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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열아홉이라고 말할까, 스물이라고 말할까.
내 친구 모두 이십대로 가는데 나만 십대는 싫다. 스물이라고 말하자.
스물 넷이라고 말할까, 스물 다섯이라고 말할까. 여자라고 내려다보는 사람들 많은데, "스물 다섯이에요" 나이라도 늘려야지. 얕보지 못하게. 스물 아홉이라고 말할까. 서른이라고 말할까. 애까지 있는데 아직도 애로 보는 사람들 많으니 이것 참, 서른이라고 해야지.

한국에선 음력과 양력 나이가 달라서, 그리고 미국에선 미국나이와 한국나이가 달라서 고개마다 망설였던 기억이 나. 가뜩이나 어려 보이는데 나이마저 적게 말하면 더 어리게 볼지 모르잖니. 어리게 보인다는 게 어떤 경우에는 사회생활하는데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거 알지? 그래서 사람들이 나이를 물으면 한국에선 음력 나이를, 미국에 와선 한국나이를 말해줬어. 근데, 서른 다섯 고개 앞에선 한참을 주춤거리는 내 모습이라니. 이젠 정말 나이 먹는 게 두려운가 봐. 아니면 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게, 그 책임이라는 게 무거운 거고.

서른 다섯이라고 말할까. 서른 여섯이라고 말할까.
서른 여섯이라고 말하기가 왜 그렇게 싫던지. 이 고개를 넘고 나면 코앞에 마흔이 보이는데 마흔? 마흔? 미국 와서 나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애 둘 낳고 어느 날 숨돌리고 앉아 보니 세월은 십 년이 지나 내 나이는 서른 다섯이더라구.

서른 다섯.
서른 다섯, 이라고 혼자 말을 하는데 갑자기 숨이 탁 막혔던 이유는 뭐였을까. 서른 다섯 고개를 넘기가 그리 힘들어 결국 나는 지난 삼 년 동안 서른 다섯에 머물러 살았다. 서른 넷에도 서른 다섯, 서른 다섯엔 물론 서른 다섯, 서른 여섯에도 미국나이로 서른 다섯. 그러다가 오늘, 꼼짝없이 나는 서른 여섯이 되고 말았어.
그래, 오늘이 내 생일이야.

"Happy birthday to me"
어줍잖은 노래라도 하나 부를까 하다가 춥다고 한동안 접어 두었던 길을 나섰다. 운동 삼아 아침마다 즐겨 걷던 그 산책길로.

그러니까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앞 길 하웰 페리 로드로 나서 오른쪽으로 구부러진 길을 천천히 따라 돌면 스탑 싸인과 함께 오른쪽으로 휘트니 팍이란 길을 만나. 여기까지 오면 나는 언제나 휘트니 팍을 따라 올라가지. 하웰 페리를 계속해서 따라가는 게 조금 밋밋해서. 휘트니 팍을 따라 가며 솔나무 향기랑 새소리, 그리고 청명해서 슬프기까지 한 하늘을 바라보며 눈과 귀와 코를 씻다 보면 가로놓인 휘트니 플레이스 드라이브가 나를 기다려. 여기선 왼쪽 길로 접어들어야 돼. 그래야 나중에 하웰 페리 로드를 다시 만나거든.

휘트니 플레이스 드라이브를 따라 내리막길이 수월타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지. 곧 오르막길로 바뀔 테니 미리 숨을 잘 고를 필요가 있어. 그 오르막 길이 제법 사람을 힘들게 한단다. 그걸 넘고 나면 우드 에이커로 이어지는데 거기, 그 숲길에서 서른 여섯을 맞은 나의 오늘이 바로 여기쯤이 아닌가 했어.

우드 에이커를 지나면 바로 다시 집을 향해 가는 길, 하웰 페리를 만나. 그래서인지 이쯤 오면 아직 돌아갈 길이 멀어도 걸음이 훨씬 가벼워지는 느낌이야. 걸쳤던 얇은 스웨터를 벗어 허리에 묵고는 촉촉 젖은 땀 식는 상쾌한 기분을 맛보게 되는 지점도 바로 여기고.

사람이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인생이란 것이 제 집을 나서면 길은 길로 이어지고 갈림길 마주치면 오른쪽, 왼쪽 선택해 걷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나 만나는 것, 결국 삶이란 그런 게 아닌가. 오늘은 좀 나이 먹어 가는 티를 내며 거기, 우드 에이커 그 길에 잠시 서서 '불혹'을 욕심 내 본다.

꼭 공자가 나이 사십에 '불혹'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그렇게도 넘고 싶지 않던 서른 다섯을 흰머리 몇 가닥 뽑아내는 아픔으로 넘고 보니 나이 사십 되면 '불혹'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기네. '불혹'을 욕심내고 보니 마흔이란 나이는 정말 넘고 싶은 고개로 저 앞에 다가와 서고.

어떤 것에도 미혹되지 않고 제 길을 간다는 것.
내가 아름답다고 믿는 길 하나마저 갈 수 있는 용기. 마흔엔 그걸 갖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서른 여섯, 나 오늘 거기 서 있다. 인생은 살아가는 것일 수 있지만 또, 실은 죽어 가는 거라는 거 잊지 않는다면 갖고 싶은 '불혹'을 갖지 못하고 마흔 전에라도 죽음이 올 수 있다는 거 안다면 어떤 것에도 '미혹'될 일 없겠지.

내 욕심에 끌려 다닐 일도 없을 거고. 더 이상 병드는 걸 무서워하지 말자고. 더 이상 가난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고. 상처받는 것도 고독해지는 것도 아파하지 말자고. 나 오늘 서른 여섯, 우드 에이커 그 숲길에 서서 서러워서 아름다울 것 같은 나이 마흔, '불혹'을 꿈꾸고 있어.

마흔에 아름다운 것들 아름답다고 말하는 여유 늘 잃지 않게 되기를.
저기 아침마다 똑같은 이슬 물고 눈뜨는 서로 다른 풀꽃들. 똑 같은 햇빛 받아 누릴 준비하며 기지개 켜는 크고 작은 나무들. 각기 다른 이름의 꽃과 나무로 이 도시의 한 부분, 계절 따라 거기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가듯이 내 삶도 그러하기를.

늘 큰 나무 그늘 아래 서있어야만 한다고 불평하지 않고 발길에 채는 들꽃들이 강렬하고 탐스러운 내 꽃만 할까 자랑하지 않으며 주위를 돌아보아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게 되기를. 아침마다 어김없이 떠오는 태양 앞에 겸손히 빛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람 불어 비 오고, 얼음 얼었다 풀리면 지붕 낡아지고 나뭇가지 몇 개 부러져도 집은 집인 채로 나무는 나무인 채로 저기 저렇게 서 있는 것들, 세월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 변함 없이 비춰낼 수 있는 물 맑은 호수 하나 갖게 되기를.
내 나이 마흔에.

바라보는 숲과 들어가 본 숲이 사뭇 다르다는 거 알지만 마흔, '불혹'의 숲으로 성큼 들어가 보자고 나 오늘 서른 여섯에 우드 에이커를 나선다. 서른 아홉이라고 말할까, 마흔이라고 말할까.
망설임 없이 "마흔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을 향해.

덧붙이는 글 | God, grant me the serenity to accept the things I cannot change,
courage to change the things I can, and the wisdom to know the dif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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