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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초등학교 앞에 있는 <오거서>에 오랜만에 가서 우리 말 자료를 뒤적일 참으로 집에서 나옵니다. 가는 길에 오랜만에 <책나라>도 잠깐 들러서 가자고 마음먹습니다. 전철을 타고 곧 바로 갈까 하다가 134번을 타고 아현동 굴레방다리 앞에서 내려서 아현시장에 있는 헌책방을 지나가면 되리라 생각했죠. 그러면서 경희대 앞 <책나라>로 가려고 외대 앞에서 버스를 잡아탑니다. 아무 버스나 오는 대로 잡아타면 되기에 먼저 오는 대로 잡아탔죠. 그런데 지난 번에 <책나라>에 왔을 때는 한 정류장 일찍 내렸는데 오늘은 그만 한 정류장을 더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거지 하고 생각하며 줄레줄레 걸어갑니다. 가게 앞에서 `앙드레 김' 옷이 들어왔다는 알림쪽을 보고 `민족일보' 영인본 있는 것도 잠깐 들여다보다간 안으로 들어갑니다. 에어콘이 시원하게 돌아갑니다. 오늘은 여기서 책을 한두 권만 보고가자 마음먹은 탓인지 눈에 띄는 책이 몇 없습니다. 동무에게 선사해 주면 좋겠다 싶은 <포리스트 카터-작은 나무야 작은 나무야, 고려원미디어(1991)>을 점찍어 둡니다. 이 책은 처음에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가르침>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는데 2판인가 3판이 나올 때 <작은 나무야 작은 나무야>로 책이름을 바꾸었더군요. 번역본 원래 이름도 `작은 나무야...'이니 알맞게 제자리를 잡은 셈입니다.

천규석 씨가 지은 <돌아가야 할 때 돌아가는 것이 진보다(1999),실천문학사>를 책꽂이에서 뽑아서 조금 읽어 봅니다(책이름이 이거 맞든가요?). 그러다 문득 농사짓기에도 바쁜데 글을 이만큼 써내려면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쪼갰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럭저럭 책을 보다가 누군가가 밖에서 아저씨를 찾습니다. 아저씨가 밖에 나가서 책값을 알려줄 때 어깨에 매고 있던 사진기로 눈여겨 보아둔 책방 안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글다 갑자기 아저씨가 "무슨 사진을 몰래 찍어?"하고 소리치십니다. 무어라 변명하기 앞서 얼마 앞서 여대생들이 헌책방 사진을 찍는다고 왔고 아이들이 몰래 책을 빼간다는 말씀을 하셔서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뒷통수를 긁적거리다가 <박인환 엮음-실용국어 중심의 바른 우리말,세계일보사(1991)>을 집어서 <작은 나무야 작은 나무야>와 함께 셈을 치릅니다. <실용국어중심의 바른 우리말> 뒤쪽을 보시더니 181이라는 숫자와 함께 `책나라' 종이딱지가 붙어 있습니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자료를 지워야 한다며 몇 가지를 종이에 옮겨 적으십니다. 그리곤 4000원이라 적어놓은 책값을 보고 `왜 이렇게 비싸게 적었지?' 하시더니 적은 값에서 1500원을 빼 주십니다. 책값을 셈 치르며 은근히 책꽂이에 있던 <나전어(羅典語)문법(1947)>이 얼만지 여쭈어 보았습니다.

퍽 낡은 책이었으나 꽤 싸게 쳐 주셨습니다. 책값을 셈하며 <헌책사랑> 소식지를 한 권 보여드립니다. 소식지를 하나 보시더니 이 비슷한 일을 하는 외국어대 다닌다는 친구가 하나 있던데 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바로 저라고 하니 아저씨가 엥 하고 놀라시더니 그럼 진작에 말을 하지 그랬냡니다. 사진 찍을 때 괜히 꾸짖었다고, 책값을 좀 더 싸게 쳐 주는 건데 하시네요.

<한겨레> 돌리며 우리 말 운동도 하고 상을 탄 것 안다며, 용산 <뿌리> 아저씨와 만날 때 얘기도 많이 듣고 언젠가 여기에도 올 줄 알았답니다. (9/4)


아저씨는 지난날 서울신문에서 기자 일을 하고 출판쪽 일을 했던 말씀부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 주십니다. 경희대 앞에 헌책방을 낸 지 이제 이태 반이라고 하는군요. 시도 쓰고 여러 가지 글도 쓰는 삶을 즐기신다지만 요즈음은 헌책방 살림을 꾸리느라 아무 것도 못하신답니다.

