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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주인공은 정은주, 31세, 청소년 선교활동을 하는 남편과 함께 서울 상도동에서 살고 있다.

한 대학교정에서 그이를 만났다. 첫애가 흙장난을 아주 좋아해서, 자주 그 학교로 놀러 간단다. 그이는 네 살박이 딸과 열달된 아들을 둔 전업주부다. 그런데 좀 남다른 사연이 있는 주부다.

이틀동안 거리에서 수많은 아줌마들에게 인터뷰를 거부당한 캠코더 아줌마는, (이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매일 한 건씩 올린다고 장담했으니, 세상 모든 기자님들께 존경과 연민을!!) 바로 오늘의 주인공으로 이 여인네를 낙점했다.

별생각없이 선거판이나 좀 씹어보자하고 만난 사람이건만, 의외의 진술을 듣게 된다. 때문에 오늘은 썰렁한 후일담과 변명은 각설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본다.

(질문은 '캠'으로 답변은 '주'로 표기한다.)

캠:아이를 둘이나 키우려면 힘들텐데, 어떤 점이 가장 힘든가?
주:얘들 키우면서 그게 결국은 나의 수양을 쌓는 길이구나, 내가 깨져야 되는 길이구나...그런 걸 느끼죠. 예전에는, 결혼하면 애낳고 남들처럼 그냥 키우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런 일도 미리 준비를 해야 된다는 걸 알았어요. 설사 준비했더라도 막상 닥치면 또 다르겠죠. 그래도 준비해놓고 그 상황을 맞으면 좀 나아질 거예요.

그러면서 그이는 아직 아기를 안낳은 나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는다. 못 본척 무심히 캠코더만 들고 있는 나.

주:(이어서)제일 중요한 건, 부모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닌가 싶어요... 내가 유아교육과 전공이라 책도 많이 보고 그랬는데, 이럴 땐 이렇게 저럴 땐 저렇게... 이론적으로 말하는 책은 많지만 그런 것보다 더 기본적인 문제는 부모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그 관점이 가장 중요한 거 같애.

캠:결혼한 지는 얼마나?
주:이제 4년차...96년 6월 29일에 결혼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부부간에도 의사소통을 위해서, 좋은 관계를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대요. 남편이 가진 고민, 나의 고민, 남편이 하고 싶은 일, 내가 하고 싶은 일...당장 눈앞에 닥친 육아문제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 서로 얘기를 많이 해야되는데 사실 그렇게 대화한다는 게 쉽진 안잖아요. 나는 동그라미고 너는 세모니까, 니가 동그라미로 바꿔야 해, 고쳐!, 그런게 아니고 서로 알아가는 게 중요하죠.

캠:결혼을 결심한 동기?
주:같은 모임에서 활동했었죠. 서로 다른 지역에 있어서 몰랐는데, 졸업하고 알았지, 같은 모임이라는 걸. 그런데 졸업하고, 힘든 일 겪었어요, 도망다니고...이게 무슨 일인가 같이 고민하고, 대책 마련하고, 그러면서 정이 들었어요.

이 대목에서 캠코더 아줌마는 긴장한다. 도대체 무슨 사건일까.

주:(계속)나는 결혼에 대해 별 생각 없었는데 애들 아빠는 2년동안 날 지켜봤대. 한번은 애들 아빠가 나한테 편지를 썼어, 문익환 목사님이 쓴 책을 읽고 나서...거기 보면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라는 내용이 있죠. 문목사님이 젊었을 때 결핵에 걸렸대요. 당시엔 무서운 병이라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데 나중에 사모님 되신 박용길 장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거든요.
그 부분을 보고서 사랑이라는 건 상대방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어야 되고, 자신을 다 주는 거라는 생각을 했대요. 애들 아빠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문목사님이었는데, 그 책에서 '아! 이거다!' 싶어서 청혼한 거죠.

캠:아까 무슨 모임에서 활동했다는데, 학생운동도 한 것 같고, 그런 일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주:결정적인 계기는 두 가진데, 하나는 농활 갔었던 거. 밥 한공기 먹기까지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리는 지 알게 된 것. 둘째는 88년에 사당동에서 철거를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한 거. 이건 뭔가 부당하다, 잘못됐다...분명히 보고 들었죠. 그리고 직접 그 사람들 찾아가 봤는데 집이 다 헐린 그 비참한 상황에서도 다들 위로하고, 공동체로 여럿이 같이 생활하고, 밥도 같이 먹고, 그런 모습이 참 좋았어요.

