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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억울한 죽음의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가 의문속에 쓰러져간 사람들. 우리 모두가 이제는 미래에 화답할 때가 된 것이다. 완전한 역사의 진실 규명없이 용서란 결코 없다. 민주화 제단 앞에 쓰러져간 수많은 민주화의 열사들이 아직도 구천을 돌며 통곡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자유와 인권보호를 위해 이제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정부는 민주화를 위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대통령 소속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지난해 10월 17일 출범시키고 지난 1월까지 조사신청 접수를 마치고 본격적인 조사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사건이 오래된 시간의 한계와 결정적인 제보의 어려움으로 진실규명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번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의문사로 규정된 한 사람인 박인순 씨의 진실 또한 현재 역사의 진실 앞에 놓여 있다. 1988년 6월 23일, 정부에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며 민주화 운동의 역사 한 가운데 섰던 한 젊은 청년이 자신이 다니고 있던 한국 신학대학원 기숙사에서 상체가 시커멓게 타들어간 상태의 싸늘한 변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국립 과학 수사연구소는 부검 결과 ‘자연사’라고 판명하고 사건을 종결지었다.

박인순(남) 씨. 당시 그의 나이 32세. 전남 고향이 담양으로 전남대학교 시절부터 기독교 청년연합회(NCC)에서 고등부 교사활동을 통해 메아리라는 민중가요집을 제작하는 등 어두운 독재정권하에서 민주화를 외쳤던 젊은 건강한 청년이었다. 그런 그가 싸늘한 주검으로 가족들 곁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가족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결과를 오늘까지 믿고 있지 않고 있다. 박인순 씨의 형으로 현재 여수공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박능출 씨는 동생이 당시 발견됐을 때 시신을 맡은 장의사가 한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장의사는 독극물에 의한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시신의 상체가 시커멓게 타들어간 시신을 자주 접해서 알고 있어 이것은 분명 독극물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특히 당시 박인순 씨는 198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부모와 가족들에게 ‘김대중 후보가 당선이 되지 않으면 나는 죽게 되어 있다’라는 말을 자주 하였는데 그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박능출 씨는 “당시의 정황으로 보나 사회적인 여건으로 볼 때 동생의 죽음은 자연사라고 볼 수 없다”며 “동생이 싸늘한 시신으로 가족들에게 돌아온 것은 의문점이 많다. 동생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박능출 씨는 현재 동생의 죽음을 의문사로 보고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을 다 하고 있다. 정부의 진상규명위원회에 진정을 올리고 다른 의문사 가족들과 함께 의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한 몸부림을 치고 있다. 고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같은 결과에 화병으로 몇 해 전 아들 곁으로 떠났다.

박인순 씨의 사건은 1987년으로 되돌아간다. 1987년 건국대학교 영자신문 6월 20일자에 4.13 호언 조치에 대한 반박문인 “정부의 헌법 개정 태도 변화에 대한 반대”라는 표제로 ‘국민들은 민주적 헌법 개정을 원한다’라는 글을 기고한 후부터 경찰의 추적을 집중적으로 받아온 박인순 씨.

특히 그는 기고문에서 대통령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선출의 비판과 1980년 광주 민중항쟁때 군을 동원하고 10일 동안 174명이 살해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비판의 글을 기고한 후 더욱 집중적으로 공안 경찰의 추적을 받아왔다.

어쩌면 박씨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조여오는 공안 경찰의 검은 그림자를 느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김대중 후보가 당선이 되지 않으면 나는 죽게 되어 있다’라는 말을 자주한 것이다.

박씨가 건국대학교에 기고해 경찰로부터 추적을 받고 있었던 다음해.즉 그가 죽음에 막다른 골목길에 접해들었던 1988년 5월, 그의 활동은 더욱 더 현실에 대한 치열한 싸움이 시작됐고 이에 따라 공안경찰의 추적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는 한국신학대학원의 대표로 참가하면서 ‘6. 10 남북학생회담’에 관한 비상 총회를 주도하면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중 5월 9일과 10일에 임원단 모임을 통해 ‘청년 학생 통일운동에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를 논의했고 15일 공식적인 참여를 선언하고 22일 행사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23일 그가 주검으로 변하기 전의 상황을 형 박능출 씨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동생이 경찰의 추적을 심하게 받고 있을 때에도 정부에 대한 비판은 계속되고 있었다. 18일부터 20일까지 예비군 훈련 통지가 나오자, 훈련을 마치고 오후 1시경 시골집으로 내려오겠다는 전화를 했다.

그러나 22일까지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자 어머니가 학교 기숙사로 3차례 전화를 했으나 동생 박인순 씨가 없다고 했다. 다음날인 23일 오전 9시에 또 기숙사로 전화를 해 들어오면 전화를 해달라고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남겼는데 오전 10시경 기숙사 학생으로부터 아들이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전화 연락이 온 것이다.

이렇게 고인은 세상과 마지막을 고했다. 그것도 아직까지 사인의 규명없이 10여 년이 지나고 있다. 고인은 대학시절부터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전남대학교 2학년 재학시절 기독교 청년회에서 1984년 광주 계림교회 중고등부 교사활동을 하던 중 메아리라는 민중 가요집을 제작해 시국을 논했다.

1986년 같은 교회 대학부 회장을 역임하면서 서울 제일교회 박형규 목사가 주도한 한국 기독교장로회 차원의 규탄대회에 참석해 정치폭력배에 무수한 구타를 경험하면서 민주화의 염원을 가슴에 묻고 살아왔다.

이제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민주화를 위해 차디찬 교도소의 마루바닥에서, 아무도 없는 산골짜기에서,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강가에서, 기찻길에서, 기숙사에서 소리없이 쓰러져간 민주화의 영혼을 위해 이제는 밝혀져야 한다. 역사의 진실은...


박인순 씨는 전남대학교 출신으로 한국 신학대학원 시절 1988년 경찰의 집중적인 추적을 받아오다 6월 23일 이 학교 대학원 자신의 기숙사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시신의 상체는 시커멓게 타 들어간 상태였지만 수사기관에서는 자연사로 판명하고 사건이 종결됐다.

그러나 가족들은 자연사가 아닌 타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현재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제보 및 양심선언을 기다리고 있다. 결정적 제보자에게는 최고 5천만원의 보상금이 지급된다.

박인순 씨가 건국대 영자신문에 기고한 내용

덧붙이는 글 | (02)-3703-5000, 박능출(고인의 형님) 전남 여수공업고등학교 교사.(061)652-0261, 011-66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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