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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2월 8일부터 10일까지 민주노동당 학생 그룹이 주최하는 2001년 정치학교가 서울대에서 열렸다. 홍석천 씨는 9일 프로그램에 직접 강사로 참가해 <홍석천과 함께 하는 동성애 이야기>를 진행했다. 작년 9월 커밍아웃을 한 개그맨 홍석천 씨. 그는 커밍아웃의 순간 무엇에 버림받았고, 지금에는 무엇을 얻어내었을까?

서울대 28동 자연대 대형강의동에서 열리기로 했던 강의는 참가자들이 많다는 이유로 4동으로 변경되었고, 기자가 헉헉거리며 4동을 찾아갔을 때는 검정색 수트를 입은 홍석천 씨가 이미 이야기를 시작한 후였다. 대형강의실은 이미 300여명이 넘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은색의 깔판을 깔고 계단과 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홍씨가 말한 내용이 꽤 길어 재미있었던 그리고,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 1인칭 시점으로 싣는다.

남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커밍아웃을 결심

네덜란드사람인 남자친구 이름은 '월레스'다. 내 이야기를 다룬 책에는 '토니'라고 나와 있는데, 사실 '토니'는 나의 영어이름이다. 그와는 1년 7~8개월 동안 집 안에서만 행복하고, 집 밖에서는 불행한 동거생활을 했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상태로 사람들에게 남자친구를 '영어를 가르쳐주는 친구' 정도로 소개했다. 그가 그런 것들이 괴로웠는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너의 무엇이니?" "너는 나의 사랑이야."
그러나 그는 대답했다. "난 너의 사랑이 아니라 단지 그림자일 뿐이야."

그 순간 사랑하는 사람도 소중한 사람, 하나의 소중한 개체라고 느꼈다. 나를 인정해야만 내가 어느 누구를 사랑해도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인기와 명성을 잃으면 돈도 잃게 되고, 그러면 사는 것이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해 남자친구를 희생시켜왔다. 이제는 내가 희생을 해야 했다. 고민이 많았다. 10년 넘게 이렇게 고생을 해서 방송 일을 하고 있는데 이런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커밍아웃을 해야 하는가... 그리고 나는 그와 헤어졌다.

커밍아웃은 KBS 프로그램 <야! 한밤에> '진실게임'코너였다. 나에게 던져진 질문은 "소문에 의하면 남자를 더 좋아한다는데 진실을 말해라"였다. 처음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소문에 의하면...'이라는 말에 너무나 기분이 나빴다. 연예인들이 나 모르게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 그러나 진실을 밝혀야 했고, "그렇다, 난 남자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녹화가 끝난 후, 감독님이 "어떡할래?"라고 물어와, "전 커밍아웃을 하고 싶지만, 감독님이 절 생각하셔서 편집을 하셔야 한다면 개의치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감독님은 편집해서 방송을 내보냈다. 지금도 의아한 점은 당시 그 방송을 찍을 때 스탭들은 모두 40여 명이나 되었는데, 보름동안 날 찾아온 기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9월 2일, 여성중앙의 한 기자가 찾아왔다. 한 시간 정도를 '커밍아웃'과 관계 없는 질문만 하더니 인터뷰가 끝날 즈음 '혹시 방송에서 커밍아웃을...'하고 묻기에 그 기자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해 주었다. 잡지가 나오는 날은 9월 23일 정도. 기자는 그때까지만 여성중앙의 특종보도를 위해 다른 매체와 인터뷰를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을 매니저에게 말해 주었다.
"나 커밍아웃했어."
매니저는 눈을 크게 뜨며, "커밍아웃이 뭔데?"라고 되물었다. 이러저러한 거라고 설명을 하니 "막아야 돼!"하고 소리를 쳤다. 부모님께서도 "막아라!"하시며 매우 놀라셨다.(장내 웃음)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막는다'고 매니저와 부모님이 돌아다니셔서 일이 더 커져버렸다.

