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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나절부터 늦가을 바람 소리가 소슬합니다.
진주 강씨 제각으로 들어가는 전나무 숲길이 크게 한번 흔들립니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더니 다시 바람이 불고 물결이 거세집니다.
오후부터는 폭풍주의보로 배가 뜨지 못하게 됩니다.
누가 찾아오기로 한 것도 아닌데 나는 또 알 수 없는 기다림에 초조해 집니다.

문중 시제 모시는 날이라 청별 진주 강씨 제각까지 왔습니다.
시끌벅쩍할 것까지야 기대도 안했지만 제각 안은 낮은 웅얼거림 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마당에 걸어놓은 솥에서 국을 끓이는지 노인 둘이 말없이 불을 때고 있습니다.
어딘지 서늘한 분위가 당혹스러워 나는 선뜻 제각 안으로 발을 들여 놓지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집안 어른 한분이 난감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합니다.
나는 한발 더 뒤로 물러섭니다.
제각 안으로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나도 곧 늙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머지 않아 제삿밥을 받게 될 노인들.
그들만이 조상 제사를 준비하고 있는 풍경이란 결코 이승의 풍경이 아닙니다.
저것은 시제가 아니라 저승길을 앞둔 이들의 잔치 준비가 아닐까요.
사람은 나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돌아갈 때는 순서가 없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나 또한 이 잔치에 참석하지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는 제각 안으로 발을 들여 놓습니다.
내가 나서서 별로 도울 것도 없이 어제 미리 장만해둔 음식들로 상을 차리는 노인들.
그 틈에서 나는 한 참을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큰상 하나와 두 개의 작은 상으로도 모자라 흰떡과 도미, 삼치, 우럭 등의 찐 생선을 가득 담은 접시를 상 밑에 내려 놓으며 노인들은 내년에는 상을 하나 더 차려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이들 중 적어도 몇은 약속을 지킬 수 없을지 모릅니다.
제각 담장 너머로 지난 여름 태풍에 부러진 전나무들의 잔해가 흉흉합니다.
더 이상 땔감을 찾는 사람도 없어 죽은 나무들은 그대로 썩어가고 있습니다.
어느날 아침 바람결에 전나무들처럼 노인들도 그렇게 부러지고 말 것입니다.
61위의 조상들 위패를 모셔놓고 20명도 채 못되는 후손들이 음식을 차리고 절을 합니다.
축문을 읽고 몇차례 퇴주잔을 내리고 다시 술을 붓고 절을 하고, 제사를 마친 뒤 음복을 할 때까지도 더 이상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진주 강씨 제각께 어둠이 깊어져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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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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