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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4월 18일 한겨레신문 16면 왼쪽 위에 조그맣게.. 92년 충북대 총학생회장과 전대협 충주지부 의장을 맡았던 박찬우(32)씨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나왔다.

그는 "지난해 2월 11년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보험회사에 취업했지만 6개월 만인 8월 종격동 종양이란 암으로 쓰러졌다"고 한다. 그의 기사를 보면서 오늘의 386세대의 진정한 현주소를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무성한 소수 386세대들의 성공신화 속에 묻힌 대다수 386투사들의 현재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경제계에서는 벤쳐기업으로 성공한 386세대들의 성공담이 기성언론의 지면을 채우고, 문화계에서도 연극계니, 영화계니에서 엄청난 떼돈을 거머쥔 386세대들이 등장한다.

정치계에서는 전 총학생회장들을 위주로 출마붐이 일었다. 허인회(민주당), 이인영(민주당), 임종석(민주당), 김윤태(민주당), 원희룡(한나라당), 오경훈(한나라당), 박종운(한나라당)등이 그들이다.

잠시 박종운씨를 보자.
박종운은 전두환 정권이 고문으로 죽음으로 내몬 박종철 학형의 선배로 박종철씨가 죽음으로 지켜낸 선배였다. 그는 후배가 죽을 당시 또 다른 고문기술자였던 정형근이 있는, 전두환 정권의 후예인 한나라당에 입당해 있다.(이것을 들먹이는 것이 박종운에겐 얼마나 듣기 싫은 일일까? 박종운에게도 당을 선택할 정치적 자유는 있다고 정말 하소연하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후배의 유령까지 내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386세대 대다수를, 아니 일부라도 대변해줄 수 있을까?


도대체 386세대가 무엇을 했는데?

386세대는 총을 들고 독재에 항거한 광주항쟁을 경험하거나 그 영향을 깊이 받았다. 그들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몰락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노태우, 김영삼 정권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격변기의 한가운데에 있었으며 가장 앞서서 변화를 주도하고자 했던 세대이다.

특히 그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사상적으로도 엄청난 변화 속에서 살았던 세대라는 점이다. 아마도 386세대가 아닐지라도 그 이전, 이후 세대의 기억 속에 분명하게 남아있을 NL이니 PD니 하는 말은 주사파와 자생적 맑시즘계열간의 사상적 차이를 두고 일컫는 말로, 언론에서조차 이 두 파벌간의 차이와 그로부터 파생되는 각종 운동사상들을 거의 연구하다시피 해야만 학생운동에 대해 그나마 제대로 취재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그 당시의 분위기였다.

실제로 당시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은 그러한 사상적 차이를 이해하고 연구해야 했으며 심지어 친구, 형제끼리도 사상적 논쟁을 벌여야 했다.

그 논쟁은 자못 심각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논쟁들이 당시 우리나라를 30여년동안 사상의 불모지로 만든, 유럽의 중세시대 이상 지독했던 반공사상이라는 철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시작이며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386세대는 30여년 동안 철저하게 금기되온 사회주의에 관한 논의를 사회전면에 드러냄으로서 스스로를 사상적으로 개방시켰다.(그것은 당시로서는 목숨을 거는 것과 같았다. 유럽식 사회주의조차 말이라도 꺼내면 북한동조자로 잡혀가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는가!)

386세대들이 각자의 신념에 기초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면서 벌인 투쟁이 오늘날 수많은 식자들이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더욱 자유로운 사상적 연구를 할 수 있게 된 밑거름이 되었다고 믿는 것은 결코 오만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386세대는 좌절을 경험한 세대이다!

그들은 정치권력과의 투쟁에서 가장 앞서 있었으며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아마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나 노동자였던 사람들 중 몇 명중의 한 명은 구속이나 수배, 하다 못해 구류라도 살았으리라. 전두환이 물러나고 노태우가 6.29선언을 하는 날 대부분의 당시 학생들은 승리의 환호를 올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노태우 정권과의 투쟁을 해야 했으며, 마침내 김영삼 정권이 등장했을 때 쯤에는 오랜 투쟁 속에 지치기 시작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른바 '사회 속에 들어가 투쟁하자.'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하고(이것이 얼마나 맥빠진 구호인가! 사회 속에 들어가는 것은 좋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투쟁하고는 관계가 없었다.)

