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분단 55년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지뢰'.

한반도의 허리를 자른 것은 철조망으로 그어진 휴전선이 아니라 비무장지대 안에 묻혀져 있는 지뢰가 아닌가 싶다.

비무장지대 안에 묻혀 있는 지뢰는 아직도 100만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무장지대 안에서 농사를 짓다가 지뢰에 발목이 잘리고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는 10여 명의 노인들이 있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금파2리와 장파리.

임진강 바로 앞에 있는 곳으로 민통선을 눈 앞에 둔 최전방 마을이다. 이 마을에 지뢰 폭발 사고로 다리를 잃고 불구의 몸으로 30년 가까이 고통의 세월을 살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재문(83, 파평면 금파2리) 씨, 김중식(72, 파평면 금파리) 씨, 이덕준(78, 파평면 금파리) 씨, 옹일랑 씨, 이재연 씨, 조만선 씨 등 6명과 장파리의 주수산 씨 등 7명. 이들은 모두 60~80대 고령으로 이제는 거동조차 불편한 몸을 이끌고 지난 날 시대적 상황만을 원망하며 힘겨운 나날을 이어가고 있다.

이 곳은 6.25전쟁 이후 미군들이 주둔했던 지역으로 60~70년대 어려웠던 시절, 주민들은 가축을 기르거나 미군속으로 일했다. 당시 지뢰 제거도 이뤄지지 않은 임진강 건너 장단군 하포리 비무장지대 안에서 이들은 지뢰 폭발 사고에 노출된 채 풀을 베어야 했다. 또한 미군속으로 일했던 사람들은 미군 진지의 시야 확보를 위해 벌목에 동원됐다.

이덕준 씨는 지난 1974년 미군 진지 벌목 작업에 투입됐다 지뢰를 밟아 오른발을 절단한 뒤, 의족에 의지한 채 지금까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금파2리 토박이인 김중식 씨는 가축 먹이 풀을 베러 갔다가 사고를 당해 역시 오른발을 잃었다. 김씨는 지뢰 폭발 사고를 당한 오른발 부위가 화약때문에 점차 썩어 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정강이 밑까지 절단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이재문 씨 역시 벌목에 나섰다 지뢰를 밟아 한 쪽 다리를 잃었다. 이들의 사고는 단순한 개인 사고가 아니었다. 사고를 당하면서 2세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의 씨앗도 잉태하고 있었다.

어려웠던 시절 사고 후 불구의 몸이 된 이들은 당장 먹고 사는 것이 문제였다. 자식들의 교육은 뒷전이었다. 이로 인해 자식들까지 좋은 직장 한 번 가져보지 못하고 가난의 대를 이어 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30년 가까이를 의족에 의지해 오면서 제대로 된 활동조차 못해봤다. 어디를 가더라도 20~30분 가량 서 있는 것조차 버거워 앉을 곳부터 찾아야 한다. 이덕준 씨는 쪼그리고 앉아 용변도 보기 힘든 상태라 재래식 화장실에 나무로 용변기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냉전의 씨앗인 지뢰로 인해 '불구'의 멍에를 짊어지고 긴 세월을 버텨왔지만 보상조차 요구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 당시에는 민통선을 출입하기 위해서는 출입증이 필요했다. 미군들은 출입증을 발급해 주면서 이들에게 각서를 요구했다. 각서에는 "다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먹고 살기 급급했던 절박한 상황이었던 이들은 어쩔수 없이 각서를 써야 했고 가난을 대물림하면서도 지금까지 보상에 대한 얘기는 입 밖에도 내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덕준 씨는 "남북정상회담도 하는데 이제 지뢰도 제거하고 보상도 해주었으면 좋겠다"며 "나이도 많아 얼마 살지도 못할 것 같은데 죽기 전에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도록 보상 문제를 해결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들은 지금도 비무장지대 안의 산에 오른다. 두 달 전에도 지뢰 사고를 당한 이웃이 또 생겼다. 정부는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지뢰 제거 불가 방침을 고수해왔지만, 그래도 이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지뢰 폭발 사고의 위험 속에서도 산에 오른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