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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대학수능시험이 끝난 지 열흘이 넘었는데, 아직도 '아드님 시험 잘 보았느냐'는 인사를 받고 있다. 오늘은 모처럼 만난 K씨가 새삼스럽게 이런 인사말을 건넸다. "윤 선생님! 아드님은 이번 수능 잘 보았습니까?"

나는 그 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대답했던 말을 또 다시 녹음기 틀 듯 되풀이했다. "글쎄요, 제 딴에는 웬만큼 보긴 봤나 본데, 희망하는 학교를 갈 수 있어야지요."

'웬만큼 보았다'는 표현은 조금 애매하다. 그러나 그 뜻을 풀이해 보면, '흡족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중·상위권 이상은 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대답이다. 그러니 시험을 아주 잘 못 본 집 학부모가 들으면, 자칫 자식 자랑하는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는 표현이어서 자못 조심스럽기까지 하다.

사실, 이 말도 그 동안 여러 번 인사를 받는 과정에서 꽤나 다듬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평소 아이가 학교 공부에서 줄곧 상위권에 속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비로서 이 정도의 대답은 어쩌면 서운한 마음이 조금은 내포된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입시를 앞둔 자식을 둔 아비로서, 참으로 겸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자식의 수능 점수가 기대치 이하인 학부모가 주변에 너무나 많은 까닭이다.

매스컴에서는 연일 올해 수능이 너무 쉬워 고득점자가 속출할 것이라고 야단법석이지만, 그것은 단지 일부 상위권만을 대상으로 하는 소리이다. 매스컴은 정작 그보다 몇 배 더 많은 중·하위권 수험생을 둔 학부모들의 소외감과 아픈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책임한 보도만을 연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엊그제 우연히 주변에서 잘 아는 사람(그도 역시 아들이 이번 수능시험을 보았다)이 전화 받는 이야기를 옆에서 엿듣게 되었다. 아마도 상대편에서 '아드님 이번 수능 잘 보았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나는 애들한테 관심 없어요"하는 게 아닌가!

그 말을 달리 말하면,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부모가 제 자식의 앞날이 결정될 수도 있는 중요한 국가시험에 대
하여 전혀 관심이 없다니, 이는 분명 정직한 답변이 아닐 것이다.

차라리 '부끄러운 점수가 나와 차마 말을 못하겠다'고 대답한다면 상대로부터 위로라도 받으련만, 그 학부모는 그런 위로조차 받는 것을 거부하고 싶은 것이다. 모든 이가 성취욕을 맛보아야 하는 이 계절에 왠지 쓸쓸하고 허탈해지는 부모의 마음을, 그래서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자식이 잘 되어 보라. 비록 팔불출 소리를 들을지언정 남에게 자랑
하고 싶어 못 견디는 게 부모의 솔직한 심정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
고 그 서운함을 안으로 삭이려는 부모들에게는 지금 어떤 위로도 진정
한 인사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이 계절은 침묵이 약일 수 있
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이 시기가 되면, 남의 자식 '진학걱정'을 해 주는 전화 인사조차도 조심스러워 한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아이가 시험 보기 전에는 격려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 찹쌀떡과 갱엿 꾸러미가 시험 1주일 전부터 줄을 이었다. 그러나 시험이 끝나고 나자, 그 결과에 대해 집안 어른들은 적극적으로 묻지 않았다.

수십 여 년 교직에 있다가 몇 해전 교장으로 정년 퇴임한 큰 형님, 현직 고등학교 교사로 있는 둘째 형님, 몇년 전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보낸 경험을 가지고 계신 누님, 그리고 역시 대학생 아들을 둔 셋째 형님 등등 시험 전에는 격려의 말씀이 이어지더니, 아직도 동생인 내게 자식의 수능 점수를 묻는 안부 전화는 없었다. 수험생을 둔 가정에서 먼저 얘기를 꺼내기 전에는 차마 조심스러워 침묵하는 것이려니 짐작된다.

그렇다고 아직 대학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상점수'를 자랑삼아 떠벌리기도 곤란한 게 부모의 심정이다. 다만,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눌 기회가 온다면 "마음으로부터 격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만 준비하고 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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