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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 얘들아 꼭 와줘. 뷔페거든. 식 끝나면 맛있는 음식도 먹고 사진도 찍자."
"그래그래. 축하한다."
"축하해..."

대학 친구인 H가 결혼을 했습니다. 봄볕 화창한 4월의 어느 날, 남은 친구들에게 잔인한 봄을 선물하면서 말이죠.

제가 만나는 친구들 중에는 결혼한 친구, 임신한 친구, 이미 엄마가 된 친구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입니다. 아직은 저와 뜻을 함께 하며 결혼을 하지 않은 동지들이 많지만, 이제 그 동지들의 숫자는 분명 줄어들 것입니다.

친구들을 만나면 보통 '커리어'와 '사회생활', '취미생활' 등의 이야기꽃을 피우지요. 제 친구들 모두가 '일'에 미쳐있는 듯 보이고, 모두 결혼생각은 별로 없는 듯, 한 배를 탄 동지로 보였거든요.

그런데... H가 결혼하던 날, 제가 생각해 왔던 것은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습니다. 짜슥들... 그래도 속내로는 멋진 남자친구를 사귀어서 결혼을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날, H를 쳐다보던 친구들의 부러운 눈길은 저 또한 외면하기 힘든 눈길이었지요.

뷔페 음식을 몇 번씩 날라 먹으며, 결혼해 만삭인 친구의 배처럼 배불러 나온 똥배를 어루만지며 친구들 얼굴을 하나둘 쳐다보았습니다. 슬쩍 보기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아나키스트'마냥 비장한 표정을 짓고들 있지만 새우를 뜯는, 해파리를 뭉쳐 먹는, 또는 생선초밥의 와사비가 매워 헉헉거리는 친구들의 얼굴에는 두려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그 그림자의 주인공은 시집가길 애태우는, '선'이라도 한 번 봐주길 원하는 부모님들의 걱정이었습니다.

이제 만나면 "안녕, 잘 지냈니?"라는 인사대신 "넌 언제 가니?"가 우리들끼리의 새로운 은어(隱語)가 된 셈이죠.

다들 튀긴 닭을 신경질적으로 물어뜯으며 결국은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니, 언제 가노? 시집?"
"니가 가라... 시집..."

결혼에 관한 생각도 다들 각양각색이더군요. 시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은 하기 싫다. 경제력이 없으면 안 된다, 같은 직종의 사람들과 결혼하기 싫다 등등...

지방에서 근무하는 남자친구를 둔 친구 S는 결혼을 하면 지방에서 살아야 하니 그것도 싫고, 서울에서 혼자 살자니 어색한 시부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그것도 싫어 차일피일 결혼을 미루고 있답니다.

K는 결혼을 위해 다이어트에 들어갔고, J는 퇴근시간이 너무 늦어 데이트할 시간이 없고.

친구 E는 부모님이 하도 '선'을 보라고 해 요즘 주말마다 어색한 만남을 갖느라 피곤하답니다. E가 마음에 드는 남자는 E를 마음에 두지 않고, E가 좋아하지 않는 남자는 E를 좋아하고...

그러던 어느 날 E에게 KS의 남자가 '선'을 보는 상대로 들어왔답니다. 다 아시죠? KS란 경기고등학교를 졸업, 서울대 출신을 말하는 약어랍니다. 거기에 고시패스를 해서 현재 '검사'를 하고 있다니, E의 어머니가 닦달을 하셨나 봅니다. 남자 쪽에서는 열쇠 3개를 해오라는 명령(?)을 했고, 없는 살림에도 불구 E의 어머니는 빚을 내서든 좋은 신랑감과 딸을 엮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한 번만 만나봐..."

E는 현실적인 조건을 보자니, 또 부모님께 효도를 하자니 KS의 남자가 끌렸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 궁합이 상극이라서 '선'은 없었던 일이 되었답니다. 다행인 건가요?

쯧쯧... 그래도 여전히 E는 열심히 선을 보러 다닙니다. 물론 E가 모든 조건을 채우는 완벽한 여자는 아니지만, 부모님의 마음에 드는 상대와 결혼하는 것도 일종의 효도라고 생각하고 있는 E에게 '선'을 보는 것은 일종의 예비효도인 셈이거든요. 그러니 조건 좋은 남자와 계속해서 '선'을 볼 수밖에요.

친구 E에겐 좋은 사람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제가 보기엔 E의 눈높이도 장난이 아니게 높습니다. 휴, 어쩌겠어요? 현실의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중매'를 선택해 결혼을 하지 않나요? 어떻게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은 너무도 다양한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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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를 부러운 듯 쳐다보는 친구들의 시선, 그런데 장례식에 온 것도 아닌데 옷들이 왜 다 검지? 음... 비장하도다!
ⓒ 배을선


대부분의 친구들은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눈치입니다. 그래서인지 H의 경우는 우리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H는 학벌차이를 극복하고 불타는(?) 사랑으로 결혼을 한 케이스거든요. 대부분의 학벌차이라면 사람들은 '남자=대졸, 여자=고졸'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친구의 경우는 반대입니다. '여자=대졸, 남자=고졸'인 셈이죠.

사실 별것도 아닌 거지만, 우리나라 사회에선 정말 별거(?)거든요. H의 부모님도 반대가 무지무지 심했습니다. 그래도 그걸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림을 차린 H.

아마도 H의 결혼식날 우리가 H를 다른 어떤 신부(新婦)보다 부러워했던 이유는 진정한 '사랑'이 가져다 준 힘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H의 결혼식날 H가 다른 어떤 신부보다 더 아름다웠던 이유는 진정한 '사랑'이 가져다 준 행복 때문이었을 겁니다.

든든한 H 신랑의 모습에 친구 H가 전혀 아까워보이지 않았고 부럽기만해, 우리 친구들은 그저 먹기만 했습니다. 왜 아시죠? 여자들은 스트레스 쌓이면 엄청 먹잖아요.

H의 사랑같은, H의 결혼같은 멋진 미래를 친구들 모두 바라는 눈치입니다. 아, 내게 능력이 있다면 모두들 연결을 해주고만 싶은데... (그런데 문득... 아이다. 내가 지들 시다바리가... 지들이 내를 챙겨줘야지!)

후식을 먹으면서 친구들과 결혼한 친구들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결혼한 친구들 숫자를 세는 게 더 쉽겠지만, 좀더 지나면 결혼 안 한 노처녀 숫자를 세는 게 더 쉬워지겠죠?

집으로 돌아오면서 "H,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해, E, 좋은 남자 만나야해, K, 살 예쁘게 빼라, J, 시간내서 데이트 꼭 하구..." 등의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엇! 핸드폰이 울립니다.

"어, 나 G야.. 나 5월에 결혼해."
후, 전 힘없이 대답했습니다. "마이 컸네, G..." 그러나 곧 소릴 질렀죠. "배신이야, 배신!"

아, 또 한 친구가 결혼을 한답니다. 잔인한 봄, 등에서는 식은땀만 줄줄 흘러내립니다. 이상기후라는 날씨 때문일까요?

덧붙이는 글 | # 중간중간의 사투리 등은 영화<친구>, <넘버 3>에서 따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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