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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때로는 작은 씻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씻김은 막연한 감상이나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강한 신념과 노력을 통해 나왔다. 한국으로 치면 평양 정도의 위도에 있는 톈진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제주도 보다도 한참이나 아래인 상하이로 기수를 향한다. 가끔씩 해안선이 비치는 중국 동부의 모습은 갈색빛에 가깝다. 녹색빛의 한국 땅에 비해 휠씬 황량하다.

상하이로 들어가는 대표적인 관문은 홍챠오(虹橋)공항이다. 하지만 얼마 전 새롭고, 큰 관문이 하나 더 생겼다. 상하이시가 거대한 관심 속에 새롭게 건설한 푸동(浦東)공항이 바로 그곳.

지금부터 약 80여년 전인 1919년 3월 29일, 3·1만세운동으로 쫓기는 몸이 된 백범 김구 선생은 동료들과 같이 상하이행을 결심하고 여정을 떠났다. 15명의 일행은 많은 고비를 넘기고 신의주에서 배를 탄 보름여만에 상하이 푸동선창에 닿았다. 내가 너무나 편안하게 비행기로 갔던 여정을 어렵사리 배로 움직이는 이들은 공승서리 15호에서 하룻밤을 숙박하고, 이미 일제의 먹구름 속에 빠진 조국의 명운을 지키기 위한 기나긴 투쟁을 시작했다.

초대 임시정부가 있어서 우리 역사와는 더욱 인연이 깊은 상하이 여행에 김구선생의 '백범일지'를 동행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 당연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지루함을 줄 수 있을지 모르나, 다시 백범일지의 책장 속에 들어가보면 결코 그 감동이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민족의 지침서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자신의 결점 숨기지 않는 순수한 고백서

백범의 가장 큰 행보는 푸동선창에 내린 이후부터 시작됐다. 푸동에서 백범의 정취를 찾는다는 것은 난망한 일이 되고 말았다. 푸동은 장쩌민과 주룽지의 주도 아래 동북아 최대의 첨단도시를 꿈꾸며 엄청난 마천루로 변했기 때문이다. 상하이의 지금 정경은 도시의 동쪽을 굽어 지나는 황푸(黃浦)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 황푸강 동쪽에는 상하이가 상하이일 수 있게 한 거대한 물류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 번성의 근거를 상당부분 비행기에 넘겨준 황푸강가에는 곳곳에 공원이 형성되어 시간을 보내려는 젊은 연인들과 노인들의 천국이 되어 있다.

백범이 삼일만세운동을 마치고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일제 10년의 역사를 경험한 후였다. 그의 마음은 어떠 했을까. 희망이 남아있다면 얼마큼 이었을까. 이미 44살의 나이에 접어든 그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지난 인생역정이 생각났을 것이다. 백범일지는 네루의 옥중일기 등이 그러하듯이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솔직히 알려주려는 취지에서 씌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1부의 집필이 들어갔을 때는 백범의 일행이 상하이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1929년이었다.

책의 앞 부분은 너무나 솔직한 자기 고백서이다. 결코 사람은 본시에 태어나는 거라기 보다는 하나하나를 고쳐가고, 깨우쳐 가며 성장한다는 진리를 일깨운다. 백범에게 어린 시절은 콤플렉스의 전형이었을 것이다. 조선조 반역죄인 김자점의 후손이라는 것은 물론이고 당시의 신분 역시 평민이었고, 생김 역시 마마자국이 많았다. 하지만 우연처럼 백범은 배움의 길에 접어든다. 공부하던 한학의 쓸모 없음을 깨달은 백범은 풍수나 관상 등 신비적인 요소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그 가운데 동학이 터지고, 담 크고 배움이 있었던 김창수(백범의 아명)는 1893년부터 동학에 참여해 18세의 나이에 수천을 이끄는 '아기 접주'가 된다. 하지만 동학운동은 일본과 청나라 등 외세에 의해 강제진압된다. 다행히 미래를 내다본 동학인사의 지혜로 인해 백범은 목숨을 부지하는 한편 황해도 최대의 지성이었던 안태훈(안중근 의사의 부친)에게 몸을 의탁한다. 더욱이 젊은 시절 큰 영향을 준 고능선 등을 만나 배움을 얻어 사상과 안목을 넓히기 시작한다.

상하이 역시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도시 중에 하나다. 개방이 시작되던 19세기 후반 상하이는 개방의 선두도시로서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또한 조선에 동학에 비견할 태평천국의 난에서 완전히 격리될 수 없었고, 후에는 공산당 운동의 태동지로서의 역할까지 하게 되는 격변의 땅이다. 하지만 그 격변의 와중에 상하이는 번성을 거듭했고, 지금은 2천만명의 인구로 중국 내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물론 중국을 먹여살리는 상업도시로서의 역할을 하는 곳도 상하이다. 상하이를 인상깊게 하는 것은 초라한 뒷골목의 낙후함과 더불어 도시 곳곳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건축물들이다. 마치 외계의 도시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도시다.

