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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일이 힘들다는 사람들

요즘 책이 안 팔려서 힘들다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출판사는 출판사대로 힘들고 책방은 책방대로 힘들다고요. 사실 책을 읽는 일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된 때라서 책이 안 팔리니 힘들죠. 책을 한 권 더 읽고 앎을 더 쌓거나 슬기가 더 있다 하여 취직이 잘 되지는 않으니까요. 취직 잘 되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이 없어진 만큼-박사도 실업자가 되는 판에- 사람들 손에 책이 잘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흐름 속에서도 책 장사를 잘 하는 곳도 많습니다. 어른들 책이야 잘 안 나간다지만 아이들 책은 엄청나니까요. 큼직한 출판사들이 아이들 책을 낸다고 허둥지둥 어린이책 밭에 뛰어든 모습들이 그런 걸 보여 줍니다.

그러나 정작 아이들에게 아름답고 알뜰한 책을 쥐어주려고 책을 만들지 않은 만큼 오래도록 두고 볼 만한 좋은 책은 찾기 드뭅니다. 그래서 `어린이도서연구회' 같은 시민단체를 만들어 `좋은 책 골라 함께 나누는 일'도 하지요.

어린이책만큼 번역을 많이 하는 책이 없답니다. 아이들 책은 얼추 겉만 때깔 곱게 꾸미면 `조기교육'에 온갖 애를 쓰는 젊은 가시버시들 높은 눈에 걸려서 팔리거든요. "아이들 교육에 좋다, 조기교육이 중요하다"는 말이 덧붙으면 그 책은 더 잘 팔립니다. 그리하여 어린이책은 어른책보다도 값이 비싸기까지 하지요. 여기에 `영어'를 한두 살 짜리 때부터 가르쳐야 커서도 잘 한다고 영어교재를 불티나게 만들고 팔고 있으니.

<정은> 아저씨 따님

아저씨와 출판밭 모습을 이야기하다가 저는 책을 보러 안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책을 보고 있는데 어느 손님 한 분이 오셔서 아저씨와 이번 수능 이야기를 나누는군요. 나중에 들어 보니 그 분은 건물주인 아주머닌데 이번에 그 분 자녀도 수능을 보았다더군요.

물론 <정은> 아저씨 따님도 이번에 수능을 보았다고 하고요. 수능을 벌써 여러 번 보아서 재수도 삼수도 아니랍니다. 그저 아이가 최선을 다해서 보았으면 되었고, 점수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답니다.

<정은> 아저씨 따님은 아랫도리(하반신)를 쓰지 못해 아무 대학교나 갈 수 없다는군요. 그래서 여러 해 동안 수능을 보았답니다. 웬만큼 성적을 거두지 않고서는 대학교 문턱을 밟을 수 없으니까요. 서울 안에서 당신 따님이 갈 수 있는 대학교라곤 연대, 이대, 서강대, 건국대뿐-장애인 시설을 갖춘 곳이 여기뿐이라서-인데 건대는 너무 멀어 통학하기 힘들고 가까운 연대로 들어갔으면 좋겠다 하십니다. 그래도 장애인 시설을 가장 잘 갖춘 곳이 연대랍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저씨 아주머니가 번갈아 휠체어를 밀어서 학교로 보냈답니다. 뭐 좋은 차를 사서 데리고 다닐 만한 형편은 못 되었으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이대도 나쁘진 않지만 이대는 `공대에 두 명, 미대에 한 명' 하는 투로 장애인을 아주 적게 받아 거기 들어가려면 점수가 아주 높아야 하기에 힘들답니다. 더구나 올해는 연대가 재수생은 특차를 넣지 못하게 8월에 일반 공고도 없이 학교로만 통보하는 방법으로 지원자를 받아서 걱정이 크고요.

따님을 보며 느림을 배우다

아저씨는 처음엔 그냥 "빨리빨리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냐" 하면서 "느긋하게 기다리면서 최선을 다하면" 그것으로 넉넉하답니다. 따님을 보면서 `빨리 갈 수 없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으나 다른 한 편으로 `빨리 가기만 하는 게 최선은 아님'을 몸으로 느끼신 셈이죠. 일찍 시험에 붙어 학교를 다닐 수도 있지만 좀 늦게 들어가도 들어가서 최선을 다하고 나와서 잘 되면 좋지 않겠냡니다.

그러나 장애인이라 대학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일은 참 서글픈 얘깁니다. 요즘 집에서 라디오를 하루 내내 듣는데, 라디오를 듣노라면 대학교 광고가 참으로 많이 나온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대학교도 "우리 대학교는 장애인 편의시설을 훌륭하게 갖추었다"고 말하지 않는답니다. 얘기를 안 한다면 당연하게 갖추었느냐? 그건 아니거든요.

대학교는 `일류대학이 되어 정부지원을 많이 받기를 바라고 기부금을 바라고 졸업생들이 취직이 잘 되는 일'만이 으뜸이 되었기에 이 나라에 470만 명이나 되는 장애인들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애쓰지 않습니다. 뭐, 정부도 장애인이 마음놓고 거리를 다닐 수 있도록 시설 갖추지 않고 새로 짓는 건물도 장애인을 그다지 헤아리지 않으니까요.

