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기억하라, 천번을 헤어진 뒤 천번을 다시 만나리

폭풍이 온다더라
물길이 닫히기 전에 떠나야 하리라
뭍에서 온 사람들
잠시 머뭇거림도 없이 갑판에 오르고
청별에서 출항한 배가
노화 지나 소안에 가 닿는다
몇척의 어선들
방파제 안으로 서둘러 몸을 숨기고
추자도를 건너온 폭풍우가
적자산을 넘는다

폭풍이 온다더라
비바람 속에 너를 보내며
그러나 정작 슬픈 것은 이별이 아니다
천번의 이별이 두렵겠는가
이별이 아니다
서러운 것은 이별이 아니다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배가 떠난 뒤
물길이 닫히고
물 밑으로 가라앉는
보길도
기억하라
천번을 헤어진 뒤
천번을 다시 만나리

(강제윤, 보길도.1)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로 들어 간 것은 병자호란이라는 비극적 전쟁이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으로 종결된 직후였다.

전쟁이 일어나자 해남에 낙향해 있던 고산은 가노를 비롯한 인근 주민들 수백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고 서해 바다를 통해 강화도로 향한다. 하지만 배가 강화도에 당도하기 전에 강화도는 이미 청나라에 함락되고, 고산 일행은 뱃머리를 돌려 남하 하게 된다. 배가 해남 인근을 지나갈 무렵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시 고산의 나이 51세, 고산은 제주도에 은둔하기 위해 바로 뱃길을 떠난다. 항해 도중 바람길이 바뀌자 보길도 대풍(待風)기미에 배를 정박하고 범선을 날라줄 바람을 기다리다 문득 보길도의 산을 둘러보고 그 산세의 아름다움에 취해 바로 보길도에 들어와 정착하게 된다.

그때부터 고산은 보길도에 별서를 짓고 해남과 한양, 유배지였던 함경도 삼수 갑산, 경상도 영덕과 기장 등을 들락거리다 85세의 나이로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다.

고산은 보길도 부용동에 은거해 들어가며 꿈에 그리던 낙원(仙界)을 발견했다고 기뻐했었다. 그렇다면 정녕 고산은 낙원을 얻었던 것일까. 아니었다. 고산에게 보길도는 평생 은둔의 땅이었을 뿐 결코 낙원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보길도에서 낙원을 발견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그는 평생을 통해 정치적 야심을 버릴 수 없었고, 어쩌면 낙원일 수도 있었던 땅을 도피와 쾌락의 은둔 공간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근래의 평자들은 고산이 보길도에 낙원을 꾸몄다고 말하나 실상 그의 낙원은 왕이 기거하는 한양의 왕궁 안에 있었다. 그는 그의 집인 낙서재를 북향하여 왕이 있는 한양쪽으로 세웠고, 세연지 연못가에 제갈량의 사당을 짓고 싶다고 노래했다.

하지만 제갈량과는 달리 끝내 부름을 받지 못했고, 부름을 받을 만하면 정치적 반대파들의 방해로 좌절 당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 그가 꿈꾸던 왕궁이라는 낙원으로의 출사가 좌절 되었을 때 그는 전혀 새로운 낙원을 꿈꿀 수는 없었을까.

만약 고산이 출사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고 바른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출사를 염원했다면, 권력으로부터 배척 당했을 때 한양이 아니라 저 본토로부터 버림받은 배반의 땅, 보길도, 소안도, 노화도, 당사도, 넓도, 흑일도, 백일도, 점점이 떠있는 섬들, 그 섬 안의 민중들과 함께 낙원을 세울 수는 없었을까.

임진, 병자 양대 전쟁이 끝나고, 왕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 비단옷을 입고 배불리 먹으며 권력투쟁에 몰두해 있을 때, 이땅의 민중들은 기아와 역병으로 또 얼마나 처참한 지경에 처해 있었던가.

하지만 고산은 그가 가진 막대한 부를 민중들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낙원'을 건설하는데 허비하고 말았다. 그것이 보길도의 세연정이고 낙서재며 동천석실이다. 그것이 해남 금쇄동과 수정동 별서들이다.