21살이던 1896년에는 치하포에서 전해에 죽은 명성황후를 죽인 복수를 한다는 뜻에서 몸에 칼을 숨긴 쓰치다 중위를 때려죽인다. 백범은 사고후에도 "이번에 내가 왜놈을 때려 죽인 것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니라 국가적인 수치를 씻기 위해 행한 일이니 정정당당하게 대처하겠다"는 논지를 펴며, 인천감옥에 수감된다. 이 사건은 백범이라는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이자, 스스로의 길을 밝히는 사건이 된다.

백범은 자신의 옥바라지를 위해 온 부모님들의 고생을 보고, "부모와 자녀는 천 번을 태어나고 백 겁이 지나도록 은혜와 사랑을 끼치며 사는 인연"이라는 말을 되새긴다. 백범의 모친 역시 이런 자식의 신념을 믿기 시작하고, 고리키의 '어머니'처럼 신념을 향해 가는 어머니가 된다. 백범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다행히 집행일에 고종의 처형중지 명령으로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지리한 감옥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이미 대의와 명분을 지켰다고 생각한 백범은 탈옥을 시도해 성공한다.

그는 여러 인연들을 찾아 전국 유랑을 떠나고, 인연이 이어져 공주 마곡사에서 머리를 깍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스님이 될 인연은 아니었다. 그는 금강산 등으로 유람을 떠나고, 그 길에 고향에 들리는 한편 스승인 고능선과도 만난다.

그 자리에서 백범은 조선왕조의 부흥을 꾀하는 고능선과 논쟁을 벌인다. 비슷한 시기에 청왕조의 부활을 주창하던 캉유웨이와 전복을 주장하던 량치차오를 생각나게 하는 이 논쟁에서 스승과 제자는 큰 차이를 느끼지만 백범의 생각은 스스로를 굳히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백범은 다시 고향에서 교육사업을 위해 노력한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10년 확실히 국권을 빼앗은 일본은 사이토 총독 암살사건을 빌미로 105인 사건을 일으키고, 백범 역시 갇힌다. 불운하게 그는 탈옥했던 인천감옥으로 전감되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해 1915년에 가출옥된다.

3·1운동이 일어났지만 여전히 희망을 찾기 어려웠던 백범의 일행은 조국의 명운을 유지하기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이 시간까지가 백범일기 상권의 기록으로 상하이에서 기록한 것이다.

벼랑 속에서도 희망을 찾았으나

황푸강의 나른 함을 잠시 뒤로 하고, 기자를 태운 택시는 강변을 따라 달리다가, 다시 허름한 골목을 헤친 후 루쉰공원 앞에 나를 내려 놓는다.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며, 사상가인 루쉰을 기념하기 위해 홍구공원에서 이름이 바뀐 이 공원은 우리에게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도 유명한 곳이다.

백범선생은 두 번이나 옥살이를 했다는 이유로 주변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정무국장이 된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지금도 초라한 모습으로 마당로(馬當路)에서 명맥만을 유지하듯 그때는 더욱 어려웠다. 삼일만세운동 이후 이곳에 모여들어 임정을 만들었던 이들은 너무나 궁핍한 생활과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조국의 현실에 하나둘씩 변심해서 이곳을 떠나갔다. 더욱이 세상은 임시정부의 존재마저 알기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급자족하는 것은 물론이고, 곡기가 어려워 굶는 일도 허다했던 이곳에 사라지는 조국의 등불을 지키겠다는 이들은 적지 않게 찾아들었다. 먼저 찾아든 이가 이봉창 열사였다. 일본어에 능숙하고 혁명의지에 불타던 이열사는 어렵게 마련된 폭탄 두 개를 들고 일본으로 떠나면서도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다"라고 말했다.

이열사의 의거는 하나의 폭탄이 터지지 않는 바람에 일본 왕을 죽이지 못했지만, 일본으로 계략으로 일어나 한민족과 중국인의 감정을 극도로 악화시킨 만보산사건의 갈등을 유화시키는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백범일지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백범과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민단장 가와바다를 비롯해 시라카와 대장 등 수명의 중요인물을 폭살시킨 사건이다. 그 시절 한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윤봉길 의사의 마음속의 열정을 알아차린 백범의 혜안과 노력이 동반된 이 의거로 중국내는 물론이고 세계에 대한민국의 독립의지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대륙으로의 침략을 강화시킨 일본으로 인해 곤궁한 시절은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임정 등 대한민국 독립단체 내부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인해 적지 않은 문제가 유출되기도 했다. 결국 임시정부는 항저우, 난징, 창사, 광저우, 류저우(柳州), 구이양을 거쳐 최종적으로 충칭(重慶)에 이르는 여정을 거쳐야 했다.