서울대학교를 다닌 어느 장애인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서울대 쪽에서는 성적이 워낙 잘 나와서 어쩔 수 없이 받아주긴 했지만 `한 사람 때문에 편의시설을 만들 수 없다'고 해서 그 장애인 학생은 높은 계단은 목발로 오르고 머나먼 강의동은 휠체어로 낑낑거리며 다녔으나 강의마다 지각하기 일쑤였고 계단을 목발로 오르내려도 시간이 워낙 많이 걸렸고, 뒷간에라도 다녀오려면 그 또한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강의를 듣노라면 참고 뒷간도 못 갔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그 장애인 학생은 비장애인 학생을 따라갈 수 없었답니다. 그냥 수업을 똑같이 들으면 괜찮지만, 강의시간에 맞출 수도, 뒷간에도 마음놓고 다녀올 수 없고 강의동 옮겨가는 일은 두 팔과 다리에 문제가 없는 학생에게만 쉬운 일이니까요.

대학교마다 내세우기를 `최고' `일류'입니다. `졸업하면 직장 보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대학교도 `복지'를 말하지 않습니다. `평등'도 얘기하지 않고 `인권'도 얘기하지 않지요. 장애인들이 대학교를 안 가는 건 점수가 나와도 시설이 없다고 발뺌하며 안 받는 대학교쪽 탓이지 장애인이 능력이 없는 탓이 아닙니다.

더구나 <정은> 아저씨 따님처럼 거의 모두 혼자서 공부해야 하는 형편이기에-학원 다니려면 학원 기숙사에서 살거나 통학해야 하는데 그렇게 한다는 자체가 돈도 돈이고 너무 힘든 일이지요- 이래저래 좋지 않은 상황뿐입니다.

<정은> 아저씨는 이런저런 사회 환경을 혼자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일찌감치 깨달으셨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느림'을 배우고 익혀서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천장까지 닿는 책들

<정은>에 오면 늘 볼 책이 많아서 반가우면서 아찔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책들을 보며 고개숙임을 배우고요. 죽는 날까지 책만 보더라도 <정은>에 있는 책을 다 볼 수도 없답니다. 모든 밭에 걸쳐 책장 가득히 빼곡하게 채운 책들. 이 많은 책들은 어제도 그제도 지난해에도 그러께에도 책손님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글쎄 수십 해가 되어도 임자를 못 만날 수도 있죠.

연대생들도 책을 보는 학생들은 책 사러 자주 오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은 학교 마칠 때까지도 <정은서점>이 연대 앞에 있는 줄도 모른다는 게 아저씨 말씀입니다. <정은>은 연대 정문에서 오른쪽-마포, 모래내쪽-으로 200미터 즈음 걸어가면 나오는 곳이기에 학교 언저리를 눈여겨보고 다니지 않고는 잘 알기 어려운 구석도 있긴 합니다.

<이경선 교주-규합총서, 신구문화사(1974)> <김용직, 염무웅-일제시대의 항일문학, 신구문화사(1974)> <백기완-젊은 날, 민족통일(1990)> <배창환-잠든 그대, 민음사(1984)> <천이두-천하명창 임방울, 현대문학(1994)> <이수열-우리글 갈고 닦기, 한겨레신문사(1999)>

주머니에 갖고 있는 돈이 얼마 없어서 오늘(11/26)은 이렇게만 골랐습니다. 이미 골라놓은 책은 내일 다시 와서 셈치르고 오늘 못 본 책들도 내일 와서 좀 더 느긋하게 살펴보려고요.

<정은>은 쉽게 찾아와서 쉽게 책을 보도록 하지 않는답니다. 느긋하게 책방을 둘러보며 이런저런 여러 가지 밭(분야) 책을 훑어보면서 자기가 닦는 밭 책을 찾게 하고 다른 책들도 살피면서 폭넓음을 안을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한 길 반만한 높이가 되는 책장에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천장까지 빼곡히 채운 책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볼 수 있습니다.

바닥에 쌓은 책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여야 볼 수 있지요. 책더미 뒤에 가득한 책은 앞에 있는 책을 옮겨내야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책들은 모두 한 번에 손쉽게 책을 찾으려는 책손님 마음을 흔듭니다. 곧 `느림'이란 화두처럼 높이 있는 책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바닥에 있는 책은 무릎 꿇고 볼 줄 알아야 하며 책더미 뒤에 있는 책은 책더미를 옮기고 볼 줄 알라는 뜻이지요.

책을 보는 일 자체도 여러 시간 공을 들여서 애를 써야 앎이나 슬기를 얻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책방을 찾는 일은 책을 읽는 일 못지 않게 공을 들여야 좋은 책을 고를 수 있죠. 나아가 헌책방을 찾을 때는 짧게는 수십 해, 길게는 수백 수천 해에 걸친 수많은 책밭을 헤집으면서 알짜를 찾도록 합니다.

곧 책 한 권을 읽는 데에도 공을 들이지만 좋은 책을 찾는 데에도 공을 들이라는 뜻이지요.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어느 일에나 공을 들일 줄 아는 몸가짐과 마음가짐입니다. 이는 헌책방에서 얻을 수 있는 물미랍니다. `느림'을 배우는 헌책방입니다.

덧붙이는 글 | [연대 앞 정은서점] 02) 323-3085

* <정은서점>은 연대 앞으로 가서 마포, 모래내쪽으로 걸어가면 나오는 구름길(고가도로) 끝에 있습니다. 서대문 우체국 옆에 있으니 서대문 우체국으로 찾아가도 되고 공중화장실 가는 길에 있으니 공중화장실을 길 가는 사람 아무에게나 여쭈어도 됩니다. 버스 차편은 이어쓰는 다음 기사에서 소개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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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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