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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요. 나는 벌써 2년째 백혈병으로 아파서 아무 것도 못 하고 있어요. 공부도 못하고 친구들과 뛰어놀지도 못하구요. 아빠는 항상 제게 말하지요. 세상을 10으로 볼 때 공부는 그중 하나밖에 안 된다구요. 그럼 나머지 아홉은 뭐지요?…"

차가운 병실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하는 아이. 치료비를 마련 못해 안절부절하는 아빠가 행여나 들을새라 자그마한 목소리로 세상을 원망하는 아이. 다움이다. 바로 소설 <가시고기>의 열 살배기 주인공 정다움이다.

다움이는 기도 끝에 다시 아빠를 생각한다. 안 그래도 슬픈 아빠를 더 슬프게 한 나는 나쁜 아들이라고. 빡빡 깎은 머리를 치켜들더니 이제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산 속에 쪼로롱 방울꽃이 혼자 폈어요…."

지금 서울 산울림소극장에 가면 100만명의 가슴을 적셨다는 소설 <가시고시>가 무대를 적시고 있다. 소설의 감동을 이어가고 있는 주인공은 오는 5월말까지 무대에서 '다움이'로 살아야 하는 이동근(13·서울 창서초 6) 군.

동근이는 <가시고기> 주인공을 맡기 전에 연기 쪽으로는 아무런 인연도 찾을 수 없던 아이였다. 이 정도 배역을 맡을 정도라면 으레 한번쯤은 그 흔한 연기학원이라도 들락거렸겠거니 하는 상상마저도 여지없이 깨뜨린다.

연극 <가시고기>를 연출한 임영웅 씨를 비롯한 제작진들은 그래서 동근이를 선택했다고 한다. "몹시 아픈 병에 걸린 아이를 연기하려면 무엇보다 순수한 느낌을 주어야 합니다. 기술보다는 느낌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자면 다움이 역을 맡을 주인공이 누가 되느냐가 관건이라 공개오디션까지 벌였습니다."

이 연극의 각색과 조연출을 맡은 김태주 씨의 설명이다. 그래서 '후보 7번'의 생초보 연기자 동근이는 지난 2월, '정형화된 이미지가 없고 순수하다'는 이유로 다움이가 되었다. 그것도 심사위원들의 만장일치로.

김태주 씨는 극단 <산울림>에게도 이 연극은 창립 16주년 기념작이라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동근이를 캐스팅한다는 것이 여러모로 부담되는 면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동근이는 지난 3월 20일에 '완전한' 다움이가 되기 위해 머리를 삭발하는 의지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동근이는 처음 무대에 오를 때만 해도 대사를 잊어버릴 정도로 어설펐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의 대사까지 완벽하게 외울 정도가 됐다. 적응하는 데 한 달이라는 시간밖에 걸리지 않은 셈이다. 보통의 아역 연기자들이 다른 연기자들과 호흡을 맞추려면 적어도 두 달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는데. 더군다나 동근이는 매일 연습하면서 울기까지 한단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고 연기해요. 연습할 때는 소리도 지르고 그래서 목도 아플 때가 많은데 무대에 올라가면 하나도 안 아파요."
출연진 가운데 가장 대사가 많지만 연습실에서 지켜본 동근이는 가장 여유로워 보였다. 그런 동근이에게 "얘, 너 무대체질인가 봐" 하고 추켜세워 주었다.

엄마 신미혜(38) 씨는 '우연'이라고 말했다. 직장(서울 한일병원 수간호사)을 마치고 들른 친정집에서 신문을 보는데 다움이 역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응모 마지막 날 접수했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바로 오디션을 보는데 다른 아이들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오는데 일곱 번째로 들어간 동근이는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더란다. 어떻게 된 건가 궁금해하고 있는데 오디션 본 지 1시간 30분만에 동근이가 다움이 역으로 결정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여러 방면을 접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것저것 많이 권유하는 편이에요. 다행히 그 당시는 봄방학 기간이라 아이도 시간이 있어서 좋은 기회였던 것 같아요."

그러나 혹시 부모의 욕심 때문에 아이가 원하지 않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이 들었다.
"아휴, 아니에요. 저는 지금이라도 동근이가 원하지 않으면 당장 그만두라고 할 생각이에요. 그러나 워낙 영화나 연극을 좋아하는 아이라 기회가 생겼을 때는 부모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여느 아역스타처럼 따라다니면서 챙겨주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에요."

