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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초한 이 자식은 갑니다... 우리들은 태국기 아래서 살고 국기 아래서 죽어야 합○○다... 나는 진정으로 태국기를 휘날여 보지 못하구 죽어야 말았습니다. 어머님 제가 간 후에라도 내가 주근 그날 돌아오거든 태국기을 하날 높이 달아주십시오. 야속합니다. 하날님이여, 내가 오날 죽게된 줄 알더라면 외 밤꿈에 보이지 못하였습니까. ○○야, 너날 내가 죽은 후에 아헤를 한가지도 과오가 변함없이 잘 길어서 대한민국에 충성하도록 하여 달라... 금번 대대본부에 간 적에도 대대장님이 내게 충고 하는 말삼은 잘 드렀습니다... 내가 종가에 양자로 들어서 종가을 잘 직히치 못하고 죽게된 것은 일가 ○○○의 얼는들에게 무엇이라고 죄이 말살을 전하였면 조을지 몰으겠습니다. 우리집 가운이 부족하여 이러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만 생각하여 주십시오. ○○야, 너는 커나거든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양민학살 보고서 중 제주도 한 양민의 유서 원문 중)


40년간 국회 지하에 방치돼 있던 한국전쟁 관련 양민학살 국회보고서가 공개돼 뒤늦게나마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국회 의안과 지하문서고에서 발견된 이 조사보고서는 지난 60년 4대 국회 당시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작성한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프로그램 제작팀과 함께 '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조사를 하던 중 지난 1월 발견했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다가오는 6·25를 맞아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이 조사보고서가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왜 이제야 발견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알아봤다.

4대 국회 양민학살 특위의 활동

4·19 혁명의 민주화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던 1960년 5월 23일, 제 4대 국회는 본회의 의결을 통해 한국전쟁 당시의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

당시 위원장인 최천 의원을 포함, ▲경남반(최천, 조길재, 박상길 의원) ▲경북반(윤용구, 주병환, 임차주 의원) ▲전남반(유옥우, 이사형, 박병배 의원) 등 3개 지역에서 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60년 5월 31일부터 6월 10일까지 11일동안 파악된 인원만 모두 8,522명(경남 2,892명·경북 2,200명·전남 524명·전북 1,028명·제주 1,878명)이었다. 또한 같은 기간 보고된 재산 피해는 가옥 10,041호·4,179동, 식량 4,930석, 가축 3,036두, 의류 38,949점으로 조사됐다.

조사특위는 이 같은 결과를 바탕으로 "6·25 동란 전후를 통해 군경에 의한 인명 및 재산의 피해는 격심한 것으로 각 지방에서 보고되는 피해수가 증가 일로에 있다"며 "심지어는 유부녀 및 처녀의 강간과 재산을 소각 탈취하는 등 만행을 자행한 곳도 적지 않았다"고 보고서에 적고 있다.

더욱이 '양민'을 규정함에 있어 "공산괴뢰에 악질적으로 협력한 민간인으로서 군작전상 부득이 살해한 자는 양민에서 제외한다"고 범위를 한정했기 때문에 집계되지 않은 사례도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와 함께 특위는 "조사하는 기간과 인원이 극히 제한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기관과 경찰기관의 기능이 마비됐다"며 "피해자측도 거의 9-11년 전의 일이어서 유족 및 생존자인 소수만이 그 사실을 증언할 수 있어 전체적이 피해의 명확한 수적 파악에 이르지 못했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조사특위가 보고서를 제출하며 ▲군·경·검 합동조사본부를 설치하여 단시일 내 조사할 것▲양민의 생명, 재산상 피해를 끼친 관련자의 엄중한 처단, 피해자에 대한 보상제도를 설정하기 위한 특별법으로 가칭 '양민학살사건 처리 특별조치법'을 제정 촉구를 행정부에 건의한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특위의 이런 활동은 다음해인 61년 5·16 군사쿠데타로 후속조치가 이뤄지지 못한 채 후지부지 돼 버렸으며, 24권의 방대한 조사보고서도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져 갔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현재 조사보고서는 별도의 연구팀에 분석과 정리 작업을 의뢰해 놓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상태다.

조사보고서, 무슨 내용 담겨 있나

이번에 공개된 특위의 속기록은 학살주체와 학살과정을 생생히 증언하고 있으며, 보고서는 각 지역별 피학살자 명단과 학살경위 등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문에 소개된 유서 내용도 제주지역 학살신고보고서 중 일부분이다.

그럼 조사보고서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조사특위는 단기간에 조사해 미흡한 부분이 많다는 표현을 썼지만, 원체 방대한 분량인데다 아직까지 분석 과정 중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통계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기자가 입수한 몇 개의 문서들은 당시 조사가 어떻게 이뤄졌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 지를 보여주고 있다.

경북 영덕군의 한 보고서(사진-신고서 1)는 '과거도민으로서 피살자신고서'라는 이름으로 피살자성명·직업·본적·주소·피살일시·피살경위·유가족 성명 등을 자세하고 적어놓고 있다.

전남 조사반에 속해 신고를 받았던 제주도의 경우(사진-신고서2)는 4·3의 피해가 컸던 때문인지 더욱 체계적으로 이뤄진 듯하다.

