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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세지면 동창교 양민학살사건은 138명의 양민을 '빨갱이'라는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무차별 학살한 사건으로 전국 어느 곳보다 학살의 방법이 잔인했고 학살의 이유 또한 애매했다.

사건 이전의 2대대 5중대

양민학살의 가해부대 20연대 예하 2대대 5중대(중대장 권준옥)는 1950년 12월 6일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함평군 월야, 해보, 나산면의 빨치산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양민 524명을 집단 학살한다.

학살의 계기는 인근 불갑산에서 내려온 빨치산에 의해 군인 2명이 희생당한 것에 대한 감정적인 분풀이었다. 5사단 20연대는 10월 4일 대구에서 광주로 이동한 후 5중대는 함평 월야면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 후 이 부대는 51년 1월 20일 영산포를 경유해 세지면 쪽으로 진군해왔다. 당시 나주에 피난해 있던 세지면장을 비롯 기관단체장들을 불러 세지면을 수복하러 간다는 뜻을 밝힌 이 부대는 면장, 구국연맹원, 청년단, 유지, 경찰 4명과 함께 세지를 향해 출발했다.

51년 1월 21일 세지면

21일 세지면에서 나온 사람으로부터 빨치산이 동창교에 인공기를 세우고 재산을 몰수해 간다는 말을 전해들은 5중대는 오후 3시경 소재지를 좌우로 포위해 들어간다.

150여명으로 완전 무장한 5중대는 세지로 진군하는 도중 세지면 대산리 월대마을 입구에서 일반행인 1명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몇 미터 더 가서 또 다른 행인 1명 등 무고한 양민 3명을 이유없이 사살한다.

그러나 막상 세지면에 들어왔지만 인공기나 빨치산이 없는 걸 인지한 5중대는 동창마을과 섬말을 돌아다니면서 "강연이 있으니 모두 동창교 밑으로 모이라"며 주민들을 동창교 위쪽 자갈밭으로 집결시켰다.

살육은 이때부터 준비되고 있었지만 순진한 마을주민들은 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환영하고자 면사무소 앞에 모여들었다. 당시 군인들은 동창마을에 빨갱이가 많다는 그릇된 정보를 믿고 빨갱이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모이게 했지만 이 마을은 빨치산 활동을 하는 이들이 가장 적은 마을이었다.

주민들을 집합시킨 5중대 군인들은 자기들끼리 술을 나누어 마시면서 "군경가족은 나오라"고 외치고 노인과 아낙네들을 총대로 밀어 빼낸 다음 청장년 140여명을 한곳에 모았다. 5중대는 제외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을로 돌아가 자기들이 먹을 소, 돼지를 잡도록 구국총력연맹 위원장을 비롯 6명에게 지시했다.

무자비한 학살

국군은 대열을 지어 만봉천 북편 나씨 집 뒷 보리밭으로 이들을 끌고갔다. 이 때 대열에 끼었던 백모씨가 뛰어 도망치려다 중대장에게 붙잡혀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살해 당하자 대열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중대장은 "놈들은 공산 도배들이니 전부 사살하라"고 명령을 내려 일제 사격이 가해졌다.

중대장의 지시에 따라 불과 5분만에 96여명이 사살되고 총을 쏜 군인들은 쓰러진 대열을 돌아다니며 확인사살까지 했다. 이 자리에 당시 영산포 중학교 2학년에 재학중인 17세 김군을 비롯 하천변에서 아기를 업고 나온 초등학교 교사 박영만 씨 부인 노점숙 씨가 두 살난 어린애를 업은 채 '빨갱이'라고 사살 당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동창, 섬말 주변 산야에서 작업을 하던 농부 40여명 또한 사살했다. 이 와중에서도 김만호, 전홍복, 김재기 씨가 살아 남아 그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증언했었다.

학살당한 이들 시체는 사살 후 보름간이나 가마니에 덮어씌웠다가 유가족들에 의해 이장되었다. 학살을 감행한 이 부대는 다시 인가로 들어와 소와 돼지, 가구를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갔다고 한다.

5중대 위생병의 증언

당시 5중대에 배속된 위생병으로 세지에 따라온 이가 살아있을 뿐 아니라, 지난 96년 전남도의원으로 활동해오다 96년 9월 민선 1기 나인수 시장과 점심 겸한 간담회 자리에서 자신이 겪은 내용을 털어놨다.

그에 따르면 권준옥 중대장이 아무도 반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거세게 항의하는 여성을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린 뒤 등에 업힌 아기 역시 "인생이 불쌍타"라며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 그 이후 5중대 권준옥 대위는 충무은성 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그 이름을 권영구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2대대 5중대는 세지에서 121명을 학살했으며, 같은 날 3대대 11중대는 봉황을 넘어 다도면 암정리 갱갱굴과 절꼬랑 양민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지 동창교 양민학살 진상규명 추진 경과

98. 7.1부터 유족피해 신고 접수
98. 10.4 - 유족회 구성
98. 10 - 나주시의회 양민학살 진상조사 안건 제의 및 특별위원회 조직건의
99. 2 - 15대 국회 청원
99. 2 - 합동위령제 개최
00. 6.21 -서울프레스센터 이상계의원 참석, 동창양민학살사건 발표
00.12. 26 - 16대 국회 청원
01. 1.18 - 2회 합동 위령제
향후 위령제 건립 모금 및 건립, 관련책자 발간

덧붙이는 글 | 학살현장을 지켜본 염기열 씨 증언

본인은 시국수습 주동체인 구국총력연맹(위원장 나기수)소속 총무부장으로 세지면 동창양민학살 사건 당시 우익인사 약간명이 영산포에 구국연맹을 만들고 거처하였습니다.

51년 1월 20일 오전 9시 조금 넘어 나주경찰서 직원 강성은이란 사람이 세지에 진주하니 함께 가자고 권유해 군인 150여명의 뒤를 따라 갔습니다.

동창 1km 못된 지점인 월대 마을에서 행인 1명을 사살하였고 500미터 전방에서 행인 1명을 사살하였습니다.

세지면에 들어 온 군인들은 집집마다 호별 방문하여 주민을 모은 뒤 군인들이 2열 종대로 약 12명씩 서서 M1총으로 양민을 쏴버렸으며 남은 군인들은 근처 산야에 배치했습니다.

이 때 구국 총력연맹은 점심준비를 위해 장준성씨 집에서 소 1마리와 돼지 3마리를 잡았습니다.

오후 5시께 봉황면 학림마을에 숙소를 마련하여 저녁을 먹고 학림에서 잤으며, 아침을 먹고 그 이튿날인 1월 21일 9시께 영산포로 철수했습니다.

학살동기는 영암군 금정면 국사봉에 인민군 빨치산 부대가 주둔하였고 그 부대를 상대로 전투하여 전과를 올린 것으로 보고한 것 같습니다.

구국총력 총무부는 군인, 경찰 및 행정에 대한 협조 부서였으며 주로 경찰업무가 주 임무였으며, 총무, 재무, 연락부 등 3개 부서가 있었습니다.

어떤 형태든 차후에 증언하겠으며 유족에게는 미안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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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신문에서 역사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관심분야는 사회, 정치, 스포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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