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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졸업식이었다.
꽃 다발 하나와 졸업장과 3년 개근 상장이 내게 온 전부.
내가 무엇을 바라는가 ?
칠판에 공납금 미납자로 내 이름은 늘 끝까지 매달려 있었던 학창 시절이었고, 공부를 잘 한 것도 아니었으니…
사람 가득한 교정이 내게는 텅 빈 고독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교과서 한 권 안 사고 중국제 만년필 " 영웅"을 사서 썼다.
파카와 비슷한 디자인에다가 촉의 감촉도 거의 같았지만 파카보다 아주 쌌지,아마.
강의 노트를 "영웅"으로…
그때는 모나미 볼펜이 널리 보급되어 만년필을 쓰는 동급생이 없었을 때
지금도 만나는 친구는
“ 너는 그때부터 만년필을 쓰더라. “
하고 기억해줄 정도였으니
대학 캠퍼스에서 글 쓰는 친구끼리 만년필 이야기를 어쩌다 할 적에 정 비석선생은 파카로 쓰지. 김 소운선생은 뭐라더라. 했던 파카만년필은 아직 손 닿지 못할 곳, 길가 만년필 가게의 전시장 속에 꿈처럼 아득해 보였다.

학교 졸업하고 취직하기가 그때도 지금 대학생 처럼 엄청 어려웠을 때 ROTC 소위로 임관했다.
봉급 실수령액이 돈 만원 겨우 넘을 때 파카 75가 만 삼천원 하여 얼마나 벼루기를 했던가
내 손에 올 때까지.
경리단 근무 때 같은 과 군속 아가씨가 총각 소위의 만년필을 위해서 수실로 꼼꼼이 집을 떠 줄 만큼 만년필은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서 값 나가고 아끼는 물건이었다.
아가씨를 좋아 했지만 사랑하지 않았듯 어느 날 파카는 나를 떠났고 나는 그 아가씨를 잊었건만 아직도 기억하면 이제 쉰의 나이가 됐을 아가씨 때 그녀의 미니 스카트가 아래 젊음이 왜 이리 생각나는지.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 생활할 때 바로 위에 있던 K차장이 어느 날
" 황대리, 몽브랑 있나?"
"몽브랑요? 빵 가게인가요?"
나는 거리의 어느 구석에서 빵 가게 이름으로 '몽브랑'을 본 듯 하기도 했다..
"...알았어."
잠시 뜸을 들이더니 K 차장은,
"쓰던 것이기는 하지마는 몽브랑을 가저다주지."
(웬 빵을 가저다 준다니...)
(쓰던 것이기는 하지마는...쓰던 것?= 먹다 남은 것?)

그 다음날, K차장은 틀림없이 몽브랑을 내게 주었다.
정말로 쓰던 것이기는 하지마는 내게는 지나치게 좋은 몽브랑 만년필이었다.
윗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무언가 줄 때 무슨 까닭이 따로 있을 리가 없이 그냥 상대방이 좋아서 줄 따름.
아랫 직원이 윗사람 맘에 들 때 가끔 있는 일인가?
윗사람에게 받아 보기도 처음이었으니 나중에 '몽브랑'이라는 만년필이 대단한 물건일 줄이야. 그때는 몰랐다.
만년필 제작사 중에서 세계의 5걸 중 하나라지만 촉은 굵지 맵시는 투박하지
몽브랑이 유명한 이유를 도저히 알 수 없어. 내 취향에는 맞지를 않아.
그것을 준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느끼며 이따금 만져볼 밖에 ...

그러다가 사우디 아라비아로 일 나갈 무렵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외제 물건이 그곳의 알코바 상가에는 넘쳤다.
휴일의 한 때를 하릴 없이 시장 거리를 오가다가 문방구를 들여다 보면 '몽브랑' 금장이 번쩍 번쩍.
엄청난 값으로 감히 바라다 보기만 하고 저것도 진열장안의 환상이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년간 취업을 마치고 귀국을 했다.
직원중 하나가 아주 드물게 몽브랑 만년필을 사가지고 쓰는 이가 있었다..
흔히 보는 몽브랑이 아니었다.
어딘가 고고하고 깔끔한 금장의 원통형에다가 세로줄 태깔 곱고 쪽 빠졌다.
"과연...몽브랑이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났다.
몇 줄의 글을 쓰니 글씨가 써지는 느낌이 뭔지 다르다 달라.
그러나 봉급에서 몇 달 용돈을 모아야 구할 수 있는 물건이고보니....
나에게 몽브랑을 보여 주고 난 그 직원의 자살 소식을 몇 달 뒤에 듣고는 마음 한 구석에 (자식 , 죽으려면 만년필이나 내게 주고 가지)하는 모진 생각과 어느 누가 유품을 챙기다가 그 만년필을 제 것으로 만들려니 하는 생각을 하니 못내 서운했다.

그 생각이 마음 끝에 매달려서 나는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막역한 직원에게 기여히 청을 넣어 만년필을 구해달라고 부탁을 해서 그 물건이 내게 오자 늘 와이샤쓰 주머니에 꽂고 지냈다.
책상머리에서도 손에서 떼어 놓지를 않았고 노트마다 몽브랑 촉이 넘실대던 어느 날 만년필을 떨어트려 펜촉이 쓸 수 없을 정도로 휘여 버리니 그 놀라움!!.
내 손으로 필 도리가 없었다.
80년도의 거리에는 만년필 고치는 사람을 눈 씻고 찾아야 보였다.
어렵사리 을지로입구 지하 상가 만년필가게에서 아쉽게나마 손을 보니 펜촉은 휜 자국이 분명한대로 고쳤으나 글씨를 쓰는 데는 약간의 다른 느낌으로 섭섭하고 껄끄럽다.
새 촉을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다고 하니 희소가치가 있는 만년필은 위험 부담이 휘소가치에 비례한다.
지금은 몽브랑 AS에서 손보기가 되니 세월 좋아졌구나.
이제 몽브랑을 갖고 몽브랑 걱정까지 하게 되었다.
개울가 돌맹이에서 꿈꾸던 물나오는 연필을 생각한지, 25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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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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