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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9일에서 22일까지 그의 세 번째 전시회인 '긴냇 권영환 통일시 모음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인사동 안국갤러리에서 그를 만났다. 약간 희끗한 머리카락과 편안해 보이는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는 그에게서 '글의 향기'가 느껴진다.

권영환(51). 그는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 통일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시를 글이라는 것으로 다시금 아름답게 생산하는 일을 한다. 그는 오른손을 잃었다. 왼손도 온전치 못하다.

하지만 그는 왼손 집게와 중지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우고 그만의 향기를 내뿜는다. 그것이 그의 기술이요, 예술이다. 밥 먹고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며, 통일을 위한 그만의 땀과 노력이다.

"통일이 뭔가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정치인만 통일을 위해 일하나요? 아마도 국민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통일을 염원하고, 통일을 위해 애쓰고 있을 겁니다. 제가 통일시를 쓰는 것이 저에겐 나름대로 통일을 위한 노력입니다. 사람들이 제 글자들을 보고 통일을 생각한다면 그것도 통일을 위한 노력이겠죠. 무궁화를 보든, 태극기를 보든, 누구나 가슴 한 켠에 통일의 소망을 안고 살지요."

그는 3년 동안 이 전시회를 위해 준비해왔다. 이제 그의 전시회를 찾는 사람은 더 많고, 더 다양해졌다. 91년 당시, 첫 전시회를 열었을 때, 처음 문을 두드린 사람은 다름 아닌 정보과 형사였다. 월북시인 오영재 씨의 시를 쓰고 전시한다 하니, 그가 경찰에 여러 번 불려 가는 것은 90년대 초 상황으로 볼 때, 어쩌면 당연하기도,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한 것이었다.

1978년, 세상은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그를 궁지에 빠뜨렸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불법체류라는 것은 그가 미국에서 살아 나가기 위한 당위였다. 샌 디에고, 마이애미 등지에서 자동차 세차 등의 일을 하면서 삶을 꾸려나가던 그가, 거기서 알게 된 한인가족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한문 서예 작품이 집집마다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한문이었기 때문일까?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그 뜻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 때, 그는 한국인들에게 좀 더 쉽고, 더 아름다운 한글을 서예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83년에 한국에 귀국을 한 후,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오른손을 잃었다.

그는 서예가이다. 통일시를 쓰는 서예가. 하지만 많은 언론들이 그의 이야기를 '장애인 성공담' 정도로 여긴다. 그는 말한다.

"서울대를 1등으로 입학한 학생만을 부각시켜 칭찬하면, 나머지 학생들, 수험생들, 재수생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얼마나 고통이 되겠어요? 나의 인생은 내가 만들었고 나만의 것이에요. 장애인의 성공담은 있을 수 없어요. 나의 이야기를 모든 장애인들에게 적용할 수 없고요. 그것은 또 다른 고통과 장애만을 낳을 것입니다."

장애인, 어쩌면 이 말은 몸이 편한 사람과 조금 불편한 사람을 나누기 위한 필요악일지도 모른다. 이 단어 한마디로 인해, 그들은 우리와 다름을 느끼고, 우리는 그들과 다름을 느낀다. 같은 하늘 아래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하지만 그는 말한다.

"장애인들은 다른 것을 먹고 살지요. '구호'만 먹고 살아요. 선거나 행사 때마다 '장애인과 함께, 장애인 먼저' 등등의 구호만 먹고 살지요. 그 구호에 이용당하고."

그의 말을 듣고 있자니 부끄럽다. 오히려 그런 구호보다는, '우리 모두 함께'라는 생각과 실천이 더 낫지 않을까?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삶, 그것을 위해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없애고 싶다.

마음으로는 후배 양성을 하고 싶지만, 그도 불편한 왼손으로 오른손 잡이 학생들, 그보다 더 불편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마음먹은 것보다 쉽지가 않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경기도 안산에 장애예술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힘쓰고 있다. 가르치지는 못해도 함께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는 것은 모든 장애 예술인들에게 조그마한 위안과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정형화된 많은 것들에 의문을 던진다.

"글을 쓰는 것이 예술이기는 하죠. 하지만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의 위선과 모순이 싫습니다. 아무리 예술이라 해도, 저에겐 이것이 생업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기술이고 노동인 게죠. 예술이 그런 것과는 다른, 한 차원 높은 것인양 구별하는 사람들이 부담스럽군요."

그의 전시작품을 둘러보니, 가운데 한 쪽 벽이 비어 있다.

"이번 이산가족 만남에 월북시인인 오영재 씨가 남쪽에 오셨어요. 평소 오영재 씨의 통일시를 좋아했고, 이번 전시회 작품 중 오영재 씨의 시 '늙지마시라'를 오영재 씨께 전해드렸죠. 그래서 그 쪽 벽이 비어 있습니다."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글로 옮겼다고 해서, 그가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을 떠나있다고 생각하면 큰 실수다. 그가 꿈꾸고 있는 것이 바로 길거리 전시회이기 때문이다.

그는 트럭 한 대를 사서 이곳 저곳, 발길이 닿는 곳마다 그의 글자들을 전시하고 싶어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시인들의 아름다운 시를, 그의 아름다운 글자들을,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통일의 염원을 불어넣고 싶기 때문이다.

통일이 되면 할 일이 없어지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장난스런 질문에 그가 웃으며 대답한다.

"제도적, 사회적으로 통일을 했다고 그게 통일인가요? 문화가 통일이 되고, 삶이 통일이 되어야지 완전한 통일입니다. 계속 쓸 겁니다. 여태까지는 분단의 슬픔을 썼지만, 앞으로는 한 덩어리의 기쁨을 노래하겠지요."

통일시를 글로 옮기는 내내 '혹시 내가 통일의 마음을 잘못 표현하고 있지는 않을까?'라는 걱정이 먼저 앞선다는 그에게 남아있는 숙제는 '북한에서 전시회를 열어보는 것'이라고 한다. 평생이 다 할 때까지.. <오마이뉴스> 독자들을 위해 그는 권정생 님의 시 '밭 한뙤기를 쓰다'를 추천해 주었다.

그가 좋아하는 시란다. 시를 읽었다. 마음이 저려왔다. 아마도 내가 느낀 그 무엇도 나의 것이 아니리라. 우리 모두가 함께 느끼고 함께 소유하고 있는 것일 테니까...

통일은 올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 날을 위해, 그 날 이후의 더 조화로운 삶을 위해서 그는 오늘도 붓을 끼운다. 불편한 손가락 사이에 힘주어..

편한 손가락 사이에 붓을 끼울 필요도 없다. 아니, 붓을 들 필요도 없다.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통일을 향한 뜨거운 마음일 것이다. 별처럼 빛나고, 달처럼 깊어 감히 누구도 따낼 수 없는 그런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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