'양민학살진상규명신고서'라는 이름으로 본적과 주소·성명·생년월일·학살일시·학살집행자·학살상황·학살후시체처리상황·학살당시증인·유가족·유가족의 희망사항 등 다른 지역에 비해 자세하게 조사됐다.

학살상황을 상세하게 신고할 경우엔 별첨을 첨부하고 있을 정도다. 그 중 하나(신고서 2의 별첨)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학살자는 근실한 농부로서 농사에만 꾸준히 지내는 자로서 4·3 사태 발생이래 좌익계에 가담치 않다는 이유로서 폭도들이 가혹한 협박장들을 연일 보낸 대상자로써 어마어마한 공포속에 지내오다가 4281년(주-1948년) 11월 10일(음) 제1차 공비 탕전에 출전하여 2일간 분투하고 귀가하여 수일간 휴계하든차 동월 15일(음) 대정국민학교에서 모종회합이 있다고 하여 참석하려고 나가는 도중 교문앞 로상에서 모 군인(성명 미상)이 하등이 리유도 없이 "당신 좀 봅시다'하여 대리고 간 것이 귀가하지 않았으며 가족들로서는 본 학살자가 하등의 범법 사실이 없는 무죄한 자이며 폭도소탕에 열열하게 싸우는 자임으로 당시 귀가하리라고 믿었든 것이 두 달 후인 17일(음) 8시경에는 전기 장소에서 아무런 법적 근거로 없이 학살한 것이다' (원문)

또한 이 신고서의 학살자 난에 '2연대'로 써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는 군인이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고 신고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경북 영덕군의 경우엔 '빨갱이들을 원조하지 않는다고 해서'(신고서 1), '보도연맹가입관계'(신고서 3) 등 좌우익의 학살이 교차적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총살 후 돌을 달아 수중에 가라앉게 한 경우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이에 대해 민주당 전갑길의원 관계자는 "신고서의 분석 결과를 좀 더 기다려봐야 하겠지만, '군·경'에 의한 학살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많이 발견된다"며 "이념의 문제를 떠나 무고하게 학살된 양민들에 관한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이번 조사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듯이 정부기록보존소를 중심으로 한 국가기록물관리체제를 개선시키는 정책대안의 마련도 함께 고민할 필요가 있다"면서 "국가기록물 관리체제의 기능과 위상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4월 열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진상규명 특별법> 관련 공청회 자리에서도 국회를 비롯한 정부 기관에 사장돼 있는 상당한 분량의 자료 연구에 대한 촉구의 목소리가 제기된 바 있다.

'전쟁'에 대한 또 다른 경고

그럼 한국전쟁 전후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은 현재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을까.

이에 대해 전의원의 관계자는 "지금까지 제주도, 문경, 거창, 고양, 함평, 노근리 등의 지역에서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피해자 실태조사가 계속돼 왔으며, 90년대 들어선 제주, 전북, 경북 도의회 등 지방의회 수준에서 특위를 구성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학계 및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전국 각지의 유족회와 연대해 현장답사·증언 녹취·토론회 등을 통해 조사작업 진행 중에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과명예회복을위한범국민위원회>(이하 범국민위)와 <미군학살만행진상규명 전민족특별조사위원회 남측본부>(이하 전민특위)다.

특히 강정구교수 등이 대표를 맡고 있는 '범국민위'는 각 지역별 유족회 등 30여개 단체가 참여해 전국적인 피해실태를 조사하고, 특별법 제정 등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반면, 전민특위 남측본부는 학살 당시 최종 군작전권자였던 미군의 직·간접 학살만행을 국제사회에 공론화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한편, 학계에선 현재 한국전쟁 전후기간동안(범국민위는 48년 8월 15일부터∼53년 7월 27일로 한정) 무고하게 학살된 양민의 수를 100만명 내외로 추산하고 있다.

국회 차원에서도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작업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미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과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 관한특별법'이 제정됐으며, 함평양민학살사건, 여순사건, 고양 금정굴 양민학살사건, 강호양민학살사건, 나주동창양민학살사건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청원이 지난해 7월부터 지난 3월까지 총 9건 국회에 제출됐다.

지난 4월엔 김충조 의원 등 여야의원 40명이 발의한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특별법안'과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특별조치법'개정안이 상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50년 전후 '양민 학살'의 피해지역이 전국적인 규모였다는 점에서 통합법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이를 위해 지난 2일 민주당 배기운 의원 등 여야의원 17명(신영국 곽치영 김덕배 이근진 정범구 김경재 김충조 김태식 김효석 박용호 조한천 박주선 이강래 이낙연 전갑길 정균환)은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의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또한, 국회 내 연구단체인 '나라와 문화를 사랑하는 모임'의 대표인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도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사건진상규명및피해자명예회복을위한특별법'을 준비중에 있다.

전의원 관계자는 "4대 국회 조사특위의 활동이 세상에 공개됨으로써 그 통과 가능성이 더 한층 높아졌다"며 "어느 법으로 모아지든 충분히 의견 수렴이 가능하기 때문에 오는 9월 정기국회 통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훈의 달인 6월, 거세게 높아지고 있는 '양민 학살' 진실 규명 촉구의 목소리는 전쟁이 다시는 반복돼서는 안 될 것임을 또 다른 차원에서 각인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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