그리고 한 스포츠신문 기자가 냄새를 맡고 호주에 가 있던 나에게 전화했다. 시드니올림픽 때문에 호주에 가 있었을 때도, 한국에서 온 많은 방송국 스탭들과 신문사 기자들이 녹화되는 빨간 불빛이 다 보이는데도 불구 '녹화 안 된다'면서 몇 마디만 해달라고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분들도 모두 밥먹고 살기 위해 그러는 행동이었다. 어차피 밝혀진 거, 그 때 호주에서 다 이야기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그 어떤 것도 정리가 되지 않았고 9월 19일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서 막상 일을 겪어보니까 한국의 연예판이 정치판과 정말로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연예인 당사자를 비롯, 방송사, 기자, 매니저, 법조인 등 이 모든 사람들이 "스캔들이 터졌을 때 어떻게 해결하는가?"에 관해서 좋은 방법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여기까지가 커밍아웃을 하게 되기까지의 전말이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가장 마음이 아파...

커밍아웃을 하면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부모님에 대한 걱정이었다. 항상 해 왔던 생각은 '내가 커밍아웃을 하면, 부모님이 살아가실 수 있을까?'하는 거였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커밍아웃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부모님은 너무나도 건강하셨다.(장내 웃음)

부모님께는 커밍아웃을 거의 '통보'했다. 부모님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셨고 나에게 독약을 먹고 함께 죽자고도 말씀하셨다. 나는 부모님께 "만약 내일, 내가 무슨 일로 말을 못하게 된다면, 전 평생 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표현하지도 못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런 제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라고 되물었고, 그제야 부모님은 그나마 아들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서 나의 '커밍아웃'을 이해하시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부모님은 내가 '게이'라는 것은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다.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부모님은 항상 "너도 저렇게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해서 아이들 낳고 살아야지, 얼마나 행복해 보이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럴 때가 가장 마음이 아프다. 커밍아웃을 한 것이 가장 후회스러울 때는 이런 식으로 부모님을 잃게 될 것만 같은 마음이 들 때다.

커밍아웃, 그 이후...

음, 커밍아웃 이후로 무엇이 달라졌을까? 여자연예인들의 태도다. 여자연예인들은 이제 나만 보면 손잡고, 껴안고, 어깨에 팔 두르고 뽀뽀를 하면서 친근감을 표현한다. 다른 남자연예인들한테 하면 스캔들이 나지만 나한테 그러면 아무 일도 없으니까... (장내 웃음)

커밍아웃 이후, 많이 자연스러워졌고 또 성숙해졌다. 하지만 담배를 많이 피우게 되었다. 컴퓨터도 잘 하지 못했는데 홈페이지가 생기면서, 컴퓨터 하는 시간도 늘었고, 아직은 독수리 타법이지만, 게이사이트를 서핑도 하고 글도 남기고 한다. 커밍아웃 이후, 날 지지해 주는 많은 분들로부터 많은 용기를 얻었지만 가끔씩, 정말 가끔씩 가슴이 슬프도록 아플 때가 있다.

동대문에서 영화보고 쇼핑을 자주 한다. 한 번은 옷을 사러 갔는데, 뒤에 있던 남자 고등학생 몇 명이 "어, 홍석천이다"하고 소리를 질렀고, 그 옆에 있는 친구가 "저 호모새끼, 죽일새끼, XX, 재수없어!"라는 욕설을 퍼부었다. 같이 간 후배가 '저 자식 때려줄까?'라며 화를 냈지만, 나는 그냥 말렸다.

나는 그 학생을 붙들고 나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설명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저 쓸쓸히 걸어가는 내 자신이 불쌍했다. 그 날은 마침 <글루미 썬데이>라는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어서, 정말 자살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또 한번은 집에서 누워있는데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더니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라고 묻는데 대답이 없었다. 나가서 보니 아무도 없었다. 문을 닫는데 문이 이상했다. 아파트 문에 낙서가 되어 있었다.