캠:도망다니고 했던 힘든 일이란 구체적으로?
주:92년 대선때 진보세력을 겨냥해서 터진 조직사건이예요. 간첩 이선실이 어쩌고 하던 기사, 기억나죠? 졸업하고 나서, 아는 선배가 '모임이 하나 있는데, 같이 일하자' 그래서 했죠.
그런데 사건이 보도될 때까지 몰랐지...그 때 <말>지에도 냈는데... 92년 10월혼가 11월혼가에...의문점이 너무 많은거야...대선 때문에 조작해서 억지로 터뜨렸다는 생각도 들고...그 땐 도망다녀서 안잡혔는데, 95년 8월에 직장생활 잘 하다가 잡혔죠.
한 10명 같이 (구치소에) 들어갔나? 비슷한 시기에 수원 쪽에서 10명 들어가고...두 세명씩 그런 식으로 지역마다, 건수 올리는 식으로 많이 잡아갔어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을, 단지 진보적인 모임이나 단체에서 활동한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진짜 간첩단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청나게 엮어서... 지금은 다들 풀려났어요.

사실, 그이는 만난 지 10년도 넘은, 한 학년 아래 대학후배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나는 88년 가을에 학교를 떠났다. 몇 년간 서로 연락이 없었으며, 최근에 다시 만나 어쩌다 가끔 안부를 확인하는 정도였기에 이런 사연은 몰랐던 것이다. 간첩 이선실과 관련된 사건이었다니...

옥고를 치른 건 얼핏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내게 정확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당시의 그 사건이 너무 엄청났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아무도 본 적도 없고, 그 뒤로 언론에서 입을 다문 간첩, 이선실.

캠:그 당시 그 사건의 명칭은?
주:우린 '애국동맹' 사건이라고 하고, 그쪽에선 '조선노동당' 사건이라고 하죠.
(여기서 '그쪽'이란 당시 '안기부와 언론'을 통칭하는 듯.)

캠:다들 풀려난 후,관련된 사람들의 모임은?
주:있었어요. 잡혀 들어간 사람들 후원하자고 해서 후원회 모임이 있다가, 다들 사느라고 바쁘고...또 사건 정리가 제대로 안됐어요. 그래서 생각이 다 제각각인거야...또...고문도 당하고 했으니 피해의식도 있고... 사람들이 다 나오고 나니까 모임이 잘 안되네요. 연락은 가끔 하고 돌잔치에 얼굴도 보고 하는데, 지속적인 모임은 잘 안되지. 계모임이라도 하자고 말은 있는데, 사느라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나이는 들었지,기술은 없지...지금 뭘 하려고 하니까 힘든거야...뭘 해도...맨바닥에 헤딩하는 거죠.

아이들과 함께 포근한 얼굴이던 그이는 갑자기 안색이 흐려진다. 이쯤에서 인터뷰의 애초 의도로 선회해 보자, 애써 질문을 총선으로 돌려본다.

캠:그 이후 많은 변화, 정권도 바뀌고 이제 총선 앞둔 지금, 정치에 대한 생각?
주:정치에 대해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행동한 것 같지 않아요. 고민은 많이 했지만, 기존의 교육도 주입식, 학생운동도 선배들의 주입식 교육이니까 내 스스로의 시각을 못 가졌죠. 학생운동하기 전에는 몰라서 뭘 못했고 운동할 때는, 뭔가 알기는 아는데, 정확하게 아는 것 같지 않고...설익은 콩처럼 살았지.

설익은 콩, 그래 나도 한 시절을 그렇게 마구 튀어다녔지. 캠코더 아줌마, 오늘 무지 우울해진다.

주:(계속)예나 지금이나 정치적 무관심은 똑같애. 너무 환멸스럽구...바뀐 건 하나도 없지 않아요? 사는 건 더 힘들지...위에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옷만 바꿔입었지, 어떤 점에선 옛날보다 더 문제가 많아요. 장기수 선생님들 내보냈다고는 하는데, 송환 문제나 생계문제나 아무런 대책없이 풀어놓기만 하고, 무슨 큰일 한 것처럼 그러면 안되지. 0.75평 그 좁은 데다가 몇 십년씩... 세상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알면 기절할 일을 이제껏 해놓구선...장기수뿐 만 아니라 감옥에 갔다 온 모든 양심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죠.
우리 관련자들 중에는 두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요. 한 사람은 92년, 한 사람은 97년에 들어갔다 나왔는데...피해망상증...심하게 맞아서...문제가 심각하다구요, 지금, 더 가슴이 아픈 건...고문 피해를 입으면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아무런 피해보상도 없고...정신질환은 완치가 안되잖아...평생 상처를 안고 살아야되는데,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작은 거라도 일할 수 있도록 받아줘야 되는데, 계속 내치고...가정생활도 안되고...직장은 꿈도 못꾸고...그런 사람 정말 많을 텐데...속상해, 마음 아프고...김대중 대통령도 고문많이 받았다면서 이러면 안되죠.
대학 때는 뭔가 잘못된 게 있으면, 내가 먼저 일어나면 뭔가 바뀔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분노가 있어도, 잘못된 것을 알아도, 내가 아무런 힘이 없구나...완벽하게 깨지는 거 밖에 없구나...그런 생각이 들죠.
그 사람들(감옥에 갔다온)은, 다른 사람들이 앞서나간 동안 퇴보된 걸 만회하려고 몸부림 치고...그러는 동안, 사람들은 또 더 앞서 나가고...그러면서 우리는 계속 뒤처질 수 밖에 없는 건가 싶고...돈이라도 많이 있으면...다들 먹고 사느라고 힘들고...그래서 마음 아프고...그 사람들 가지고 살 상처들.
저, 정말 후회는 안하는데요, 다들 슬기롭게 잘 극복해서, 세상을 참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나름대로 보람을 가지고......

