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두 편의 영화로 시카고 가고 싶은 맘을 달랬다. 그레이 하운드를 타고서라도 이번엔 가야겠다는 친정나들이가 또 무산되고 말았거든. 신문과 함께 일을 한다는 것은 이럴 때 정말 나쁘다. 성탄절이나 새해 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계속 찍어내야 하는 것이 신문이니까.

일주일 정도 쉬겠다는 요청이 보기 좋게 딱지를 맞았다. 시무룩해 있다가 이봉렬 기자가 쓴 영화 이야기를 읽었어.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는, 그리고 아이들 손을 붙잡고 극장에 갔다는...

남편과 둘이서만 영화를 본 게 언제였더라. 미국 와서 '고스트'와 '쉰들러스 리스트' 이후에 아마 둘이 극장간 기억이 없지? 우리 큰딸이 세 살 되던 해 '포카혼타스'영화를 극장에서 선물한 후로는 계속 아이들 영화를 같이 보러 다녔으니까.

여긴 극장에 가보면, 연인이나 친구들끼리 짝을 이뤄 오는 일 많지만 그 못지 않게 아이들 손 붙들고 부모들이 극장 찾는 일도 생활의 일부분이다. 방학이나 명절을 앞두고 개봉되는 영화를 보면 늘 아이들 영화가 먼저 나오고. 특히, 추수감사절이 들어 있는 11월의 최고 행사는 가족끼리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인 것 같아.

우리도 그와 다르지 않아서 지난번 추수감사절에도 애들 손 붙들고 영화를 보러 갔다. 식당과 모든 상점 그리고 매일 24시간 문을 여는 수퍼마켓도 문을 닫았는데 극장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바글바글 했어(참, 비디오 가게도). 극장가는 것 아니면 달리 할 일이 없어서인가. 아무튼 그나마 영화 보는 재미 빼면 미국 생활은 정말 심심할 것 같다.

몇 년째 애들 손을 잡고 극장 나들이를 하면서 만족할 만한 것은 가족끼리 볼 만한 영화가 항상 있다는 거야. 이번에 극장에 가서도 예고편을 보니까, 올 2월과 4월과 6월에도 새로운 가족영화가 끊임없이 나온다던데. 그건 달리 말하면 가족 영화(혹은 어린이 영화)를 많이 만들라는 요구가 있다는 것이기도 하지. 그리고 볼 만한 가족 영화를 만들면 부모가 애들 데리고 보러 간다는 이야기고. 영화사들이야 수요가 있는 곳에 돈을 들이기 마련이니까.

손병관의 박스 오피스 리포트 <11월 미국영화 역대 흥행작 회고>에 옮겨 놓은 90년대 11월 흥행작 탑 25 도표를 한 번 훑어 봐. 20위 중 어린이 영화가 10개지. '아메리칸 뷰티'같은 영화를 보면 미국 가정이 모두 형편없이 깨진 가정들만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조금만 더 속으로 들어가 보면 여기가 오히려 더 가족 중심(Family Centered)이고 아이들을 생각하는 문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인지 가족끼리 시간을 보낼 줄 모르는, 혹은 회사, 친구 중심의 문화에 젖은 일부 한국의 아빠들은 여기 이민 와서 적응을 잘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재미없다고 말야.

어! 이거, 데이트 한 얘기하려고 했는데 딴 얘기가 길어졌네. 하여간 나는 오랜만에 남편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영화 보러 가자고. 이웃집에 처음으로 두 아이를 모두 재워달라고(sleep over), 안 하던 어려운 부탁을 다하고. 정말 오랜만에 시간 들여 화장을 하고 점점 편안해지는 바지 대신 원피스를 꺼내 입고 남편의 팔짱을 꼈는데 글쎄, 이이가 선택한 영화가 뭔 줄 아니?
"Vertical Limit"(버티칼 리미트, 수직의 한계)
세상에!

나는 멜 깁슨이 나오는 "What Women Want"나 맥 라이언이 나오는 "Proof of Life" 그것도 아니면 니콜라스 케이지가 나오는 "Family Man"을 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물론, 톰 행크스가 주연한 "Cast Away"가 그날 오픈 했다면 그걸 봤을 테지만.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간 날은 이게 개봉되기 하루 전이었다.

"오케이! 나보다는 당신을 즐겁게 해 주려고 신청한 데이트니까 당신이 보고 싶은 걸로 보자."
10대 청춘들과 젊은 연인들과 그 시간에 애들을 데리고 나온 아줌마와 아저씨 틈에 끼어 10시 20분 마지막 영화를 봤다. 아, 참! 그 시간에 영화 보러 오신 머리 하얀 할머니도 있었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는 아니었지만 뭐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성탄절을 이틀 앞두고 성탄 정신에 어쩌면 꼭 맞는 영화였으니까. 세계에서 두번째로 높다는 파키스탄의 눈덮인 K2 봉우리 등정을 놓고 눈앞에 펼쳐지는 자연의 힘과 인간의 한계,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인 인간의 선택에 관해 한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데 만족했다.

모두 죽느냐 아니면 내가 죽어 남을 살리느냐 하는 절박한 순간에 로프를 끊어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는 진정한 등산가, 아버지들의(어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헐리우드 영화에서 종종 테러리스트로 등장하는 중동사람이 친절을 베푸는 이로 나온 것도 가슴에 남았고.

