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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혼자 온 민박 손님이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밤 아홉시가 넘어서면서부터 차츰 마음이 불안해 집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문밖으로 나가 사립을 기웃거려 봐도 아무 기척이 없습니다.
오후 1시쯤 뽀리기에 다녀오겠다며 나갔으니 선창리재를 넘어 뽀리까지 갔다해도 몇번을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입니다.

나는 저녁도 거르고 일어났다 앉았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안절부절합니다.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이라도 해줘야 될 것이 아닌가.
화가 나고 원망이 들다가도 갑자기 불길한 생각에 가슴이 철컥 내려앉습니다.
아니지 그럴리가 없어.
벌써 열시가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어쩌지.
마냥 기다리고 앉아 있을 수 만 없어 파출소에 연락을 합니다.
다행이도 사건 접수된 것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남은사에 갔다가 붙잡힌 것은 아닐까.
절에 간다는 말은 없었지만 선창리재 넘어 가는 도중에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남은사 올라갔다가 스님한테 붙들려 못내려 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전에도 비슷한 일이 더러 있었으니 자꾸 그런 생각이 듭니다.

남은사에는 오십 중반의 스님이 한분 계신데 외로워서 그런지 술버릇이 고약해서 그런지 술만 마셨다하면 같이 마신 사람들을 붙들고 놔주지 않습니다.
재작년 겨울, 동국대학교 풍물패 '마당'의 여학생들도 스님이 준 솔술을 얻어 마시고 답례로 한판 잘 놀아 드렸는데도 결국 붙들려 몰래 도망 내려오느라 혼난 경험이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대취한 스님이 동천다려까지 쫓아와 놀자고 덤비는 바람에 나까지 진땀을 뺐었지요.

또 작년 여름에는 인천에서 온 여자 손님 하나가 남은사 간다고 올라갔다가 스님이 술 한잔 권하기에 해 저무는 줄도 모르고 앉아있다 못내려 오고 암자에서 자고 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후로도 비슷한 일이 몇차례 반복된 적이 있어서 산에 가는 여자 손님들에게는 늘 주의를 줬는데 오늘은 깜빡 잊은 것이 내 불찰이었습니다.

망할놈의 영감쟁이 그렇게 외로우면 내려와 살 것이지, 먼 염벵한다고 산속에 쳐벡혀 사는지.
물론 그 나이 되도록 제대로 공부한 것도 없으니 어디 다른 절에 들어가기도 부끄러운 노릇이고, 중노릇 그만두자니 다 늙어 먹고 살 일도 막막하고, 그 스님도 달리 방법이 없어서 산중에 눌러 사는 것을 이해 못하지는 않지요.
더구나 세간으로 내려와 산다고 그 지긋지긋한 외로움이란 놈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아닐터니 무작정 내려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거나 참 답답할 일입니다.

11시가 다 되어 갑니다.
더는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남은사에 한번 갔다 와봐야겠습니다.
보길파출소 김경장님과 방범대장 상길이 형님, 나 이렇게 셋이서 산에 오릅니다. 나 혼자 먼저 훌쩍 올라 남은사 입구에 앉아 기다립니다. 걱정 때문인지 깊은 산중 어둠 속에 홀로 있어도 무서운 줄을 모르겠습니다.
태고의 어둠속에 나 혼자 버려져 있습니다.
이 적막한 어둠속 깊은 산중에 홀로 살다보면 깨우친 도인이라도 외로움을 견디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참 지나자 두 사람의 불빛이 가까워집니다.
셋이서 조용히 암자 마당으로 들어섭니다.
마루 밑에 불빛을 비춰보니 오늘은 스님 신발밖에 없습니다.
스님이나, 여자나, 우리나 모두에게 다행입니다.
셋은 샘에서 물을 길러 한 모금씩 나눠 마시고 터덜터덜 절에서 내려갑니다.
절에서는 별일이 없어서 안심이었는데 산밑에 내려오자 이내 더 큰 불안이 엄습해 옵니다.

작년에는 그냥 넘어 갔지만, 가끔씩 보길도에서 삶을 마감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98년 봄에도 중년의 한 여자가 중학교 근방에서 목을 맸습니다.
그 전날 밤 내가 청별 공중 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걸 때 옆에서 무언가 메모를 하고 있던 여자가 자살한 여자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었지요.
그 때 메모한 것이 유서였습니다.
도박에 빠져 큰 빚을 지고 가족들에게 미안해서 자살했다고도 하고, 보길도가 좋으니 보길도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합니다.
물론 그녀는 섬에 묻히지 못하고 다시 뭍으로 실려 갔지요.

또 몇 해 전에는 동천석실에서도 동반 자살을 기도한 남녀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미혼이었고 여자는 결혼한 여자였는데, 석실 정자에서 약을 먹었습니다. 여자는 그곳에서 숨이 끊어졌지만 남자는 살아나 청별 어느 여관에 투숙해 동맥을 끊고 재차 자살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하수구에서 핏물이 흐르는 것을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해 결국 남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만 살아서 섬을 떠났지요.

"불길한 생각들 하지 맙시다잉."
서로 위로하며 산길을 내려오면서도 셋은 말이 없습니다.
밤 12시가 넘었습니다.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제 집에 가서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보고, 뽀리기 바닷가로 가볼 생각입니다.

예상대로 여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방을 뒤져보았지만 보던 책들 몇권만 어지럽게 널려 있을 뿐, 메모나 유서 따위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괜찮것지라우, 먼 일 있을랍디어. "

뽀리기쪽으로 차를 몰아 갑니다.
바람 한점 없이 고요한 밤입니다.
뽀리기 방향으로 막 들어서려는데 황원포에서 차 한대가 달려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우리는 패트롤카의 전조등을 깜박여 다가오는 차를 세웁니다.
갤로퍼 택시가 섭니다.
"어, 누가 타고 있는디".
방범 대장 상길이 형님 말소리에 건너다보니 택시에 그 여자 손님이 타고 있습니다.

"연락을 해야 할 것 아닌가. "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사고 난 줄 알고 이 밤중에 남은사까지 올라갔다 왔는데, 어떻게 된 겁니까."
"죄송해요, 택시기사 아저씨랑 노래방에서 놀다가 그만......"
순간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맙니다.
여자를 태운 택시가 세연정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갑니다.
우리는 허탈한 마음에 넋을 놓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내 안도의 숨이 터져 나옵니다.
별일 없이 무사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별빛이 따뜻한 겨울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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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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