"호모새끼, 남자랑 자는 놈, 섹스맨" 등 이런 단어들이 대문에서 벨 누르는 데까지 적혀 있었다. 아마도 벨에까지 낙서하다가 실수로 벨을 누른 것 같았다. 갑자기 화가 치밀었고, 누가 했는지 확인하러 팬티바람으로 뛰어나갔다. 엘리베이터는 너무 아래에 있는 것 같아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더니, 초등학교 아이들이 결정적 증거물인 '색연필'을 들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었다.

내가 그 녀석들을 뒤에서 잡으니 "헉!"하고 놀라며 서로 자기가 안 했다고 부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수세미로 아파트 문의 낙서를 지우게 했다. 그 녀석들 지우는 것을 지켜보면서 참 마음이 아팠던 것은, 커밍아웃 전과 후라는 것이다. 커밍아웃 이전에는 내가 연예인이라고 싸인을 해달라면서 쫒아다니던 녀석들이었다. 나도 공부 열심히 하라며 다독거려주던 아이들이었는데... 그 날 빨리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혼자 밖에 나가서 술을 먹고 울다 들어왔다.(장내 격려박수)

내 사이트에 찾아오는 '게이 혐오주의자'들도 많다. 게시판에 올려놓은 글에 리플도 달아준다. 잘 되지도 않는 독수리 타법으로 그렇게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서로 만나 본 사람도 있고, 끝내 나라는 사람을 이해는 아니어도 인정을 해 준 사람도 있다. 나를 '함량미달의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고 욕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나를 향해 욕을 해도 좋다. 나도 싸울 거니까...(장내 박수)

언제 게이라는 것을 알았나?

초등학교 때는 내가 꽤 귀여운 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형이 있었다. 같이 교회를 다녔었는데, 그 형이랑 시냇가에서 벌거벗고 멱도 감고 그랬었는데, 그때 너무나 편안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4학년 때 몸집이 큰 조숙한 형이 나를 다락방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 형이 시키는 대로 따라한 적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때 내가 성정체성을 너무 일찍 깨달은 것 같았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군립도서관 옆의 농협창고에서 성폭행을 당했다. 퍽퍽 때리니까 맞고, 옷도 벗기고... 그때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고 그때부터 게이가 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대학교 때는 진주에서 올라온 한 여학생을 좋아했었으니까. 아무래도 대학로에서 이정섭 씨와 연극<라이어 라이어>를 하면서 확실한 나의 성정체성을 찾게 된 것 같다. 그때 게이연습한다고 종로바닥을 돌아다니면서 게이클럽이나 바 등을 전전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제는 나 스스로 내가 어떤 사람이란 것을 안다. 난 누구에게나 떳떳하며, 앞으로 날 속이는 일도, 남을 속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누군가를 다시 사랑한다면 (여기 온 사람들 다 게이 아냐? 오늘 한 명 잘 골라야 하는데(모두들 웃음)...)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2시간의 프로그램이 끝나고 홍석천 씨는 서울대 학생회관 2층 라운지에 마련된 자유바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자며 아쉬운 마음을 표현했다. 홍석천 씨는 1시간 정도 자신의 '동성애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그 다음 1시간 동안은 질문을 듣고 대답을 하는 형식을 취했다. 몇 개의 질문에 해당되는 답변은 이야기의 흐름상 위의 글에 첨가시켰다. 참가자들은 대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동성애에 관한 높은 관심과 이해를 살펴볼 수 있는 자리였다.

기자가 느낀 커밍아웃 그 후의 홍석천은 사람들로부터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 듯 보였지만,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는 상처는 아물지 않은 듯했다. 성적소수자라는 이유로 홍씨의 인권이 침해를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성애자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조국인 영국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오스카 와일드. 그러나 100년이 지난 후에 그는 '탐미주의 문학의 대가'라는 명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오스카 와일드는 "남자란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날에는 그 여자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해 주지만, 단 한 가지 해 주지 않는 것은 영원히 사랑해 주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문장을 남겼다. 그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여자를 영원히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남자와 여자에 관한 무수한 사랑 이야기들과 문장을 남긴 오스카 와일드를 사람들은 대단한 문학가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홍석천 씨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홍석천 씨가 해야할 것은 무엇인가? 단지 눈을 감았다 뜨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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