그러니까 가게는 97년 한창 아이엠에프다 무어라 할 때 얻은 거죠. 그때 나라살림이 흔들거리니 이 가게는 권리금 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는군요. 헌책방들이 가겟세나 이런 권리금으로 많이 애먹는데 오히려 아이엠에프가 좀 도움을 준 셈이라 하겠죠. <책나라> 가게 안 모습은 여느 책방과는 많이 다릅니다. 큰 거울(온몸 비추는 거울)이 하나 있고 천장엔 전등이 서른 개 즈음 달려 있고 에어콘도 좋고요. 원래 이 자리는 어느 신혼부부가 무슨 가게를 차렸던 곳인데 둘이 문제가 있어서 서둘러 나가기도 했기에 오히려 쉽게 들어오셨답니다. 조명과 시설들을 보아하니 이곳은 옷가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래서 외대앞에서 94년부터 있었어도 이곳에 헌책방이 있은 줄을 몰랐겠죠.

일요일이면 여러 가지 볼 만한 것들을 거님길에 잔뜩 늘어놓으신답니다. 그런데 지난 일요일엔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물건을 2층 창고로 옮기다가 그만 어깨쪽이 다쳐서 많이 애먹으시더군요. 의약분업이다 파업이다 하면서 처방전 하나 얻기도 어렵고 약 사먹기도 어려워 치료도 제대로 못 하고 계시더군요.

<책나라>에도 날마다 오는 손님이 많이 있답니다. 이곳에서 자리를 움트고 이태 즈음 지나며 단골도 붙고 날마다 하루에 세 번씩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군요. 어느 분은 `살 책이 없어도 그 날 무슨 책이 들어왔는지 자기 눈으로 보고 가야 마음이 놓인다'고도 합니다. 그 분은 어쩌면 책에 중독된 분일까요? 엊그제 읽은 <알폰스 쉬바이게르트-책>이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책 사랑도 너무 지나치면 안 좋을 텐데 하는 걱정도 듭니다.

그러나 좋은 책이 있고 좋은 사람이 있다면 굳이 `책을 안 사더라'도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자신이 죽는 날까지 다 보지 못할 책도 구경할 수 있겠죠. 책에 너무 빠져있다고도 하겠지만 그 단계를 넘어 이런저런 책을 알아가고 이런저런 책들이 어떠한 생각줄기로 어떠한 이야기를 펼쳐가는가도 나누는 거죠.

같은 학교 앞이지만 외대 앞 <신고서점>은 외대 정문에서 왼쪽 고개길로 틀어서 구름다리까지 가야 있기에 외대생들이 거의 못 찾아갑니다. 하지만 <책나라>는 경희대 코앞은 아니지만 전철을 타는 경희대생이라면 꼭 지나가야 하는 건널목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어서 보통 `한갓지다'고 할 만한 때에도 경희대학교 학생들이 교재로 쓰고 강의시간에 읽으라 하는 책을 찾으러 퍽 많이 찾아오더군요. 참 좋은 자리에 헌책방이 있어요. 이것도 참 반갑네요.

<책나라>에서도 새 책을 다룹니다. 헌책방에서 왜 새 책을 파느냐며 이웃한 경희대학교 책방에서 항의하고 멀리(?) 외대구내서점에서도 항의 나온 적이 있다더군요. 글쎄. 이런 문제는 참 야릇하죠. 책방에서 마진을 적거나 거의 안 먹으면서 책을 보겠다는 이들에게 책을 대주는 일로 보면 나쁘다 할 수 없고 사람들이 책을 찾으니 책을 대준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사람들은 책값이 싸다고 해서 꼭 `책값이 가장 싼 곳에서만 책을 사지 않는다'는 대목이요. 책값이 비싸고 싸다 해야 많으면 2000원 쯤 차이 나겠지만 거의 1000원 안팎입니다. 이 1000원이란 더 낼 수도 있고 덜 낼 수도 있지요. 책방에서도 1000원을 더 주고라도 책을 사고픈 마음이 들도록 대접(서비스)을 한다면 사람들은 그리로 몰립니다. 책값이 싸도 친절하지 않고 가서 책을 사는 일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발길이 잘 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어린이책 전문서점에서는 출판사나 작가들과 이어서 여러 가지 행사도 하고 지역문화행사를 주최하기도 하고 어머니 글쓰기 교실도 열고 지역 구청과 책 전시회, 그림 전시회, 백일장을 비롯해 여러 가지 일을 벌이지요. 교보나 영풍도 이런 행사나 강연회도 자주 하지요. 이제 책이 책으로서만 제 값어치를 다 하는 때를 넘어 다른 문화까지 껴안고 함께 보듬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만큼 어느 책방에서 마진을 덜 남기고 책을 판다는 성화를 내기 앞서 책방을 찾는 이들에게 무언가 `책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꺼리를 만드는데 생각과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봅니다.