도탄에 빠진 민중들의 신음 소리 그치지 않을 때 고산의 정원, 세연정에서는 스스로 가사를 쓰고 곡을 붙인 '어부사시사' 가락 소리 끊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어부사시사에 어부의 현실은 없고 어부의 풍경만 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고산을 배반한 것은 시대가 아니었다. 당대의 왕들이나 정적들이 아니었다. 고산을 배반한 것은 무엇보다 고산 자신이었다.

고산 윤선도, 그는 보길도에 부용동 원림이라는 '낙원'을 세웠으나, 결코 낙원에 이를 수 없었다. 우리 역시 보길도에 가고자 하나 낙원에는 한 발도 들여 놓지 못할지도 모른다.

뭍에서 떠난 여객선은 보길도 청별항에 닻을 내린다. 고산이 조정의 관리들을 떠나 보내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는 데서 유래된 청별.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한적한 포구에 불과했던 이곳이 지금은 면사무소와 농협, 우체국, 파출소를 비롯한 관공서와 횟집들이 즐비한 보길도의 중심지가 됐다.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을 꿈꾸고 찾아온 이들이라면 이 보길도의 출입구에서 크게 실망하리라. 저 볼품 없이 네모난 슬라브 건물들. 국적 불명의 양옥들로 인해 이 나라의 모든 포구들은 아름다움의 대부분을 잃었다.

청별항에서 세연정 방향으로 5백미터쯤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호수처럼 아늑한 바다를 만난다. 그곳이 황원포다. 윤위가 '보길도지'에서 "예로부터 동방의 명승지로는 금강산 삼일포와 보길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윽한 아취로는 삼일포가 보길도만 못하다"고 기록하며 삼일포에 비견했던 황원포. 간척 사업으로 논이 생기면서 옛 정취를 많이 잃었다. 그래도 호수같은 그윽함은 어디 비할 데가 없다.

다시 500여미터를 가면 세연정 정원이 나온다. 부용동 원림의 3대 공간 중 누정 공간, 말하자면 위락 시설인 셈이다. 고산 스스로 놀거나 친구들, 조정의 관리들이 왔을 때 접대하던 장소가 세연정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펼쳐진 세연지, 회수담, 연희 무대였던 동대와 서대, 산중턱의 옥소대 등이다.

고산 당시에는 3천여평의 공간이 세연정 정원이었다는데 지금은 일부인 1천여평만 복원되었고, 그 옆 대부분의 공간에는 위압적인 붉은 별돌 건물이 들어서 있다. 3년전에 지은 보길 초등학교 건물이다. 본래는 일제시대에 지어진 단층짜리 국민학교 건물이었는데 학생수가 많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2층짜리로 대형 건물이 들어서 있어 볼썽 사납다.

하지만 건물의 규모나 외양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일제야 원래가 조선의 관공서나 유적지가 있던 곳만을 집중적으로 골라 민족정기를 말살하고 '대화혼'을 심어줄 학교를 건축했다고 하지만, 불과 몇 년전에 대한민국 교육부가 국가 사적지로 지정된 세연정 옆에다, 그것도 사적지 터였고 머지않아 복원될 것이 분명한 땅에다 멀쩡한 건물을 헐고 수억의 예산을 들여 새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할 수가 없다. 건축 당시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바로 작년, 99년에 윤선도 유적지 개발 사업이 확정되었고 지은 지 3년밖에 안된 저 2층짜리 건물은 조만간 헐릴 운명에 처해 있다. 그 자리에는 고산 기념관 등의 새로운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라 한다. 그렇다면 저 건물을 짓느라고 쓰인 수억의 예산과 이전 비용으로 들어갈 수억의 예산, 그 예산을 헛되이 낭비한 책임은 과연 누가 지게 되는 걸까.

