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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염소와 싸웠습니다.
풀을 뜯고 있는 염소를 먼저 건드린 것은 나였지요.

장난 삼아 쭈그려 앉아 염소의 키에 나의 키를 맞춘 뒤 머리에
손가락 뿔을 달고 염소에게 싸움을 겁니다.
어라, 도망갈 줄 알았는데 녀석도 뿔을 들이밀고 덤벼듭니다.
나는 움찔 놀라 얼른 일어섭니다.
녀석도 나만큼이나 장난을 좋아하는 걸까.
혹시 나를 진짜 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 햇볕 좋고 보리알 차지게 영그는 봄날
나는 장난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일어서서 발길로 위협하는 시늉을 하고 뒤로 물러서려는데
아차, 녀석은 그대로 돌진해 와 내 정강이를 들이받아버립니다.
아이쿠, 나는 털썩, 풀밭에 엉덩방아를 찢고 맙니다.
상처가 날 정도는 아니지만 정강이가 한동안 욱씬욱씬합니다.

이 녀석 봐라 겁도 없이.
그래 좋다 한판 붙자.
나는 뒤로 물러서 녀석의 뿔을 잡을 기회를 노립니다.
녀석이 경계를 늦추지 않는지라 쉽게 잡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물러서지 않고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기어코 녀석의 두 뿔을 잡습니다.
양손으로 녀석의 뿔을 잡은 채 나는 녀석의 머리에 내 머리를 가져다 댑니다.
염소는 뿔로 나를 공격하고, 나는 머리로 녀석의 뿔을 막고.
그렇게 염소와 나는 수십 분간 머리를 맞대고 힘겨루기를 합니다.

봄날 오후, 염소는 풀 뜯다 말고 나는 밭이랑 고르다 말고,
풀밭에서 한판 씨름을 합니다.
염소나 나나 절대 져줄 생각이 없습니다.
점점(點點).

꿩꿩,
흰염소와 머리 검은 짐승 씩씩거리는 소리에 놀랐는지, 밭 가운데 심어둔
콩을 찾던 장끼 한 마리, 푸드득 날아오릅니다.
시간이 가도 쉬 결판이 나지 않는군요.
얼굴과 등줄기로 땀이 흐르고, 염소 녀석도 힘겨워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나는 슬그머니 염소의 뿔을 놓습니다.
녀석도 한번 뿔을 들이미는 시늉을 하더니 이내 뒤로 물러섭니다.
서로 한번씩 노려보고.
그래, 오늘은 무승부다.
참 좋은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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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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