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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이 한창 진행 중인 14일 저녁 프레스센터가 있는 롯데호텔 앞은 꽤 분주했다.

호텔인파를 비롯하여 정상회담을 취재하러 나온 전세계 외신기자 및 내신기자들은, 호텔 앞에서 파업농성 중인 롯데호텔노조와 함께 소공동 밤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고 있었다.

호텔문을 밀고 들어가 오른쪽에 자리잡은 에스컬레이터 발판 위에 섰다. 스스슥 미끄러지듯 올라가는 소리에 벌써 내 가슴 위는 2층 바닥에 놓여 있는 흉상처럼 거울에 내비치다 어느덧 프레스센터 입구를 장식한 기둥 사이를 통과한다.

양복을 입은 두 명의 남자가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과 프레스센터 ID카드를 번갈아 쳐다본다. 내신기자는 연한 하늘색, 외신기자는 오렌지색깔의 줄로 만들어진 카드를 목에 걸고 있다.

입구 바로 오른쪽에는 단상이 낮은 바(Bar)가 설치되어, 기자들에게 무료로 커피를 제공하고 있었으며, 그 맞은 편에는 6~7 개 정도의 테이블이 마련되어, 삼삼오오 모여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자리를 못 잡은 외신기자들은 복도에 서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유명한 해외방송국들, TV ASAHI, TBS, NHK, FUJI, ABC, BBC 등은 왼쪽에 진파란색 간판의 부스(Booth)를 설치해 놓았다. 열려진 문틈으로 들여다보니. 3~4명의 사람들이 각자 바쁘게 움직인다.

전화를 받는 사람, 노트북으로 기사를 쓰는 사람, 대화중인 사람들. 오른쪽에는 이번 남북정상회담을 홍보하는 자료들이 "무료이니 제발 가져가주세요"라고 말하는 듯 기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프레스센터, 입구의 파란색 기와지붕이 인상적이다. 발길을 들여놓자마자 T.V에서 보았던 파란 보드가 각 방송국에서 세워놓은 커다란 베타캠 카메라 사이 사이로 내 눈에 들어왔다. 잔잔한 흰무늬와 '남북정상회담', 그 밑에 영어로 'The South-North Summit' 이라고 쓰여져 있다. 양 옆의 커다란 멀티큐브에는 'From 평양 To 서울' 이라 쓰여진 정지된 칼라바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내신기자석은 왼쪽, 외신기자석은 오른쪽이다.
내신기자들은 95% 이상이 모두 남자였다. 비슷한 머리모양에 와이셔츠, 넥타이, 모두 정면을 향해 있는 그들의 뒤통수가 재미있다. 옆의 기자는 "어때? 남탕에 들어온 기분이?"하고 농담을 건넨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 자자락 자자라락...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다.

외신기자석에는 80% 정도가 남자들, 그들은 기사를 쓰기도 하고, 회의를 하기도 하고, 미주나 유럽쪽에서 온 사람들보다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아사히 방송국(TV ASAHI)의 한국특파원 오사꼬 줌페이(Osako Jumpei)씨는 한 움큼이나 되는 서류를 들고 급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그는 부드러운 한국어로 이번 정상회담이 좋은 방향으로 진전되길 바란다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TV에 김정일이 계속 나오니까 친근한 느낌이 들고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쩜 쇼맨쉽일 거라는 말도 있고, 사실 왜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부드러운 인상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이해가 잘 안가요. 남한과 북한, 같은 민족이니까 이번 회담을 계기로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는 SOFA에 관해서 "법안이 개정되어야 해요, 미국이 한국을 떠나야한다고 주장할 순 없지만, 김정일의 주장이 바뀌어 북한이 바뀌면, 남한과 미국도 함께 바꿔나갈 수 있을 것 같네요"라는 조심스런 의견을 내놓았다.

이제 저녁은 물러가고 밤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늦은 저녁식사를 하는 기자들도 보인다. 컵라면과 만두, 어쩜 야식일지도 모르겠다. 밤 10시 30분. 내신기자들은 마지막 합의문 발표를 기다리며 약간은 느슨해진 분위기, 반대로 외신기자들은 본국과의 시차때문인지, 마감시간에 맞춰 기사를 송고하느라 바쁘다.