세연정과 옥소대를 둘러본 뒤, 큰 도로를 따라 부용리 마을로 향한다.
앞에 보이는 큰 봉우리가 해발 425m인 보길도의 주봉 적자산이다.
적자산 앞의 조그맣고 둥근 봉우리가 미산이다. 그 생김이 그대로 연꽃 봉우리 모양이다. 어째서 고산이 부용(芙蓉)동이라 이름 지었는지 쉽게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백이, 숙제의 수양산에서 따온 미산(薇山)산이라는 이름은 무언가 어색하다. 고산은 백이 숙제처럼 고사리나 뜯으며 산중에 은거 하겠다고 저 산에다 고사리 산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보길도에서 고산의 삶은 기실 고사리 뜯는 것과는 별반 관계 없었으니 말이다.

부용리에 들어서니 그대로 산중이다. 이곳을 누가 절해 고도의 섬이라 이르겠는가. 더 이상 바다도 보이지 않고 파도소리, 갯냄새 나지 않는다. 첩첩산중에 들어서니 서늘한 산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부용리 마을 회관 앞에서 이정표는 낙서재와 동천 석실 양 방향으로 갈라진다. 마을회관부터 부용리 마을 전체가 동백나무 숲속에 들어 있다. 선운사나 오동도의 동백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부용리의 동백숲은 그 어느 곳보다 수려하고 드넓게 펼처져 있다. 동백꽃 피는 계절이면 벌치는 사람들이 먼저 알고 트럭 가득 벌통을 싣고 와 꿀을 따간다.

낙서재 쪽으로 들어선다. 3천여평의 공간에 낙서재, 곡수당, 곡수대, 동와, 서와 등의 건물과 연못 등이 있던 낙서재 옛터는 그 흔적 조차 희미하다. 고산은 이 곳에 기거하며 제자들을 길러냈다.

지금은 한 때의 영화를 알려주는 기와 파편과 석축들만 간간히 눈에 띌 뿐이다. 이제 조만간 이곳도 파헤쳐져 복원될 것이다. 무엇을 복원하겠다는지 모르겠지만, 다만 강진 다산 초당과 같은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산 초당에 갔을 때 여행자는 길을 잘못 들어 선 줄 알았다. 초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화려한 기와집이 있었다. 다산와당. 누가 그곳을 유배 온 다산이 20여년간 형극의 세월을 보낸 감옥이라고 보겠는가. 그것은 마치 돈 많은 선비의 별장과도 같았다. 그것은 결코 다산초당의
복원도 무엇도 아니었다. 다산 정신의 절대적 훼손이었다.

낙서재에서 내려와 여행자는 동천석실로 향한다. 석실에 이르려면 계곡을 건너야 한다. 계곡의 물이 적다. 한때 빼어났던 이 계곡은 우기 한 철 만을 제외하고 늘 바짝 말라 볼품이 없어졌다. 그것이 다 저 위의 상수원댐 때문이다. 고산이 옥구슬 떨어지는 소리처럼 맑은 물 소리가 난다하여 낭음계라 이름한 계곡.

그 빼어난 계곡미는 댐 건설과 함께 수몰 되고 말았다. 전두환 군사정권 때 일이다. 당시 부용리 마을 주민들은 크게 반대 했다. 댐을 건설하지 않아도 사철 계곡에 넘치는 물로 식수나 농업용수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화도 상업지구에 상업 용수를 공급하기 위해 정권은 부용리 주민들의 항의 시위를 무장경찰을 들여 보내 진압하고 댐 건설을 강행했다. 부용리 마을 주민들은 계곡을 빼앗기고 이제 수도요금을 내고 수돗물을 먹으며 농업 용수 부족으로 고통 받는다.

개울을 건너면 전혀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 고요한 동백나무 터널 아래 한적한 오솔길이 10여분간 지속 된다. 석실 바로 아래쯤에서만 약간 가파를 뿐이다.

이 길을 고산은 그의 나이 51세때 13세였던, 38년 연하의 셋째 부인 설씨녀와 둘이서 자주 올랐다. 팔순의 고산이 달구경하기 위해 밤에도 올랐던 가벼운 길이지만 자동차 문화에 오염된 현대인들은 이 잠깐의 거리도 견디지 못해 투덜거리기 일쑤다.

