기억되어 있을 것입니다. 후임으로 오시는 고이소 대장과 다나카 다케오 씨는 모두 조선과는 특히 인연이 깊으신 이들로서 두손을 들어 마음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 1942년 5월 30일 매일신보


박흥식은 해방 후 미국 도피를 준비하다가 1949년 1월 8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1호 체포자로 구속됐지만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풀려났다가 1994년에 사망했다.

광신고등학교에 세워진 동상은 재단이사장직을 물려받은 그의 아들 박병석이 1996년에 세운 것이다. 박 씨는 동상을 세운 것도 모자라 그 옆에 박흥식의 호를 딴 '유재 기념관'까지 건립해 놓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서울시교육청에 "교육현장에 세워진 친일인사의 동상을 철거해 달라"며 민원을 제기했지만 교육청은 "사유재산 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고 있는 상태.

연구소 측은 박흥식이 반민특위에 제일먼저 체포될만큼 친일파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염두, 지역주민 서명운동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장기적인 철거투쟁을 벌인다는 계획이다.

이들은 무엇보다 "광신고등학교 출신들이 이 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참다운 모교사랑의 면모를 보여주길 기대"하고 있다.

교육목표 으뜸은 '반공 안보 정신이 투철한 애국인'

한편 광신고등학교는 5개의 교육목표 가운데 으뜸으로 '반공 안보 정신이 투철한 애국인' 양성을 꼽고 있다. 친일인사들이 해방 후 기득권을 유지하는 열쇠가 '반공 이데올로기'였음을 생각해 보면 짐작가는 바가 없지 않다.

박흥식에 대한 더 자세한 자료를 얻으려면 민족문제연구소 홈페이지(www.minjok.or.kr)에서 자료실 - 친일파 99인 - 제2권 경제편을 살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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