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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할 무렵 걸리는 문장이 있었다. "황산을 보지 않고, 천하의 아름다움을 논하지 마라"(天下之美, 莫過黃山)는 텔레비전 광고의 한 문장이었다. 매일매일 나를 조여대는 이 문구 때문인지 황산은 일종의 강박관념이었다. 그 강박관념 때문인지 18시간 입석기차라는 불편한 환경을 이겨내고, 나는 황산행을 감행했다.

황산을 거치는 베이징발 푸저우(福州)행 기차는 새벽녘에 작은 여행객과 승객의 무리를 황산역에 부려놓는다. 삭풍이 불어대는 북방의 겨울과 달리 안후이(安徽)의 겨울은 포근하기만 하다. 하지만 징강산역이 그러하듯 황산은 황산역과 그다지 가깝지 않다. 황산역과 비행장 등 교통은 백범선생의 아들 김신이 공부하기도 했던 툰시(屯溪)에 위치해 있다. 황산 승객을 전문적으로 실어나르는 미니버스는 우리를 싣고 어둠이 걷히는 대지를 지치기 시작한다. 목적지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생각에 눈이 스르르 감긴다.

눈을 뜬다. 아직 황산까지는 삼십분 가량이 남았다. 차창 밖을 본다. 작은 감탄사가 나온다. 이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황산의 어깨들에는 유명한 황산 소나무와 특이하게 생긴 바위들이 기이한 경관을 드러내고 있다. 득달 같이 머리에서는 신선들의 세상이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갈수록 그런 생각은 굳어진다.

이 길에 동행할 책을 꼽으라면 무엇을 꼽을까. 이 선계에서 중국 신화를 들이면 어떨까 생각했다. 중국신화의 초반 주인공인 황제(黃帝)의 이름을 빌어 황산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끌어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신화 기록의 최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신화전설'이 어렵지 않게 결정된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만든 자국 신화의 정전

신화를 말하면 우리는 흔히 단군신화나 그리스로마 신화를 생각한다. 또한 단순히 신들의 이야기로 거짓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국지적으로 봤을 때, 중국은 어떨할까. 중국에서 신화란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중국의 신화라는 말이 낯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국근대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의 주장처럼 황허나 창지앙 등의 재앙에 항상 직면하고 있어 환상보다는 실제를 숭상했다거나, 괴력난신(怪力亂神)을 피해 의도적으로 신화를 합리화한 유교의 전통을 생각하면 신화가 약세를 띠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신화에 비교적 관용적이라고 하지만 얼마만큼일까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언제나 위대한 기록자들은 있었다.

현대에서 신화를 위해 태어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중국신화전설'의 작가 위앤커(袁珂)다. 1916년 쓰촨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 공산화 직후인 50년 '중국고대신화'를 출간한 이후 98년 백만여자에 달하는 대저작인 '중국신화대사전'을 출간하기까지 평생을 신화연구를 위해 바쳤다. 그 덕분에 중국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신들은 부분적인 모습으로나마 현존할 수 있게 됐다.

중국을 이해하며 중국신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우리 학교 교과과정에 단군신화가 필수적으로 포함되어 신화 속에서 홍익인간, 재세이화 등 수많은 민족의 근본이념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괘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신화는 귀신의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이러한 상상과 추측도 어떤 일정한 근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결코 황당무계한 공상에서 나온 것은 아니기 때문"(본문 중)이다.

고리키 역시 "신화도 역시 자연현상이다. 그것은 자연에 대한 투쟁이며 또한 광범위한 예술적 개괄 속에서의 사회생활의 반영이다"라는 말로 이런 관점을 부추긴다. 고리키가 신에게 반항하는 신이라고 존중한 신들이야말로 인간의 역사를 만든 토대이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의 경우 예, 곤, 치우(蚩尤) 등이 그런 인물일 것이다. 신화는 신의 이야기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의 인간화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중국신화전설'을 통해 만나는 중국 신화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 성수기 철이 아니어서 버스에는 그다지 많은 이들이 타지 않았다. 현지 사람들과 아래에서 숙박을 잡은 이들을 내려두고 차는 황산대문에 잠시 멈춘다. 혹시하는 생각에 빙판을 걸을 때 쓸 아이젠을 산다. 작은 휴식 후에 차는 다시 거대한 솔숲을 헤치고 위로 오르기 시작한다.