동천석실은 산중턱에 있는 천연의 바위들을 이용해 만든 바위 정원이다. 위태로운 절벽 위에 단칸 정자를 세우고 엿못을 팠다. 우기에는 연못자리에 아직도 연꽃이 핀다. 석실에 오르면 부용동이 한눈에 들어 온다. 적자산 줄기의 능선이 비단결같이 부드럽다. 이곳에서 비로소 평화를 얻을 수 있다. 동천 석실이 가진 조경의 뛰어남은 절벽의 정자도, 바위 위의 연못도 아니다. 적자산의 넉넉함이 품어 안은 부용리 마을의 안온함으로 인해 이곳은 비로소 명승이 된다.

석실 소나무 그늘에 앉아 산바람에 취해 있으면 몇시간이고 일어설 생각이 없다. 보길도 여정은 여기서 그쳐도 좋다. 하지만 바다가 그리운 사람,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싶은 사람들은 길을 내려가 해수욕장으로 간다.

보길도에는 세곳의 해수욕장이 있다. 검은 깻돌로 유명한 예송리 해수욕장과, 중리와 통리, 두 개의 백사장 해수욕장이 그것이다.

예송리 해수욕장은 그 청환석의 해변으로 인해 명성이 자자하지만 실제 해수욕을 하기는 적당치가 않다. 수심이 깊고 가파라서 수영에 익숙한 사람에게나 놀기 좋은 곳이다.

수영이 미숙하거나 아이들과 함께 놀기에는 중리와 통리 해수욕장이 적당하다. 특히 중리 해수욕장은 수백미터를 바다로 나가도 어른 가슴까지 밖에 차지 않는 천혜의 물놀이터다.

해수욕에 실증난 사람은 부황리 계곡의 시냇물에 몸을 담그면 된다. 그도 저도 싫으면 장쾌한 바다를 보러 선창리와 보옥리 바다로 간다.
특히 보옥리 바다와 해변은 특별한 느낌이다. 그곳은 어디 다른 세계 같다. 뾰족산 아래 공룡알같이 둥근 돌들이 펼쳐진 해변, 썰물때의 보옥리 해변은 그 크고 둥근돌들이 살아 움직이며 들끓는다.

보길도처럼 그리 크지 않은 섬에 여러 곳의 맑은 해수욕장과 깊은 산과 시냇물, 이 모든 것이 다 갖춰져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이제 곧 날이 저문다. 해지는 때를 기다려 여행자는 선창리 망끝 전망대로 간다. 보옥리에서 선창리 사잇길이 아찔하다. 보옥리 방파제 공사를 위해 아름다운 돌산 하나가 그대로 파괴되고 있다. 언제 돌이 굴러 떨어질지 모르는 공사장을 지나니 모골이 송연하다. 어떤 안전 장치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낙석 경고 표지판 하나만을 달랑 세워 두고
공사를 강행하는 시공사의 강심장도 놀랍지만, 국립 공원 안에서 빼어난 절경의 산 하나가 파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더욱 놀랍다.

선창리에서의 일몰은 수평선으로 곧바로 떨어지는 모습이 일대 장관이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은 저렇듯 아름다운데 사람 손길 닫는 곳은 어떤 아름 다움도 그 빛을 잃고 마는구나. 갈가리 찢기고 능욕당한채 처참한 몰골로 죽어가는 돌산을 보며 여행자는 선창리 전망대 절벽 끝에 서서 하염없이 서러워진다.

<보길도 뱃길>
보길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완도나 해남 땅끝 마을로 가야 한다.

완도로 가는 경우 완도항 여객터미널에서 하루 4회 왕복하는 쾌속선이 뜬다. 이 쾌속선은 사람만 승선 가능하고 보길도까지 35분 걸린다. 차를 가져 간 사람은 화흥포항이나 석장리 부두로 가야 한다.

화흥포에서는 하루 8회 이상 왕복하는 카페리호가 있다. 1시간 걸린다. 석장리는 승용차와 승합차만 승선 가능한 화물선이 다니는데 1시간 40분 걸린다.

땅끝에서도 하루 8회 이상 배가 다닌다. 차량과 여객 모두 승선 가능하다. 1시간 가량 걸린다.

뱃시간 문의는 완도항(061) 555-0655, 화흥포항(061)555-1010,
땅끝항(061)533-4269.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