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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바람이 또 불려는지 풍경 소리가 요란합니다.
오늘은 풍경을 내려놓지 않을 생각입니다.
시끄러움을 잘 참지 못하는 것도 병일까요.
견디는 데까지 한 번 견뎌 봐야겠습니다.


보길도에서 보내는 편지(1) (2)



하지만 풍경을 내려 놓지 않는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풍경 소리를 통해 나는 늘 바람의 시작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끝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
바람의 시작과 동시에 풍경을 떼어 놓곤 했으니까요.
오늘은 바람의 끝을 잡아 보고 싶습니다.
어디 바람뿐이겠습니까.
근기의 부족인지 돌아보면 내 삶은 언제나 시작 투성이었을 뿐 무엇 하나 끝간 데가 없었지요.

갑자기 봉순이가 짖기 시작합니다. 11시가 가까워오는데.
이 시간에는 누가 올 사람이 없습니다.
더구나 오늘 밤 같이 비바람이 치는 날에는 다들 바깥 나들이를 싫어하니까요.
봉순이 저 녀석이 또 동네 일에 참견하는 모양입니다.
길거리에서 사람소리가 나는 걸까. 고양이들이 교미하는 걸까.
잠잠하던 꺽정이까지 합세해 짖기 시작합니다. 누가 오는 것이군요. 두 녀석이 합창을하면 틀림없이 누가 와도 오는 것이지요.

선창구미 사는 친구가 다실 추녀 밑에 서 있습니다. 친구 뒤에는 왠 여자 하나 서 있습니다.
책을 보다가 속옷 바람으로 토지에 나섰던 나는 주섬 주섬 옷을 챙겨 입고 다시 친구를 맞이합니다.
친구는 술을 한잔 하고 온 모양인지 낯빛이 발갛습니다.

다실에 앉아 차를 우리는데 풍경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장마비 때문에 며칠동안 물때 작업을 못한 친구의 얼굴에 수심이 깊습니다.
바다에 나가야 하는데 일이 되든 안되든 바다에 나가 주낚이라도 놓고, 이제 막 치패를 넣은 전북 양식장을 살펴봐야 마음이 놓일텐데, 며칠째 배가 묶여 있으니 술이라도 마시며 답답함과 걱정을 덜고 싶었던 것이지요.

지리산에서 보내온 햇차, 향이 좋습니다.
서른 일곱의 친구는 오늘도 어김없이 장가 들고 싶다는 얘기를 꺼냅니다. 술을 마셔도 흐트러짐이 없고 말수가 적어 밤 늦게 찾아와도 내가 반기는 몇 안되는 친구 중의 하나, 장가 좀 보내 달라는 친구의 푸념은 끝이 없습니다.

친구는 김발 막고, 멸치 어장을 하고, 틈틈히 주낚을 해서 꽤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습니다. 금년부터는 가두리 전복 양식도 시작했습니다.
몸이야 고되지만 도시 월급쟁이보다 소득이 높으니, 이미 생활 기반은 갖췄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친구가 이 곳에 그대로 눌러 사는 한 가까운 시일 내에 그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 섬에는 결혼 적령기의 총각이 80명도 넘는데 처녀는 면사무소를 비롯한 관공서에서 일하는 3명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얼마전에 어느 종교 단체에서 필리핀 여자와 선을 보라는 제의를 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친구가 언제까지 그런 종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실 문을 나서자 봉순이가 괜히 한 번 짖다가 맙니다.
친구가 차의 시동을 걸고 불빛을 깜박이며 작별 인사를 건넵니다.
50은 족히 넘었을 듯한 다방 여자.
그녀를 태운 친구의 트럭이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갑니다.
이제 친구는 또 어디로 가는 걸까.
친구의 뒷 모습이 쓸쓸해서라기보다 친구를 보내고 망연히 서 있는 내가 쓸쓸해서 나는 오래도록 담장가를 떠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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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섬 활동가입니다.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으며,<당신에게 섬><섬을 걷다><전라도 섬맛기행><바다의 황금시대 파시>저자입니다. 섬연구소 홈페이지. https://cafe.naver.com/islan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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