황산의 명물 중에 하나인 황산송(松)이 옆에 도열해 있다. 온천 등이 있어 대규모 위락시설단지가 된 화계(花溪)를 지난 차는 오래지 않아
백장천(百丈泉)폭포 앞을 지난다. 거대한 위용의 폭포가 지나는 이들이 드디어 신선계에 들어섰음을 속삭이는 것 같다. 불과 수미터를 보기 힘든 짙은 안개가 보이다가 금방 신선한 공기가 내뿜고, 일망무제의 구름바다가 펼쳐진다.

산의 초입에서부터 느끼는 지나친 감탄이 부담스러워진다. 구절양장의 길을 지나는 버스는 본격적인 산오르기의 시작이자 케이블카가 운행하는 운곡사(雲谷寺)에 우리를 내려 놓는다. 그다지 녹녹치 않은 입장 요금들이 가난한 객을 힘들게 하지만, 물품이나 건설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멜대를 하고 산정까지 오르는 이들 앞에서 내 푸념은 얼마나 호사인지를 알기에 조용해진다.

서구 신화들과 교차되는 중국신화의 면모

신화에 대한 전반적인 해제인 도론편(道論篇)이 지나면, 본격적인 신화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데 그 첫번째는 어느 신화나 그러하듯 개벽편(開闢篇)이다.

"묻노니, 아득한 옛날, 세상의 시작에 대하여 누가 전해 줄 수 있을까?"라는 초사(楚辭)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중국개벽신화를 읽으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천지창조 신화와 유사한 점에 놀라게 된다. 신화의 원형으로 들어가면 세계 어느 신화에서도 놀랄 만큼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실제로 대면했을 때 더욱 놀란다. 중국의 신화 역시 창조자가 7일 동안 세상을 만들고, 이레째 되던 날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은 물론이고 '노아의 방주'와 거의 흡사한 뇌공의 이야기 등은 성경과 중국신화의 별다른 차이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신들의 세계에 가장 큰 화두는 인간이다. 신들과 달리 수명이 존재하고, 능력에 한계가 있었던 인간들은 자연에서 수많은 재앙에 직면했고, 여와 등 인류를 위한 보호자들이 나타나는 한편 우리 민족 신화의 중요한 인물로 거론되는 치우, 도올 등 악행을 저지르는 이들이 있다. 물론 중국신화의 앞 부분의 주인공은 황제(黃帝)라고 봐야 한다.

그리스신화에 제우스에 해당하는 황제는 라이벌인 염제(炎帝)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등 신들의 초기 역사를 주관한다. 초기 신화의 가장 큰 라이벌인 황제와 염제의 대결은 3편 황염편부터 기술되어 신화의 맛깔스러움을 더해 준다. 태양의 신이자 농업의 신, 의약의 신인 염제는 가장 인간적인 영웅이지만 황제에게 패함으로써 추락하는 신이 되고 만다.

하지만 황제는 이후에 수많은 역사의 주인공들을 만드는 씨를 뿌리고, 스스로도 황산 등 수많은 곳의 지명에 이름을 부여받는다. 또한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세상사의 살아가는 모든 이야기를 신화가 담고 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님을 말해준다. 사랑은 물론이고 배신, 우정 등 이야기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거대한 두 산이 이사가지 않을 수 밖에 없게 한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신화처럼 노력하는 이들에 대한 기록은 삶의 직접적인 교훈을 준다.

구름바다를 뚫고 케이블카는 재빨리 객들을 천해(天海) 부근으로 옮겨 놓는다. 황산의 풍경은 산과 바다의 조합이다. 운해가 많아 황산의 중앙인 천해를 중심으로 사방을 각각 동서남북의 바다로 만들었다.

