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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는 그랬다.
각 가정에 컬러 텔레비전이 보급되고, 무선 전화기가 나오고, 바닥에는 모노륨을 깔고... 그렇게 한창 물질적 풍요를 누리던 '80년대에 젊은이들은 민주화를 위해 피를 흘렸다. 피를 보는 것이 익숙했던, 그때가 '80년대다.

그리고 한 세기가 뚝딱 바뀌었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붉은 피를 그렸던 젊은 화가들은 이제 흰머리가 하나둘씩 스치듯이 보이는 중년의 화가들이 되었다. 물론 그 이전 선배화가들은 이제 초로의 나이에 접어들었고... 그런 그들을 우리는 민중미술작가라 부르고 있다.

강요배, 김호석, 박불똥, 손장섭, 손상기, 신학철, 안창홍, 오경환, 오윤, 임옥상, 전수천, 정복수, 홍성담, 이응노, 박생광 등 모두 45명 민중미술작가들의 대표작 104점이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4월 1일까지 전시된다. 전시회 제목은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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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아트센터 이호재 대표
ⓒ 배을선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대표의 소장품 중 '80년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대표작 104점이 4월 1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전시된 후, 전시되지 않은 나머지 작품들과 합쳐 모두 205점의 민중미술작품들이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된다. 시대의 탄압을 받아왔던 미술작품들이 한 세기가 지난 후, 떳떳하게 시대의 빛을 받는 것이다.

2월 16일 금요일 오후 5시, 가나아트센터...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전의 개막식을 축하하기 위해 화가, 그리고 화가가 아닌 사람들이 모였다. 자리에 참석한 강홍빈 서울시 행정부시장은 전시작품들을 둘러본 후, "'80년대 그림의 현실발언 가능성을 체감하며 전율했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전했다.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대표가 "민중미술작품에 대한 소홀한 평가에 대해 재평가가 이루어지길 바란다"며 서울시립미술관에 미술작품을 기증하는 이유를 밝히자, 이에 강부시장은 "그렇게 하겠다"며 흔쾌히 대답했다.

전시장에 걸려있는 많은 작품들 중 '70년대 말부터 '84년까지의 작품들은 제1, 2전시장에, 그리고 85년부터 '90년대 초까지의 작품들은 제 3전시장에 나뉘어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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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평론가 김용태
ⓒ 배을선
전시회의 미술작품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이번 전시회의 이름이 말해주듯, 그것은 <리얼리즘>에 관한 것이다. 일제로부터의 해방 이후 상실되어오던 예술의 민족성, 그리고 사회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리고 자유와 민주를 되찾기 위해, 시대와 싸워왔던 현실이 미술작품에 고스란히 전시되어 있다.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은 민족해방과 자유추구라는 주제를 담고 있어 그림으로써 사회에 발언하는 화가들의 작가정신과 그 당시의 미술사조를 알 수 있게 해 무엇보다 뜻깊다.

민중미술의 리얼리즘 운동은 1980년 젊은 작가들이, <현실과 발언>이라는 모임을 창립하면서 본격화되었고, 특히 82년 이후 조형탐구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면서 각종 전시회를 통해 미술계를 장악할 정도였다. 85년에는 당국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미술협의회가 결성되었고, 인사동에 <그림마당 민>이라는 독자적인 전시공간도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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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상 화백
ⓒ 배을선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 중, 기자의 눈길을 끌었던 한 작품은 홍성담 화백의 <현실에의 인식>. 물고문을 당하고 있는 작가의 눈에 고향의 파란 바닷가가 보이고 소나무 한 그루가 불탄다. 아쉽지만, 이 그림은 사진으로 찍어오지 않았다. 직접 전시장에 가서 그림을 본 후에만 가질 수 있는 격렬한 느낌을 기자가 감히 빼앗고 싶지 않아서이다.

미술작품들로 눈이 즐거웠다면, 이제는 입이 즐거워야 할 때. 화가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무래도 술을 마시고 사는 듯하다. 전시장을 나와 봉고를 타고 간 식당. 도토리묵, 두부, 그리고 족발... 술안주로 나온 것들마저 민중안주라고나 해야 할까? 돌려지는 잔, 채워지는 소주. 붉어지는 관자놀이.

정복수 화백은 직접 가져온 사진기로 순간의 이미지를 찍고 있었고, 임옥상 화백은 그가 그린 <자화상> 속 20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기자의 디지털 카메라가 희한한 듯, 서로 찍어본다며, 서로 찍어달라며 이야기하는 화가들의 웃음 어린 홍조 속에 '80년대의 현실이 그대로 고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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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담 화백
ⓒ 배을선
머리를 안 감아서 모자를 눌러쓰고 왔다는 홍성담 화백. 그는 자신의 '80년대를 "역정적인 생각이 많았던 때"라고 회상한다. 이제는 회상에 의해서, 그리고 추억에 의해서 뒤돌아보는 그들의 '80년대가 술상 위에서 교차하고 있었다.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대표의 말처럼, '80년대는 화가들로 하여금 현실에 충실한 미술활동을 할 수 있게 한 셈'이었다. 현실이란 것은 관념과 이상, 환상의 부정, 혹은 부재 속에서 부딪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좇는 사람들은 현실이 주는 냉혹한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80년대 리얼리즘과 그 시대>전은 '80년대의 의미를 가장 잘 읽어볼 수 있는 전시회이며, 그들의 술자리는 '80년대와 작금을 붙잡고 사는 화가들의 현실 그 이상을 읽어 볼 수 있는 자리였다.

덧붙이는 글 | # 전시회 일정

2001년 2월 16일 ~ 4월 1일(일)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 관한 안내 : 720-1020
<가나아트센터 위치 안내>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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