아저씨는 책을 사러 여의도나 부자동네에도 자주 나간답니다. 부잣집 아파트에 가노라면 버려지는 책만 아니라 온갖 값나가는 진귀한 물품이나 앙드레 김 옷가지들이 쏟아져 나온다는군요. 뭐 이건 저도 잘 아는 일이긴 합니다. 외대 앞에서 신문을 돌릴 때 회기역 지나면 있는 `현대 아파트'까지 제 구역이었는데 그 `현대'아파트는 퍽 오래된 아파트로 처음 지을 때 상당한 부자들이 모인 아파트라 하더군요. 지금은 더 부자들이 많지만 이 동네-외대와 경희대 언저리-에서 잘 산다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인 만큼 새벽에 이 아파트에서 신문을 돌릴라치면 그야말로 흠 거의 없이 깨끗한 옷장, 장롱, 책장, 책상, 걸상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재활용 옷 수거함을 뒤지면 입을 만한 옷이 늘 가득했답니다. 저는 지난날 신문 돌릴 때 이곳에서 주워모은 옷으로 지금도 아주 행복하게(?) 옷가지를 여름-겨울 옷 다 갖춰서 입고 살지요.

그러나 부자동네나 여의도 같은 데서 나오는 물건은 이런 것만이 아니라 노교수나 늙은 교장선생님이 죽을 때 유족들이 버리는 책가지입니다. 이 물건들을 다 사면 <책나라> 아저씨로선 훨씬 돈도 많이 벌고 좋지만 돌아가신 분이 평양에서 찍은 결혼사진이나 사진첩이나 그네들이 남긴 몇몇 책가지는 처분하거나 버리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하신답니다. 그래도 이런 물품들은 많이 나오기 마련이죠. 사실 이런 물품을 처분하거나 버리려 마음먹은 사람들이라면 고물장수로 뵈는 사람이 와서 훈수랍시고 몇 마디 하면 속으로 "어쭈,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나?"하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불러서 다시 처분할 테죠. 그렇게 처분되기도 해야 좋은 자료들이 돌고돌기도 하지만 이렇게 돌고도는 자료를 손에 쥘 때면 씁쓸한 마음이 가슴 한 켠에 자리잡습니다.

아저씨가 저를 알아보신 뒤 2층 창고도 구경시켜 줬지만 댁으로 가져간다는 좀 값진 책꾸러미도 들춰 주셨습니다. 이렁저렁 한 권씩 들춰내니 종로서적출판부에서 엮은 <독한사전(4285,1952)>도 눈에 띄고 4288년(1955)년판 <영어단어숙어의 종합적연구>도 눈에 띄더군요. 신태양사에서 1959년에 펴낸 <조 동화-꽃과 사랑>은 꽃말과 꽃 이야기를 다룬 글을 모아둔 퍽 쓸 만한 책입니다. 제비꽃을 `오랑캐꽃'으로만 달아놓은 모습들이 자료로 쓸 만하다 싶어서 골라두었죠.

<홍 웅선,김 민수-새 사전(4292),대한교과서주식회사>은 이미 갖추고 있으나 다른 분이 찾는 자료라서 함께 골랐고 2000년판으로 나온 <남 영신-국어용례사전,성안당>도 있더군요. 이만 원 정가에서 꽤 빠지는 값으로 셈을 치러 주셔서 갖춰야지 하면서 갖추지 않고 있던 낱말책 하나를 들여놓았답니다. 아직 모자란 구석이 많지만 그래도 여태껏 나온 `말 쓰임 낱말책' 가운데는 가장 나은 책입니다.

마지막으로 가게 밖에 내놓아둔 <민족신문> 영인본을 살까 말까 무척 망설였지요. 도서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소중한 자료고 1961년 5.18군사쿠테타 때 박정희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을 비롯한 신문을 만든 여섯 사람을 사형으로 죽여 없애기까지 하면서 폐간을 맛본 그야말로 `올바른 소리만 하는 신문' 영인본이기에 더욱 망설였습니다. 나중에 쿠테타가 일어난 뒤 신문기사는 기사를 읽을 수 없도록 지워버렸더군요. 영인본에서마저 기사가 지워질 만큼 탄압을 받은 신문인데, 가만히 펼치고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참고할 대목도 많지만 어쨌든 돈은 조금 더 들이더라도 다른 누군가 찾을모가 있는 사람에게 빌려 주기라도 하면 좋으니 돈이 있을 때 사자! 고 마음먹었답니다.

처음 <책나라>로 찾아갈 땐 버스타고 <오거서> 헌책방을 찾아가는 길에 심심하지 않게 볼 책을 한두 권 사들 참이었는데 되려 있는 돈을 다 털려버리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그래도 아저씨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도 듣고 두 번째로 찾아간 어제부터 단골손님과 같은 대접을 받았으니 이 일도 나름대로 좋네요. 사진도 부지런히 찍었고 좋은 책도 널리 구경하고 손에 쥐기까지 했으니 어제 하루에 한 일로는 스스로 흐뭇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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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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