3-4년의 수배생활이나 감옥생활에서 나온 투사들은 투사이길 포기하는 순간, 3-4년을 미리 준비해온 사람들과 공정한(?) 경쟁을 해야 했던 것이다.

순수한 열정만으로 그 오랜 세월동안 정치권력과 전쟁을 했던 투사들은 자신의 투쟁경력으로 개인적인 영달을 꾀하고자 하는 사람은 적어도 대부분 없었다. 대다수 386투사들은 노태우가 수배를 해제시켜주거나 김영삼이 복학을 시켜주거나 하면(이것은 분명히 사탕발림이었다.) 이제 '자기 역할을 다했다'고 믿으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것은 단지 원상복구였을 뿐이지만(원상복구? 가장 젊은 시절 3-4년은 어데로 가고) 그들은 특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한편 노태우 정권이나 김영삼 정권은 꾸준히 조직들을 와해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투쟁할 조직을 잃은 투사들은 다시 예전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평범한 삶을 강요받았다.(이미 평범할 순 없었는데도...)

그 중 일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이라는 딱지를 붙인 채, 무슨 대기업이라는 회사 문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고, 끝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일부는 외국으로 나가기도 했다.

또한 26살, 27살이란 나이에 수배가 풀리거나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 중 국가보안법으로 징역을 산 사람 이외에는 모두 군대에 끌려가야 했다. 제대는 서른! 설사 주민등록증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지 않더라도 서른 살에 들어갈 직장이 어디 있겠는가!

이 때 운동권출신들 사이에 나온 말이 '운동권 3비업종'이라는 것이었다. 이른 바 '보험영업', '학습지 교사', '학원강사'를 말하는데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그다지 경력이 필요없어서 운동권 출신들이 가장 많이 진출한 직종으로 꼽혀서 나온 말이다.

그나마 가장 잘 풀린 경우는 과거경력을 속이고 어쩌다 재벌기업에 들어가 남들보다 늦기는 하지만 평범한 샐러리맨이 되는 것이었다. 그 바닥에서 그럭저럭 적응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노조 결성을 주도하다가 또 감옥에 간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일부는 개별적으로 새로운 투쟁전선을 찾아나서기도 했으며 그 어려운 과정을 감내한 그들은 지금도 노동자, 농민들의 고통을 함께 하며 진정한 투사로 거듭나고 있는 이들도 있다.(이들이야말로 386세대의 희망을 진정으로 대변할 수 있지 않을까! 바로 민주노동당의 최용규와 같은 투사가 진정 386의 대변자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대다수 386세대들이 오랜 투쟁 후 겪은 과정이며 현재이다. 그들이 바랬던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은, '통일조국'은 오지 않았다.

386세대여! 다시 꿈을 꾸자!

결국 요즘 신문에서 떠드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에서 설치는 정치지망생들중 대다수는 특히 한나라당에 입당한 386정치인이란 자들은 386세대중 사실상 건전치 못한 극소수 운동귀족이며 386세대 대다수를 대변할 수 없다.

순수한 열정으로 운동을 했었다면 자신의 운동경력을 팔아 정치경력에 넣고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따위는 감히 자신의 젊은 날 열정에 부끄러워 하지 못할 짓이다.

386세대들의 투쟁과 그들의 성과는 이땅의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다소 여유있어진 사상적 자유로움과 역시 다소 여유있게 된 결사의 자유로움이다.

그러나 순수한 열정으로 젊은 날 수년간을 투쟁에 몸바친 대다수 386세대는 이 사회의 한쪽 구석에서 곤궁한 생활을 연명하며 자신의 젊은 날 꿈을 껴안고 방황하고 있음을 분명히 직시해야 한다.

이것은 어쩌면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 채 김영삼정권 이후 대부분 와해되고 좌절해버린 업보라 할지도 모른다.

박찬우씨의 죽음! 그 죽음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갈수록 현실이 암울해지고 있는 한, 젊은 날 그 순수한 지향을 버리지 못한 채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조차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를 원하는 386세대들의 투쟁은 아직 끝날 수 없다는 것!

그들중 많은 수가 지금도 한쪽 구석에서 곤궁한 생활에 시달리며 '그 날이 오면'을 꿈꾼다. 그리고 그들의 젊은 날 투쟁의 댓가는 '그날'이 와야만 보상될 것이다. 그것이 '행동하는 세대' 386의 본래 모습이며, 격동의 젊은 날을 투쟁으로 보낸 그들이 돌아가야 할 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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