남해 대신에 전해(前海)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구름이 온 산을 둘러싸면 이 명칭이 조금도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황산의 곳곳은 결코 구름의 바다만은 아니다. 곳곳에 솟아오른 기암괴석과 나무의 조화는 선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천해 부근에는 황산 정상에 있는 숙박시설은 물론이고 대표적인 황산의 풍경들이 많다. 하지만 한참 들어선 겨울을 남방의 산도 피할 수 없어 눈이 쌓이고, 곳곳은 빙판이다. 어렵사리 길을 재촉해 시신봉(始信峰)에 닿는다. 빙판을 어렵사리 올랐는데 정상의 바위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울면서 혼백 씻기를 하고 있다. 아래로 천길 낭떨어지인 이곳에서 횡사한 이에 대한 추모제사다. 얼굴을 알 수 없는 한 인간은 비상하지 못하고 선인들의 세상으로 갔을 것이다.

신화는 시간이 거슬러 가면서 점차 신화가 아닌 반신반인화로 변해간다. 그 정점에 있는 대표적인 이가 예일 것이다. 활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예는 원래 천신이었지만 제준은 그를 땅으로 보내 인간을 괴롭히는 것들을 제거하는 일을 시켰다. 예와 더불어 그의 아내 항아 역시 지상에 내려온다. 과연 예는 사방을 돌며 인간을 괴롭히는 갖가지 것들을 활로 무찌른다. 또한 기이하게 만들어진 열 개의 태양이 하늘에서 인간을 괴롭히자 활로 9개를 떨어뜨린다. 이밖에도 그는 알유 등 수많은 괴력난신을 무찔러 인간을 도탄에서 구한다.

하지만 예는 천제의 아들이었던 9개의 태양을 떨어뜨린 것의 책임으로 인간으로 추락한다. 아내 항아도 더불어 인간이 되었다가 성급히 신이 되겠다는 욕심으로 실수해 달의 신이 되는 등 예를 둔 전설이 많다. 인간을 위한 행위로 활을 쏘았다는 점에서 예는 그리스신화의 헤라클레스에 비견할 것이다.

중국의 신화에는 예와 비견되는 또다른 영웅들이 많다. 하늘의 보물인 식양을 훔쳐다가 인간세상의 홍수를 막으려 했으나, 치수에는 실패한 곤도 그 한 예일 것이다. 곤은 책임 때문에 그의 몸에서 태어난 우(禹)는 하늘에서 식양을 합법적으로 얻는 것은 물론이고, 수신 하백(河伯)의 도움을 받는 등 다양한 도움을 받아 치수에 성공하고 하(夏)왕조의 기틀을 세운다.

짧은 시간에 둘러보는 하늘 바다

시선봉을 내려와 서광정, 일출과 운해 감상의 적지인 청량대, 일몰을 보기 좋다는 사자봉, 단로봉, 배운정 등을 바쁜 걸음으로 돌아볼 수 있다. 때로는 선경으로 때로는 짙은 구름으로 자신을 모습을 감추고 있지만 황산의 아름다움을 차례로 일감할 수 있다. 천해에는 몇곳의 숙박시설이 있어서 여유가 있는 이들은 산정에서 일몰과 일출을 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 책소개
-위앤커 중심으로 체계적인 정비 이뤄져
근대 중국 문학의 아버지인 루쉰은 신화에 대해 상당한 가치를 부여했다. 그는 스스로 '중국소설사략'에서 신화를 죽어 있는 이야기로 만들지 않고 다양한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이 힘이 되었는지 중국 신화사는 위앤커(袁珂 1916년생)라는 비중있는 신화기록자를 만나게 된다. 그는 50년 출간한 '중국고대신화'를 시작으로 '산해경 교주'(80), '중국신화전설'(84), '중국신화전설사전'(85년), '중국신화사'(88), '중국신화통론'(91), '중국신화대사전'(98) 등을 출간했다. 위앤커는 지금 쓰촨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에서는 98년 전인초, 김선자 교수가 대우학술재단의 도움으로 번역해 '중국신화전설'(민음사 간)을 출간했다. 고가의 하드커버인 이 책의 가격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99년에는 페이퍼북으로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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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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