캠:소위 '386세대' 학생운동권들의 국회진출에 대해서는?
주:나는 탤런트가 노래하고, 가수가 연기하는 것도 맘에 안들어. 하나라도 똑바로 하라 그래요. 노래하는 가수가 립싱크하는 것도 싫어. 노래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마찬가지예요. 그 사람들이야 말로 그 당시 노동자들 농민들을 지금 팔면서, 자기 하나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 배를 탄거지, 뭐...아무리 자기 합리화를 해도 어차피 근묵자흑 이라고, 다 기존 정치인들한테 물들거야.
노동자당이 힘을 키워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에 그 사람들이 나서면 얼마나 좋아요? 기존 여당이나 야당에 들어가서, 기존 정치인들하고 같이 정치하려고 하는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요.
민중당 생길 땐 시기상조였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시민운동도 많이 성장했고, 깨어있는 많은 시민들이 거기다 힘을 실어주고 하면, 기존 여야를 뒤집는 사건이 생길 수 있지 않나요?
그리구...지금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정권을 가진다 해도... 권력이라는 본질 자체가 사람으로 하려금 끝없이 욕망을 가지게 하니까 기존 정당의 진보적인 사람이 당선되거나, 진보정당에서 당선한 후보가 있다고 해도, 시민운동단체에서 계속 끝없이 각인시키고 각성시켜야 되겠지요.

캠: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에 대해서는?
주: 참신하고 좋았죠. 아, 그래 우리가 사람을 고를 수 있구나, 우리에게 그럴 권리가 있구나......환기시켜 줬으니까. 그런데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일을 맡아서 희생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걸 같이 나눠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여럿이 함께 해 나가면, 힘도 덜고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니까...그게 시너지 효과죠?
총선시민연대나 시민운동 단체가 동네마다 소규모로 모임이 생기면 좋겠어요. 주부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지역마다 생기고 아줌마들이 참여하면, 우리나라도 정치의식 수준이 많이 높아질텐데......
낙선 낙천 이런 시민운동을 보면서 기획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고, 사람들이 즐기고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개발되었으면 좋겠어요.

캠: 이번에 투표할 건가? 투표할 수 있나?
주: 김대중 대통령 당선 이후에 복권이 되어서, 이번에는 꼭 투표하고싶은데. 그 날 부산에서 시누이 결혼식이 있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낙선운동하는 사람도 있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표 행사니까.

캠: 후보선택 기준은?
주: 그 사람이 해왔던 일, 앞으로 하겠다는 정책 내용. 됨됨이를 파악하고 싶은데...참고할 만한 자료가 필요해요. 약력이나 업적만 가지고 판단하려니 좀 아쉽죠.

캠: 인터넷상에서 많은 자료들이 있는데?
주: 애들 때문에 컴퓨터 켤 시간도 없어요. 신문도 겨우 보니까. 많이 보진 못했지만, 인터넷방송이나 인터넷 신문,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돈이나 권력에서 자유로운 언론의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대안 언론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는 점심을 먹었다. 아이들의 조잘거림과 칭얼거림을 일일이 받아줘 가며 한 시간에 걸친 식사를 마쳤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평화가, 이 일상의 당연한 듯한 질서가, 결코 당연하게 누려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그 누군가의 고통과 상처 속에서 자라는 어떤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내가 감히, 오마이뉴스의 첫 기사에서 커밍아웃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이 사회 어딘가에는, 단지 남들이 생각만 하는 일을 말로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남들이 말로만 떠드는 일을 몸소 실천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도 모르는 마음의 병을 평생 짊어져야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이웃들 중 누군가는 그렇게 생의 빛나는 순간을 차압당하고,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다.

과연 내가 몇 줄의 기사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돌아오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총선이 끝나면, 아니 오늘 들은 이야기를 담담하게 기록할 준비만 되면, 92년 그 사건과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이젠 그들이 세상을 향해 외칠 차례다, 나 아직 이렇게 살아있다고, 시퍼렇게 두 눈 못감고 아직은 살아있다고. 좀 더 부지런해 지자. 그들의 진정한 커밍아웃을 위하여!

예고: 오마이총선 제3탄에서는 다시 소박하고 평범한 이웃들의 총선이야기로 돌아갑니다. 홍대 앞 노점상들이 말하는 총선, 기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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