백범 선생에게 1940년대 들어 찾아오기 시작한 학병 탈출병들의 가세는 큰 희망이었다. 임정은 이들 등을 주축으로 한국광복군을 창립한 이후 미국전략사무국(OSS)의 요청으로 특수훈련에 접어들었다. 특히 한 훈련에 참여한 교관은 7명으로 구성된 광복군조가 벼랑에 있는 진지를 기혜로 점령하는 능력을 보고 "내가 앞서 중국 학생 400명을 모아서 시험하였을 때도 발견하지 못한 해답을 귀국 청년 7명에게서 찾아냈소. 참으로 앞날이 촉망되는 국민이오"라는 말은 능력을 인정받는 동시에 연합군 내부에서 한국의 위상변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홍구공원이나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 선생의 흔적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 그 막막한 흔적을 여행하던 기자에게 전날의 모습이 기억났다. 임정청사에서 멀지 않은 파완런구장에서 있었던 한국과 중국의 축구경기 모습이다. 올림픽 출전을 다투던 중요한 경기였던 이 게임에서 한국 청년들은 8만명을 넘는 중국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에도 불구하고, 무승부를 기록해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었다.

카이로회담 등을 통해 확인된 한국의 독립은 이런 노력들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임정 요원들은 광복 이후 미국의 방해에 부딪혀 11월에야 귀국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한국에 돌아온 백범의 여정 역시 수많은 갈등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분단된 대한민국이 없다며 남북을 드나들던 백범은 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안두희의 총탄에 운명했다. 그리고 그토록 염려하던 조국의 분열을 부른 한국전쟁은 꼭 일년 뒤에 왔다.

백범일지는 원래 상하이와 충칭에서 기록된 두편의 글로 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배웠던 '나의 소원'이 포함되어 읽힌다. 이 글에서 백범은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하거니와, 그들이 합하여서 세운 천당, 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대, 우리 민족을 그 나라로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고 말했다. 또 공생의 길을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이다"고 말했다.

상하이는 우리 민족에게는 한때나마 정부가 곤궁한 처지로 이사왔던 곳이다. 물론 지금은 마천루의 숲이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그 정취를 느끼기 어려워진다. 막 공사를 시작한 상하이역에서 다시 상행 기차를 기다린다. 보통화를 거부하는 이들로 인해 적지 않게 곤란을 겪고 차표를 샀다.

내 작은 일신의 곤란에도 나는 항상 주저하고 힘들어한다. 백범이 목숨을 걸고 만들어내고자 했던 통일된 나라는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자신의 재산에 흠이 나면 통일쯤은 뒷차지가 된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 부끄러움과 더불어 백범 선생 등 투사들이 없어서 우리가 여전히 중국이나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를 생각해 본다.

(사진도움=김준식)

덧붙이는 글 | 책소개
-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쉽게 접근 가능
백범일지는 1928년 백범이 자식들에게 아버지의 인생여정을 알리기 위해 상하이에서 집필한 이후 다음해 5월 탈고한 상권의 원본을 시작으로 다양한 형태와 모습으로 출간됐다. 충칭 임정시절인 1941년에 하권을 집필했다. 
이후에 20여종 이상이 출간됐고, 그 중에는 일반인을 위해 쉽게 간략된 것도 있고, 또 94년에 원본을 영인한 영인본도 있다. 백범일지 자체는 백범의 기억을 기초로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체에 많은 오식도 있고, 후대에 출간되면서 적지 않은 훼손이 있었다. 출간된 것 중에는 첫 출간(상권) 이후 미주 지역 동지들에게 보낸 등사본들을 이은 것들도 있고, 손으로 직접 기록된 필사본도 있다. 
백범일지의 첫 출간은 1947년 12월 15일 국사원에서 최초로 출판됐다. 이후에도 교문사, 서문당 본 등이 있다. 
현대 독자를 대상으로 해서 가장 세심하게 출판된 책은 97년 도진순 교수에 의해 '돌베개'에서 출간된 책이다. 임시정부 전공자인 창원대 도진순 교수가 주도한 이 책은 읽기 쉽게 문장을 다듬은 것은 물론이고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해 주석으로 붙였다. 가벼운 문고판에 의존하기 보다는 이 책을 통해 백범일지의 진수를 맛보는 것은 새로운 느낌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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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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