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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보이는 머리



내가 5.18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을 광주에서 다녔던 대학동창때문이었다. 그 친구가 할 말이 있다며 집으로 데려간 것은 1984년 대학교 1학년때 벚꽃이 화사하게 피고 난 뒤 어느 날이었다. 그 친구는 비장한 얼굴로 나에게 조심스럽게 방 한구석에서 큰 종이 박스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광주의 진실이라면서 5.18당시에 뿌려진 유인물들을 방 가득이 펼쳐놓았다.


그 때의 충격이란!.. 나는 친구가 설명해주는 당시 상황을 듣고 유인물을 보면서 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온 몸이 분노로 떨리며 떨어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머리가 군화발에 짖이겨져 아스팔트 위에 마구 뒹굴고 있는 그 모습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꿈에 나타난다. 갈갈이 찢겨진 머리에서 분리된 한 쪽 눈이 나를 뚤어지게 쳐다보고 있고 나는 그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이 깨곤 하는 것이다.



왜 자꾸 꿈에 보이나?



그 유인물을 본 후 나는 이른 바 운동권 학생이 되어 짱돌과 화염병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일시적인 분노의 표현만은 아니었다. 내가 던진 돌의 일부는 이 사회 속에 찌들어버린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으며, 평생을 아버지가 사업하다 빛진 돈만 갚으며 하루 14시간동안 장사에 매달리는 불쌍한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었고, 평생 그 돈 한 번 벌어보지 못하고 돈만 쫓아다니다가 이 놈 저 놈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살아온 아버지에 대한 동정이었다.

내가 던진 다른 돌들은 고 1 때 내 학교에 진주해있던 계엄군과 장갑차의 멋진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저씨 총 한 번 만져봐도 되요?"하고 쫓아다녔던 나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분노였으며, 조선일보니 KBS니 MBC니 하는 뭇 방송들이 광주와 서울역광장의 시위장면을 간첩들의 소행이라 선전하였고 나 또한 어리석게도 그것을 믿고 있었으니, 그것에 속은 억울함이었고, 광주에서 죽음을 당한 투사들에게 진 빛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었다.

내가 전경들에게 던진 화염병은 악마적 전두환 정권과 그를 지켜주는 재벌집단에 대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응어리들이 내 배를 뚫고 터져나오는 핏덩이와 같았다.



그 대학시절을 보내고 3년의 수배생활을 보내고 이미 17년이 지난 지금 그럭저럭 먹고 살고 있는 나에게 계속 그 꿈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때의 그 분노와 나에 대한 어리석음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어쩌면 그렇게도 그대로 남아있는지.. 바로 그 때문이다.

여전히 내 부모님의 모습은 예전과 다름이 없고, 재벌집단은 거리낌 없이 노동자들을 농락하고 있으며, 망월동에 헌화하는 정치인들은 여론의 주목을 끌기 위해 애 쓰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렇게 말하며 광주를 여전히 짓밟는다.

"5·18을 맞는 광주의 이 같은 모습은 불과 10여년 전 전투경찰이 시내 곳곳에 진을 치고 최루탄이 난무하던 때와 비교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이다... 초기에는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는 다수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하지만 ..97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5·18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논의가 확산됐으며, 새 밀레니엄을 맞은 올해에 이 같은 변화가 급류를 타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 5/16)

광주항쟁을 폭도와 간첩들의 소행으로 보도했던 조선일보에게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 명예회복 등을 요구하는 다수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인 것이다. 하긴 그러하지 않은가? 전두환과 노태우가 버젓이 돌아다니고, 미국이 개입했네 한 했네 하는 것도 미궁에 빠져 있는 마당인데, 광주를 기억하는 행사라는 것이 이제 다 잊어버리고 '미래 지향적으로 승화'하자는 것이라 하니, 조선일보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변화"가 아닌가.



내가 망월동에 가지 않는 이유



민주유공자를 지정하는 것도 좋고, 의원면직 교수들에게 배상하는 것도 좋고 '평화와 인권의 도시'도 좋고, '꽃잎'도 좋고, '박하사탕'도 좋고 좋다. 그런데도 왜 자꾸 그 짓밟힌 눈동자는 여전히 꿈에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느냐 말이다. 하긴 조선일보가 여전히 저렇게 떠들어 대고, '광주진압작전'으로 훈장을 받은 79명 중 77명이 여전히 훈장을 달고 다니고, 미국군들이 우리 여인네들을 거리낌 없이 강간하고 다니는데, 그 눈동자가 꿈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아직 한번도 망월동에 가지 않았다. 친구들이 모두 떼거지로 소풍가듯이 가자고 할 때도 가지 않았다. 혼자서 한 밤중에 가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저었다. 망월동, 그 영령들에게 무엇을 했다고 뻔뻔스럽게 말할 것인가!




이 글은 한겨레 리포터란에 제가 올린 글입니다.

안철환 magican@han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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