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96년 연세대사건 이후 학생운동, 특히 한총련에 대한 김영삼 정부의 탄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루어졌었다. 한총련의 이름을 걸고 하는 집회는 모두가 불허되었고 집회를 강행했을 때는 어김없이 공권력의 무차별적인 진압이 잇따랐다. 한총련의 지도부에게는 특진과 수백만원의 현상금이 내걸렸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검거를 피해 물 밑으로 수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93년 광주대를 졸업하고 계속 학생운동에 남아있던 고 김준배(당시 28세) 씨는 97년 한총련의 투쟁전술을 담당하던 투쟁국장이었다.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97년 경찰의 폭력에 의해 사망한 류재을 씨에 대한 열사투쟁과 5기 한총련 출범식, 그리고 '김영삼 정권에 대한 조기타도' 운동을 벌였던 한총련이기에 그 투쟁국장은 공안당국의 검거대상 1호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미 김준배 씨는 92년 광주대학교 투쟁국장을 하면서부터 수배를 받았기 때문에 97년에는 수배 6년째 생활을 하고 있었다.

97년 9월 15일 밤 10시께 전남지방경찰청 형사기동대는 김준배 씨가 광주시 북구 매곡동의 청암아파트에 은신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곧바로 도철호 경장(당시 계급)과 최종국 경위 등 형사기동대 소속 형사 25명이 현장으로 향했고 밤 11시경부터 김준배 씨가 머물고 있던 1308호 주위에 잠복을 시작했다. 50여분간 잠복한 이들은 11시 50분 경 김준배 씨와 함께 있던 일행 중 1명이 나오는 순간 은신처를 급습했고 이후 김준배 씨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경찰의 발표에 의하면 경찰이 김준배 씨의 일행 2명을 제압하는 동안 김준배 씨는 아파트 외벽에 설치된 케이블TV 고정용 철선을 타고 내려가다 4층에서 추락했고 16일 0시 23분 경 전남대학교 부속병원 응급실에 후송되었으나 10여분 후 사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준배 씨가 죽은 지 4시간이 지나서야 가족들에게 소식이 전해졌고 전대병원 주변은 경찰병력이 배치되어 조문객의 자유로운 접근을 막았으며 가족의 동의없이 반강제적으로 부검이 실시되어 이미 죽음의 과정에 의문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문은 한총련을 중심으로 하여 김준배 씨의 죽음을 조사하면서 더욱 더 증폭되게 된다. 첫째, 고층아파트에서 추락하였음에도 시신이 아파트 외벽에 붙어 있을 정도로 가깝게 있었던 점. 둘째, 두부와 안면의 외상이 전무함에도 오른쪽 눈두덩이와 왼쪽 발등에 멍이 있는 점. 셋째, 대장과 소장을 비롯한 장파열이 전무하고 치아가 깨끗한 점. 넷째, 왼쪽 갈비뼈가 밖으로 골절한 점. 상의에 발자국이 있는 점 등이 조사결과 밝혀졌는데 이러한 경위에 따라 추락 전 경찰에 의한 구타 가능성이 충분히 제기되는 것이다.

또한 경찰과 검찰에서 밝힌 추락사에 대한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15일 밤 형사기동대가 배치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김준배 씨가 사망에 이른 시간까지의 활동상황과 추락 전후의 상황, 그리고 병원 후송 도중의 상황에 대한 자료제출 및 당사자와의 면담을 요구했지만 아무런 답변이 없었고, 작년 '김준배열사 추모사업회'에서 검경에 청구한 '정보공개' 요구에도 응하지 않고 있어 수상쩍은 행태를 계속 보여왔다.

이러한 연유로 당시 김준배 씨의 유가족은 사건 직후의 현장을 본 후 "경찰의 과잉 폭력이 있었다"며 의문사를 주장, 진상규명을 호소하고 10월 13일 청와대와 국무총리, 대검찰청,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탄원서를 제출, '사인의 진상규명과 재수사, 지명수배자를 체포한 경찰관에 대한 표창제도의 폐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또한 당시 대선을 앞둔 '국민승리 21' 등에서도 "김씨의 사망은 한총련에 대한 공권력의 무리한 탄압에서 일어난 것"이라며 당국을 강하게 추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고 사망한 지 4주기를 맞는 올해까지 어떠한 책임자 처벌이나 속시원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문민정권 말기 IMF의 대란이 오기 직전 비판세력에 대한 광적인 탄압속에서 이루어진 이 사건은 28살의 꽃다운 나이의 청년이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고자 일신의 안락을 뿌치치며 수배생활을 감내해 왔으나 끝내 의문의 죽음으로 내몰리게 되는 비극을 만들고 남은 가족은 씻지 못한 한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게 만들었다.

김준배 씨는 의문의 사망 이후 망월동에 묻혔고 한총련과 김준배 씨의 출신지역 대학들에서는 해마다 추모제를 열어 고인의 뜻을 기리고 죽음에 대한 의문들을 풀어나가기 위한 다짐들을 하고 있다.

<김준배의 일기>

93년 1월 6일

구국운동에 복무하는 주체로써 자기를 반성하고 혁신하며 자기를 끊임없이 단련하고 변혁운동에 더욱 더 충실할 수 있는 나로 단련시켜야 한다. 이제 십만학도의 중앙 간부로서의 위상, 역할을 가져야 할 것같다. 갈수록 주체의 결의가 확보되고 기계적 실무적 사업을 할지라도... 감각이 생기지 않는다. 반성하고 신념화된 결의를 확보해야 할 것같다.
복잡하고 어렵더라도 조국사랑의 신심과 십만학도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다시금 뛰자!
군대문제가 터질려고 한다.
대선패배의 후유증이 아버지에게 극심하다.
어떻게 아버지에게 자식에 대한 나의 굳건한 결의를 보여줄 것인가? 인간이 하고자 하면 못 할 일이 없다. 사회를 변화 발전시키는 것도 바로 사람이므로...

아버지 어머니 존경합니다.


1월 7일

비가 내렸다.
마음깊은 곳에 샘솟는 조국 사랑의 열정과 혁명의 심도함에 다시 한 번 젖어 든다.
누가 그런 말을 한 것같다.
변혁을 하고자 하는 동지의 몸은 이내 개인의 몸이 아니다. 조직과 4천만 민중의 몸이라는 말이 언뜻 생각난다.
건강한 신체에 순수한 사상으로 다시금 열심히 살아가리라.


3월 24일

한 번 살기 위해 타협과 우회의 길을 가기보단
영원히 살기 위해 우리는 원칙과 정도의 길을 가겠소.


96년 1월 12일

오늘의 일중에 나서는 과업은 학습과 투쟁, 단위지도사업.
오늘은 또 한명의 동지가 X들의 손에 걸려들었다.
계속해서 검거선풍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럴 때 일수록 주위에 있는 동지들을 혈연적으로 묶어세우고
동지적 결속을 굳건이 하여야 한다.
우리는 지금 시기 조용하게 물음을 자신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한다. 또한 관성과 타성이라는 크나큰 괴물을 오직 튼튼한 자기
철저함과 경계심 속에서의 자기 자신을 날마다 혁신할려고 하는
기풍이어야 한다.


2월 13일

오늘을 사는 나에게 있어서 과거를 현재삶에서 재조명하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신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 하루. 조직이 나에게 부여한 과제를 잘 수행하였는가?
또한 오늘 하루.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밝혀나가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 고 김준배 씨는 의문의 죽음 이후 그가 생전에 보였던 헌신적이고 모범적인 생활을 남은 이들이 배우고자 '한총련 전사'로 부르며 추모하고 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