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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했던 군부독재 시절, 신문과 방송이 언론 본연의 비판 기능을 상실한 채 권력의 대변인 노릇을 했던 사례들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연이어 방송될 예정이다. 이에 해당되는 아이템은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 '자유언론 실천선언', '금강산댐 그후', '도시산업선교회' 등 4개.

각 사건에 대해 언론은 권력의 의도를 확대재생산하여 국민의 여론을 일방적으로 몰고가는 '나팔수'의 기능을 했는데, 세월이 흐른 지금 대부분이 허위, 과장보도였던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방송언론인으로서 일방적인 '단죄'가 아니라 함께 반성하자는 취지에서 이같은 내용을 프로그램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이같은 자기 반성에서 MBC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제작진의 판단이다.

조국은 나를 스파이라고 불렀다
(방송 : 6월 8일 / PD 이규정 789-0102)

85년 9월 9일, 안기부는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양동화가 북한을 방문하여 학생운동 내에 세포를 조직하라는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국내에 잠입, 전남대 강용주를 포섭하는 등 간첩 활동을 했고 김성만은 헝가리와 동독 주재 북한 대사관을 방문, 간첩교육을 받고 침투를 준비했으며, 황대권은 국내에서 정보를 수집한 뒤 방북을 준비하였다는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는 것.

이러한 안기부 발표 바로 다음날 MBC는 <보도특집 -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을 방송했고, 시청자들은 당시 활성화되고 있던 학생운동이 북한의 사주를 받는 것이라는 인상을 갖게 됐다. 유화국면에서 학생운동을 위협적으로 느끼고 있던 전두환 정권의 의도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원본은 9월 1, 2일에 촬영한 것으로 돼 있다. 안기부 발표 이전에 이미 안기부의 요청에 의해 제작이 이뤄진 것.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진이 입수한 원본 테입을 보면 양동화 등의 인터뷰는 철저한 사전 연습에 따라 조작된 인터뷰였음이 드러난다. 인터뷰의 NG 장면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양동화는 당시 안기부 관계자들이 "너를 죽일 수밖에 없는데 살려주기 위해서 인터뷰를 하는 것"이라며 대본대로 할 것을 강요했다고 밝혔다. 당시 MBC 보도특집부의 한 관계자는 "안기부가 제작 요청을 하면 거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사표를 내든지 지시대로 하든지 양자택일이었다. 그래서 팀 내에서는 이런 프로그램은 순번을 정해 돌아가면서 하기로 했었다"고 술회했다.

자유언론 실천선언
(방송 : 7월 13일 / PD 정길화 789-1553)

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실천선언은 박정희 정권의 광고탄압으로 이어진다.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광고탄압에 당시 동아일보 사주가 적극 협력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당시 해직된 기자들은 동아투위, 조선투위를 결성, 지금까지 자유언론 실천운동의 맥을 잇고 있는 반면, 정권의 언론탄압에 협조한 동아, 조선의 사주들은 권언유착 속에 양적 성장을 계속하여 지금의 신문재벌을 이루었다.

1974년에서 1975년에 걸쳐 진행된 이른바 동아투위 사태. 이는 장기집권으로 가던 박정희 정권이 언론을 어떻게 유린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통성 없는 권력은 언론을 철저히 길들이려 했고 이 과정에서 광고탄압이라는 전대미문의 수단이 동원되기도 했다. 문제는 이에 대응하는 언론의 모습이다. 당시 동아일보 사주는 이에 굴복해 134명의 언론인을 쫓아내는 것으로 응답했다.

동아사태는 편집권이 사주에 장악되고 그 사주의 타협으로 인해 한국 언론이 체제순응적 유사권력기관이 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그리고 이는 동아일보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한국언론은 정권과 타협하고 마침내 순치되기에 이르렀다. 5년 뒤 전두환 정권에 의해 자행된 언론통폐합과 언론인 강제해직은 사실상 그 후렴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국면에서 권력의 나팔수나 독재정권의 첨병이기를 거부했던 일군의 언론인들을 만날 수 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동아투위, 조선투위 등을 결성하면서 오로지 진정한 언론인이기를 열망하고 실천했던 인론인들. 그들은 어떻게 투쟁했는가. 제도권 내의 언론인들이 권력에 편입될 때 그들은 언론정신을 어떻게 수호했는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에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프로그램은 실사구시적 접근으로 권력과 언론의 문제, 진정한 언론자유의 본질에 대한 문제를 응시하고자 한다.

금강산댐, 그 후
(방송 : 7월 20일 / PD 이정식)

86년 10월 30일 정부는 북한의 대남 공격용으로 금강산댐을 건설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 MBC는 이와 관련한 보도특집 프로그램을 긴급 편성하여 방송했고, 조선일보는 다음날 가장 먼저 앞장서서 '대응댐 건설'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금강산댐을 방류하면 63빌딩이 물에 잠긴다는 엄청난 발표에 국민들은 전율했고,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한 대대적인 모금운동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의 보도는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허위 과장보도였음이 드러났다. 모든 언론사가 일제히 국민의 불안감을 조장하는 보도를 한 것은 문공부가 사전에 각 언론사 사장단을 소집해서 작성한 홍보계획에 따른 것이었음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취재진에 의하여 밝혀졌다. MBC가 신속히 보도특집을 방송할 수 있었던 것은 문공부의 지침에 따라 사전에 제작했기 때문이었다.

도시산업선교회
(방송 : 8월 3일 / PD 홍상운)

82년 방송된 MBC의 보도특집 프로그램과 각 신문의 마녀사냥식 보도를 반성하고, 당시 도시산업선교회를 좌경의 온상으로 몰아 노동운동을 탄압하려 한 전두환 정권의 음모와 이에 협조한 언론의 추악한 실상을 파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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