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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적에 도랑(개울)을 사이에 두고 저희 집 맞은편에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사셨습니다. 수십 년을 이웃으로 살았지만 그분의 이름도 성도 모릅니다. 다만 어렸을 적부터 우리 식구는 그 할머니를 도랑건너에 사신다고 해서 "도랑건네할매"라고 불렀습니다.

아마도 우리 집 식구들만의 호칭이었을 겁니다.
가까운 이웃이라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면 예외 없이 그 할머니에게 떡이나 과일 등을 그 할머니에게 대접하는 것이 저희 집의 관례가 되어 있었죠. 여태껏 그 할머니를 잊지 못하는 것은 사실은 그런 이웃의 정 때문은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50가구가 훨씬 넘는 저희 동네에 텔레비전이 있는 유일한 집은 아랫동네 땅이 제일 많은 김부자댁도 아니고 땅이 많기로는 동네에서 두세 번째 이었지만 늘 새로운 기계에 관심이 많아서 지금껏 살아 계셨다면 트랙터나 이양기 같은 기계를 동네에서 제일 먼저 구입하셨음에 틀림없을 저희 아버지를 가장으로 모셨던 저희 집도 아니었습니다.

그 집이 바로 "도랑건네할매" 댁이었죠. 아마도 서울에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들이 홀로 시골에 사시는 어머니를 위해 마련해준 것일 겁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저를 포함한 동네 아이들은 그 할머니 집으로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 모여든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도 대문도 없는 집에 살면서 저녁을 먹으면 당연히 자야하는 지론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를 두었던 이유로 몰래 담을 타넘어 집을 나서게 되는 거죠.

집을 나서서 탈출(?)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을 즐길 틈도 없이 또 하나의 관문이 저희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지만 할머니가 텔레비전을 켜시지 않고 일찍 주무시는 경우가 있는데 그땐 꼼짝없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숨을 죽인 채 그 할머니댁에 불이 켜져 있으면 쾌재를 부르고 그 할머니 댁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 할머니 댁의 불이 켜진 날 저녁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할머니 냄새가 나는 그 방에서 저희 아이들 그리고 할머니들이 모여 인형극 박제상, 왕건을 재미있게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저희들은 그 할머니에게 큰 빚을 진 셈인데 그만 그 은혜를 화로 되돌려주고 말았습니다. 너무 많아서 신물이 날 정도인 돌담이 아닌 돌로 톡톡 때리다 보면 구멍이 뻥 뚫리는 벽돌담인 할머니의 담이 신기해서 장난을 치다 지겨우면 조그마한 돌로 누가 구멍을 빨리 내나? 하는 시합을 벌였으니까요?

더구나 할머니가 쓰시는 안방을 제외하고는 모두 저희들의 전쟁놀이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기하게도 담벼락에 구멍이 숭숭 뚫려도 집이 아이들의 전쟁놀이터가 되어도 창고의 창문이 돌팔매질의 표적이 되어도 그 일로 인해서 할머니의 꾸지람을 단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네요.
요즘 같으면 꾸중 차원이 아니라 고발의 대상이 되고도 남았을 일인데 말입니다.

그때 돌팔매질을 하던 그 소년은 벌써 삼십대중반의 딸아이의 아버지가 되어버렸지만 어린 시절 못된 장난질의 흔적은 놀랍게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시골에 갈 때마다 맞은 편의 도랑건너에 할머니 댁을 바라봅니다.

그 할머니는 벌써 오래 전에 서울에 사는 아들집으로 가셨고 그 집은 더 이상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 할머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더욱 은혜를 화로 갚은 어린 시절의 못된 장난질이 후회가 됩니다. 그리고 그 장난의 흔적은 마치 철없는 장난질에 대한 꾸짖음을 하는 것처럼 그대로 남아 저를 바라봅니다. 그때 할머니가 저희들에게 막대기를 들고 저희들을 때려주셨다면, 저희들 부모님께 그 사실을 고해 저희들을 혼나게 하셨다면 조금이라도 미안함이 덜할텐데 아쉽게도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멈춰진 것처럼 삼십 년이 다 되어 가는 장난질의 흔적을 바라보면서 이제서야 그 할머니에게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왜 이제서야 이런 용서를 구하게 된 것일까요?
"할머니 그땐 정말 죄송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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