MTV 의 Channel 3에서 일하는 핀랜드의 헨투넨 미카(Hentunew mika) 씨는 잠깐의 휴식시간을 이용해 복도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환한 금발머리에 파아란 눈의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바보가 아니라며, 남북정상회담을 이렇게 멋지게 이끌어가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한다. 김정일은 똑똑한 사람이니, 이번 회담을 통해 분명히 얻고싶은 것을 얻어낼 거라며 그는 섬세한 갈색눈썹을 치켜 올렸다.

핀랜드사람들이 한국정세에 대해 많이 아느냐는 질문에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핀랜드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한반도를 제대로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군요. 이번 한국방문이 3번째예요. 내일이 돼 봐야 알겠지만, 회담이 끝나도 며칠 더 머물고 싶군요"라고 말한 뒤, 그는 커피잔에 남아있던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

시간은 이미 자정, 두 정상이 합의문에 서명하는 것을 취재하기 위해 흩어져 있던 카메라기자들이 멀티큐브화면 근처에 모였다. 방송국기자들은 조금이라도 일찍 방송을 내보내기 위해, 벗어두었던 양복재킷을 걸쳐 입고 귀에 이어폰을 낀다. 여기저기서 조명이 켜진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와인을 원샷으로 마시자 기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일본 산케이신문의 나무라 다카이라 씨는 합의문 서명 소식을 일본에 송고하기 위해 팩스를 만지작거렸다. 이번이 55번째 한국방문이라는 그는 한국어도 유창하다. 그는 평양에서 들어오는 스트레이트뉴스를 일본으로 계속해서 송고하고 있다. 그는 이번 회담이 100% 성공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어쨌든 김대통령에게는... 임기동안 이런 큰 일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국민들이 그를 좋게 생각하지 않겠느냐면서 말이다.

남과북의 친밀한 관계가 일본에게는 긴장감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일본인들은 남과 북이 가까워지는 것을 전반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일본의 관심은 북한의 미사일문제에 있긴 하지만, 정상회담에 관해서는 긍정적입니다. 어쨌든, 이번 회담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바라는 것은 한반도의 평화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어젯밤 4시간밖에 못 잤다며 피곤하다는 그에게, 앞에 놓여 있는 팩시밀리는 "전 1시간도 못 잤다구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새벽 1시, 프레스센터에서 제공하는 담배 '한마음'을 한가치 피우려고 나오는 사람, 얼핏 보기에 미국인으로 보이는 그의 배는 김정일 국방위원장보다 더 불러보인다. 배 위에 볼펜목걸이와 프레스카드.

로저(Roger Wilkison) 씨. 그는 적어도 남·북이 만난 게 어디냐며, 그런 면에서 이번 회담은 성공적이라고 웃으며 말한다. 그는 한국에서 미군생활을 했다며 한국이 친숙하다고 말한다. 지금은 중국의 VOA(Voice Of America), 즉 '미국의 목소리' 북경지부 사장(社長)이다.

그는 라디오 리포터라며, 두 정상이 만나는 순간 자신이 뭐라고 생방송을 내보냈는지 모르겠다며, 기억에는 Fantastic(환상적인), Wonderful(멋진), Amazing(놀라운), Miraculous(기적같은)...라고 외쳤다고 했다.

처음 남북정상회담 소식을 들었을 때는 '한국에게 참 좋은 일이다(Good For Korea)'라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프레스센터에 와보니 이미 통일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딘 것 같다고 덧붙인다. 며칠 동안 정신없이 보내어서 피곤하지만, 일하러 왔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즐겁다는 그는 멋진 미소로 사진촬영에 응해주었다.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내신기자들은 하나둘 서류가방과 노트북을 챙겨 프레스센터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외신기자들은 본국에 오늘의 마지막 기사를 송고했다.

기자들의 웅성거림과 팩스의 삑삑소리, 핸드폰소리,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 한 여름밤 숲속에서 울어대는 곤충들이 아름다운 협주곡을 들려주는 것처럼, 프레스센터에는 기자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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