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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그래, 드디어 따라잡았어.
한국에서 '허준'이 34편인가 나갔을 때부터 비디오를 빌려다 1편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번 주에 44편까지 다 봤다. 오랫동안 잊고서 접어두었던 '한국 드라마 보기'를 다시 시작한 거지.

여기서 얼마나 오래 살았나를 짐작하는 우스개 잣대가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커피다. 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다 넣으면 유학생, 크림만 넣으면 영주권자, 둘다 안 넣고 블랙이면 시민권자래.

그런데 이건 순전히 억지 유머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에 따른 것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그리고 또 다른 하나가 바로 한국 비디오야.
가방을 몇 개씩 들고 여기 온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 중에는 여기 생활의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한국 비디오에 매달리다시피 살아가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그 중에는 일주일에 일이십 개씩 아예 박스에 담아서 갖다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보통은 여기 오래 살면 살수록 한국 비디오와는 멀어지게 마련이지.

어제는 한인타운에 나갔는데 하도 사람들이 '허준', '허준'해서 잠시 한국 약국에 들렀다가 27년간 미국에 사셨다는 약사에게 물었다.
"약사님도 '허준' 보세요?"하고.
"네? '허준'이 누구예요?"
"모두들 '허준'을 본다길래 아저씨도 보시나 해서 여쭤봤어요."
"저, 한국 비디오 안 봅니다. 미국 신문 읽고 인터넷 하는 것도 시간이 모자라는데요..."

미국을 찾아 온 한국인들은 정착 초기에 한국에 대한 향수와 낯선 곳에서 금방 적당한 문화공간을 찾아내 해소하기 힘든 문화적 욕구를 한국 비디오에다 쏟아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나도 미국에 와서 처음에는 일주일에 서너 편씩은 빌려다 본 것 같애.

그런데 그렇게 일이 년 지내다 보니까 비디오 보는 것이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어.

여기 생활에 적응하려면 영어공부도 더 해야 할 것이고 가뜩이나 바쁘고 그야말로 다람쥐 쳇바퀴 같은 나날 속에 소중한 나만의 시간을 찾으려면 조각시간이라도 유용하게 써야하는데 이건 밤잠 줄여가며 소파에 몸을 내맡기고 앉아 영양가 없는 TV화면에 울고 웃는다니 어느날 부턴가 그런 내 모습을 더 두고 볼 수가 없어졌다.

또, 뉴스 진행자들을 비롯해 한국 TV화면 속에 나오는 경직된 모습들이 마치 여기 생활에 맞지 않아 옷장 속에만 몇 해째 얌전히 걸려있는 한국 옷들처럼 보는 것만도 점점 부자연스러워지더라구.

그래서 한국 비디오를 길들이기 시작했지. 한 5년 동안은 전혀 안보고 살았는데 그래도 오리지널을 물으면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해야 되는 까닭에 한국이 어떻게 돌아가나 분위기는 알아야 할 것 같아 얼마 전부터는 이삼 주일에 한번씩 '이홍렬 쇼'를 하나씩 빌려다가 봤다. 그것도 시간이 아까워서 빨래 개는 시간에만.

왜 하필 '이홍렬쇼'냐 하면 그이가 미국에 와서 공부하고 갔다고 하길래 어떻게 쇼를 하나 보려고. 미국 왔다간 표는 안 났지만 건전하고 괜찮다 했는데 시청률이 떨어지는지 갈수록 선정적인 장면들이 많이 나와 "별로다"하는 참에 '허준'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홍렬 쇼'가 '허준'에게 밀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럼 왜 다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느냐?
첫째는 '허준'을 안보니까 말이 안통해서.
그리고 둘째는 그게 아이들 교육상 좋다고 해서.

한국사람들 만나면 모두들 '허준', '허준' 하니 거기에 대해서 모르는 나는 전혀 대화에 끼일 수가 없더라구. 미국사람들하고 잘 안 통하는 것도 답답한데 한국사람들하고도 안 통하니 말이야.

또, 그걸 보는 아줌마들이 그러는데 아이들도 좋아한다는 거야. 온 식구가 같이 앉아서 볼 수 있고 아이들에게 한국의 옛 모습이나 침술 등 한의학에 관해서도 가르쳐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해서.

어떤 꼬마는 그걸 보고 나서 한국 가시는 할머니께 '한국적'인 선물을 사다 달라고 특별부탁까지 하더란다.

한국도 '허준'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던데 여기도 마찬가지다. 다른 드라마나 쇼들은 매주 금요일마다 나오는데 '허준' 만큼은 목요일 날 나온대.

"허준 나왔어요?" "허준 나왔어요?"
하도 재촉이 심해서 비디오 가게에서는 제일 먼저 복사를 하나봐.
여기 어느 비디오 가게서는 바로 그 목요일 날 '허준'을 빌려가려고 줄을 서고

"아이구, 다 나갔다고? 한 4백 개는 만들어놔야지..."
하며 성화가 대단한가보더라.

나도 그 틈에 끼어 결국 '허준' 비디오를 빌려왔다. 그런데 중간쯤 가다보니 여기 어느 아저씨 시청자의 말대로 "지나치게 교육적"이며 "지나치게 허구"라는 말이 이해가 돼서 중간에 물리려다가 주변인물들이 재미있어 나는 허준 보다는 주변 인물 들을 보는 맛에 그걸 여태껏 본 것 같애.

허준의 앞일이야 어찌 될지 불을 보듯 뻔한 것이고 남편도 오히려 유도지의 인생을 눈여겨보는 것 같은데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얘기고 우리 이웃들의 얘기는 또 다르다.

"요즘은 왜 예진 아씨 같은 여자가 없는 거야, 도대체. 그런 여자만 있으면 얼른 장가갈텐데."
장가 못 가서 안달 난 노총각 말이다.

예진 아씨가 또 그렇게 인기라며? 여기도 그런 애인 하나쯤하고 바라는 유부남들도 많다더라. 거기 까진 그렇다 치고 그 노총각 그리고 나서 저 혼자 받는 말이 소화 안되고 위벽 어디쯤 턱하니 와서 부딪친다.

"하긴 허준 같은 남자가 없으니 예진 아씨 같은 여자가 없지."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허준 같은 남자가 없어서 예진 아씨 같은 여자가 없다니!
여자의 품성이 남자에 의해 만들어지나? 그러고 있는데 또 재빈이 엄마가 와서 한마디하고 가네.

"그래, 남자로 한번 태어나면 그렇게 살아야 돼. 아, 허준이 처럼 말야."
그래서 내가
"그래요? 그럼 여자는?" 하고 물었지.

"여자야 뭐"하고 얼버무린다.
그이도 분명 여성학 세대인데 참 다르다.
"나, 바빠서 빨리 가봐야 돼요."서둘러 나가는 그이 뒤에 대고 나는 담아두었던 한마디를 기어이 쏘았다.

"남자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면 여자도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 아니에요? 남자 여자 사는 방법이 뭐 다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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