아이들이 스스로 볼 수 없는 '보이지 않는' 꿈을 미리 발견해 주는 것도 부모의 역할이라고 말하는 엄마 신미혜 씨. 동근이는 몇 달 동안을 노고산동 할아버지 집에서 홍대 근처 극단까지 다니며 좋아하는 태권도도 잠시 접어두고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지만 이제 연극 연습이 시작될 시간이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아도 흰 양말 몇 켤레씩 가방에 챙겨넣고 나설 정도가 되었다.

동근이는 워낙 영화를 좋아해 학교나 동네에서 영화박사로 불린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용가리>를 보고 영화에 재미를 느낀 후부터는 일주일에 서너 편의 영화를 볼 정도로 영화광이 되었다. "연극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비디오 몇 개씩 빌려서 봐요. 우리나라 영화는 <하면 된다>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외국 영화로는 <쥬만지>하고 <토이스토리>도 재미있구요."

초등학생이 '영화박사'라는 별명을 달게 됐을 때 '쟤가 도대체 얼마나 영화를 잘 알기에 그런 별명까지 갖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이 달라졌다. 무언가 혼자 집중해서 좋아하는 분야를 찾고 또 그것을 위해 시간을 투자할 줄도 알고 또 그렇게 해서 갖게 된 것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줄 줄도 아는 것. 이쯤이면 웬만한 어른도 하기 힘든 일 아닌가.

동근이네 집에는 '나 영화 좋아해' 라는 걸 표시 내는 흔한 포스터 한 장도 없었다. 그냥 그 동안 서랍 속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몇 십장의 영화 포스터를 지난 겨울방학 과제물로 냈단다. 시간이 나면 친구들과 한 달에 한번은 극장에 가서 영화도 보고 혼자 본 영화는 친구들에게 내용도 말해주곤 한단다. 어른 대상의 프로그램이 보고 싶을 때는 부모님을 졸라 함께 가기도 하면서 동근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동근이와 하루종일 같이 다니면서 얘기해보니 그 나이 또래들과는 다른 면이 많았다. 물론 요즘 아이라면 까불거리고 그래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이런저런 선입견 다 버리더라도 동근이는 매사 진지하고 속이 깊었다.

"태권도 못하는 거요?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걸 연극 때문에 못해서 속 상하다고만 생각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요. 혹시 태권도 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다른 누나와 형들에게 미안하잖아요.", "어릴 때부터 가꿔온 꿈은 소방관이구요, 경찰관도 되고 싶어요." '가꿔온 꿈'. 한마디 한마디가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엄마인 신미혜 씨가 보기에는 연극을 하면서 말도 많이 없어지고 차분해졌단다. 그리고 문장 실력이 많이 좋아졌단다. 어느 날 문득, 동근이 컴퓨터를 열어 보았더니 4학년 때 담임선생님과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는 내용이 있었는데 문장 실력이 아주 좋아져서 엄마도 놀랐다고 말했다. "대사 외우고 지적받고 그러면서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요."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아 저절로 몸에 밴 어른스러움도 있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천자문을 세 번 떼고 무슨 일이든지 혼자 알아서 하는 것도 배우고….

"지금도 연극하고 돌아오면 숙제 다하고 동생 보살펴주고 그래요. 워낙 연극하는 게 힘드는 일이라 매일 오전 8시에 하는 봉사활동쯤은 빼주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넌지시 물어봤더니 그럼 다른 친구들이 힘들다면서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더라구요."

엄마 신미혜 씨와 아빠 이문용(42) 씨는 이런 동근이에게 서운할 때가 많다. 때로는 어리광도 부리면서 투정도 좀 하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혼자서 다 알아서 하니 이 아이에게 부모의 손길을 어디서 느낄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든단다. 그만큼 더 미안하단다.

이제 동근이는 다음달이면 다움이로 살아왔던 지난 몇 달을 정리하게 된다. 아직 발음이 빠르고 분명하지 않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선생님이 잘한다고 하는 한마디에 힘을 얻곤 한다.

'자기가 낳은 새끼 알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물고기들과 싸우는 고기. 나중에 그렇게 싸워서 지킨 새끼들은 다 떠나고 혼자 쓸쓸히 죽는 아빠 고기.' 가시고기를 설명하는 동근이는 관객들에게 "사랑은 말이죠, 자기 걸 다 주고도 아깝지 않은 거래요. 꼭 우리 아빠 같죠?" 하고 말한다.

아마 동근이는 이 연극이 끝날 때쯤이면 처음 연극을 시작하며 관객들에게 던졌던 "인생의 나머지 아홉은 뭐죠?"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리게 될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근이가 그저 연극 속의 주인공일 때만 세상의 빛을 느끼는 게 아니라 아무도 주목하고 있지 않을 때도 그 빛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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