그리고, 바로 어제.
아이들도 생각해 줘야지. 아이들 손 붙잡고 'The Emperor's New Groove"를 보러갔어. 한국에서도 곧 개봉한다지? "쿠스코? 쿠스코!"라는 제목으로 말야. 평일 오후 다섯 시였는데도 역시 애들 손을 꼭 잡고 표를 사려는 부모들의 행렬은 극장 문 밖으로 줄을 이었고. 세 살은커녕 이제 돌 지난 아이를 안고 온 이들도 많았다.

갑자기 친구 가족과 함께 가는 바람에 항상 준비해 가던 간식과 음료수는 가져가지 못했다. 극장에 가면 아이들이 꼭 먹으려 드는 팝콘과 음료수 값이 다른 곳의 세 배 가량은 된다. 일종의 바가지라고도 할 수 있지. 나는 종종 작은 쿨러(cooler)에 간식이나 음료수를 준비해 가지고 가는데 극장 직원이 다른 곳에서 산 것을 극장 안에 가지고 가지 못하게 해서 싸운 적도 있다.

한번은 꼭 거기에서 산 음료수여야만 한다고 해서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했더니 내 뒤에 줄을 섰던 한 백인 아줌마도 거들어 주더라고. 여기서 그런 규칙을 써서 붙여 놓은 걸 찾아 볼 수 없다고 말야. 그런 규칙이 있으면 써 붙여 놓아야 할 것 아니냐고 말이지. 그랬더니 아무 말 못하고 들어가라고 하는 거야. 그 다음부터는 꼭 집에서 챙겨간다. 하여간 어제는 일반 가격의 세 배 이상의 가격을 지불하고 팝콘과 음료수를 사서 먹으며 영화를 봤다.

거만하고 이기적이며 저밖에 모르는 젊은 왕 쿠스코가 권력욕에 눈먼 이즈마의 속임수에 라마로 변하고 라마로 변한 쿠스코는 늘 다른 사람을 먼저 챙기는 평범한 시골뜨기 아저씨 파차의 도움으로 결국은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게 줄거리다.

"엄마, What's your favorite part?" (엄마는 뭐가 제일 재밌었어요?)
영화보다는 영화보고 나와서 애들하고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게 더 즐거운 내가 꼭 묻는 말인데 어제는 우리 딸이 선수를 쳤다.
"응, 엄마는 쿠스코하구 파차하구 둘이 팔짱끼고 절벽 틈을 올라가는 장면. 너는?"
"으응, 나는 이즈마가 귀여운 고양이로 변신하는 장면."
"그러니? 가연이는 이 영화보고 뭘 배웠니?"
"나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
"근데, 엄마 내가 다시 이 영화의 제목을 정한다면 나는 '파차와 라마'"라고 붙일 거야."

영화 속에서도 쿠스코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파차가 아니라 자기라고 강조하는 우스운 장면이 잠시 나오지만 가연이 제 생각에도 이 영화가 다른 디즈니 영화하고는 좀 달랐나 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쿠스코는 제 눈에도 별로 선하지도 않을 뿐더러 결점 투성이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파차가 주인공이고 쿠스코는 조연으로나 어울릴 그런 인물로 자기 머리 속에 새겨 넣는 걸 보면.

콜럼비아의 전설 "태양속의 왕국"(Kingdom in the Sun)을 디즈니 스타일로 각색한 이 영화는 본래 쿠스코의 또래 친구 파차를 아저씨로 바꾸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냈단다. 디즈니사는 왜 또래 친구를 나이든 아저씨로 바꾸었을까? 아저씨가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일까?

'버티컬 리미트'를 보아도 '엠페러스 뉴 그루브'를 보아도 지금 미국의 어른들은 점점 이기적이 돼 가는 아이들(혹은 청년들)에게 할 말이 있는 가보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너'도 생각하라고. 그래야 '우리'가 행복한 거라고 말해 주고 싶은 건지.

그럼 나는?
남편이 보고 싶어 하던 '버티칼 리미트'도 보았고 애들이 보고 싶어 하던 '엠페러스 뉴 그루버'도 보았으니 나는 행복한가? 솔직히 말해 꼭 그렇다고는 말 못 하겠다..

'엠페러스 뉴 그루브'를 함께 보러 갔던 지민이와 지연이 엄마도 나랑 별 다르지 않은지 '왓 위민 원트'를 꼭 시간 내서 같이 보러 가자고 하네.

근데, 정말 내가 원하는 건, '왓 위민 원트' 영화가 아니야. 모든 것 다 제쳐두고 엄마한테 달려가 꼭 삼 일만 아무 일, 아무 생각 안 하고 엄마가 해 주는 밥, 먹고 싶은 거,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나 철들려면 아직 멀었나 봐. 그치?

덧붙이는 글 | 한국에서 상영하고 있는 가족영화가 어떤 것이 있나하고 찾아 봤더니 영국에서 만든 '치킨런'과 미국에서 만든 '102 달마시안'과 '그린치', 일본 영화 '포켓 몬스터', 그리고 얼마 후에는 제가 어제 여기서 본 영화 '쿠스코?쿠스코!'를 상영하는 것 같습니다.
뉴욕에서 31일에 '춘향'을 상영한다구요. 
한국에 한국가족영화에 대한 수요가 많아져서 좋은 가족영화를 만들게 되고 그 중에 정말 볼 만한 한국 가족영화 한 편이 여기 애틀란타에서 개봉될 날 있을지.
꿈같은 꿈을 또 꿔 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