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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식 관장은 1947년 4월 14일, 전북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실곡에서 김진한 씨와 박족안 씨의 3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전주 성균관중학교 2학년 때, 몸이 허약해서 7살 위의 친척 형(김한무 당시 초단)에게 건강 상담을 하면서 태권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도관에서 태권도를 시작하여 중학교 3학년 가을에 초단을 획득했다. 고등학교 2학년때 2단을 획득했는데, 그 무렵, 몸이 허약해서 태권도를 시작했던 그가 강 체질로 변한 것을 본 동네 어른들은 자녀들을 반 강제로 태권도를 시켰던 일화가 있다.

1968년 6월 맹호 기갑연대 본부중대 행정반으로 파월 했던 그는 1969년 6월 다시 파월하여 퀴논에 주둔했다가 1971년 2월에 귀국했다. 베트남에서의 실전 경험이 없었던 그였지만, 제대 후에도 전쟁에 대한 몸서리를 쳤던 그는 고뇌에 빠졌다.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한단 말인가?" 그 와중에 그는 월남에서 보여준 '한국태권도 시범단'의 경연 성과에 힌트를 얻어 태권도를 통한 인간애를 구상했다.

그래서 다민족의 집성촌이라 할 수 있는 이태원에서 1972년 태권도체육관을 개관했던 것이다. 이태원 명물인 '이슬람 사원' 부속건물에 있는 지금의 체육관 바로 건너편에 있었던 당시의 체육관은 개관과 동시에 경사가 벌어졌다.

수련생이 스스로 누나를 소개시켜준 것이다. 2살 연하의 그녀를 보는 순간, 김관장은 한 눈에 반해 버렸다. 시골 총각이 서울 토박이인 한남동 아가씨를 만났으니, 경사가 아닌가?... 그해 3월 20일, 그녀와 화촉을 밝혔다. 그녀가 바로 현재의 아내인 양인옥(53세) 여사다.

결혼 후, 그는 아내의 내조 덕분인지, 모든 게 잘 되었다. 지역적 특성 때문에 외국인 수련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기쁨을 누렸다. 이른바 잘나가는 체육관 관장이 된 것이다.

군무원, 외교관 등 마치 외국에 있는 체육관이 아닌가 싶을 만큼, 외국인이 모여든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이태원체육관 하면 외국인 체육관이라는 선입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마저 김관장의 겸손 때문이라는게 제자 양인옥(신어체육관 관장) 씨의 말이다. 사모님과 동명이어서 에피소드가 많았다는 양관장은 "김관장님의 인품을 듣고 몰려 든 한국인도 얼마나 많았는데요. 모두들 친아버지처럼 따랐어요. "라며 입을 열었다.

"현재 대한태권도협회 경기분과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는 이정현(36세 5단) 씨도 김관장님 제자입니다. 그리고 지난 1985년 5월경에 필란드에 입성한 이래, 현지에서 13개의 체육관으로 확장시킨 전동근 사범도 김관장의 수제자입니다."

전동근 씨는 지난 1997년 5월2일 미국 캘리포니아에도 입성하여 미국 국가대표팀 여자부 코치로 선임되어 2000년 프랑스 월드컵대회에서 은메달 2개를 획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올 11월 제주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도 미국대표팀 여자부 코치로 출전 한다고 한다. 현재는 미국에 정성을 보이고 있지만, 필란드에도 연고가 있는 전동근 씨는 1992년을 시작으로 1995년, 2000년, 2001년 등 스승인 김관장 내외를 필란드에 초대 해 왔다.

양인옥 씨 자신도 김관장 수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경희대를 졸업하고, 국기원(1988.7.1-1989.10.31)과 대한태권도협회(1989.7.1-1991.1.31) 등을 두루 거친 화려한 경력의 여성 태권도인이다.

그가 스승인 김관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77년경이다. 은광여고에서 운동을 했던 그는 반 친구의 소개로 이태원체육관을 찾았다. "처음에는 감정 표현이 없던 분이셨기에 어려웠지요. 그런데, 곧, 자상한 인품에 감동되어 친아버지처럼 섬기게 되었습니다. 사모님도 그 당시에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불구하고 우리 또래의 먹성 좋은 수련생들을 수시로 자택으로 초대하여 음식대접을 해 주셨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제가 1991년 대한태권도협회에 근무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어요. 그 때 혼수상태로까지 간 상황이었는데 깨어나 보니 관장님께서 제 곁에서 울고 계셨어요. 뒷 날은 따분 할테니 보라시며 TV까지 사주셨어요. 덕분에 기적적으로 완쾌되었습니다." 그 때의 그 눈길과 손길은 저의 인생에 있어 가장 소중한 자산입니다."라고 회상 했다.

이태원의 이한성(전 이태원상가 번영회장/작고) 선생은 지난 1995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관장은 태권도 뿐 아니라 이태원 지역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김관장은 이태원상가번영회 총무이사로써 이태원이 관광특구로써 면모를 갖추는데, 1등 공신이었으나, 1997년 대한태권도협회 경기분과 위원장으로 위촉 되면서 사표를 냈다.

그의 성실함은 경기장에서 유감 없이 발휘되었다. 1991년 대한태권도협회 경기분과위원으로 출발한 그는 93년에 부위원장에 발탁되었고, 1997년에 위원장이 되었는데, 경기장 전반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했다고 한다.

그의 밑에서 있었던 한 경기부 위원은 언젠가 "김갑식 위원장님이 막대걸레로 경기장 바닥을 닦고 계시길래 달려가 보았더니, 선수가 들고가던 물통의 물이 쏟아져 있는 것을 손수 닦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누굴 시키지 그러시냐?고 했더니, '먼저 본 사람이 닦으면 되지, 닦는 사람이 따로 있냐?'시잖아요, 그 때부터 그 분을 존경했습니다."

대한태권도협회의 한 임원은 "지난 1999년 3월10일 국가대표최종전 둘째날에 김갑식 위원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의 입술이 퉁퉁 부었기 때문이었다. 예산삭감 차원에서 경기 일수를 줄이면서 야간 경기로 연장되면서 김위원장이 속앓이를 하다가 입술이 터진 것이다"는 것.

그 임원은 "위원장 잘못이 아니지 않으냐?"며 위로했지만, "그래도 내가 경기분과 위원장 인데," 라며 괴로워 했다고 한다. 그토록 성실하고 참신한 그는, 2001년 신임집행부에 의해 경기분과를 쓸쓸히 떠났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를 탈락시킨 신임 집행부의 수장격인 고위 인사가 지난 달 초순, 비리에 대한 의혹으로 타의에 의해 물러났다는 것이다.

동갑내기 노우종 전 전무 밑에서도 그는 자신의 위치를 벗어난 적이 없다. 오로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을 묵묵히 해왔던 경기분과 위원장 그 자체였다. 천직으로 여겼던 경기장을 떠난 퇴임 경기분과 위원장 김갑식 관장은, 현재 71년 전통의 이태원체육회 회장으로써, 관광 한국의 모습을 다듬고 있다.

아울러, 수 많은 제자들의 정신적 본향인 이태원태권도체육관에서 제2의 양인옥(신어체육관 관장), 제2의 프레드릭(프랑스 까르스스포츠센타)을 양성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스포츠 뉴스에서도 보기 어려웠던 태권도가 정시 뉴스의 이슈로 등장 했습니다. 아픔을 다루는 반대편에서 세계화된 태권도의 감추어진 미담을 다루고자 이 글을 올립니다. 

<김갑식(편)은 1부. 2부로 나누어 올립니다.> 

태권도 관련 미담 제보:news61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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