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01 18:10최종 업데이트 24.07.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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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83년의 <7사단 헌병대의 수사기록>, 2002년 발표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조사 결정문>, <국방부 과거사규명위원회의 조사기록> 1994년에 펴낸 '한영현열사 추모사업회'의 추모자료집 <부활하라 녹두꽃의 상흔이여>, 한영현의 한양대학교 동기 사학과 81학번 이문범님의 증언 등을 참고로 하여 한영현님의 죽음을 앞둔 과정과 고뇌를 재구성했습니다. [기자말]

한양대학교 시절 한영현님의 모습. ⓒ 한양대추모사업회

 
"조금 더 참으면 안돼? 알았어, 그러면 빨리 볼일 보고와."

분대장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한영현은 대원들이 쉬고 있던 텐트를 빠져나왔다. 새벽부터 하늘은 찌푸리더니 아침 식사를 앞두고 기어이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영현은 한동안 등줄기로 빗물을 받으며 스무 걸음 정도 옆의 참호를 바라봤다. 그는 주머니 속의 실탄을 확인하고 참호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한영현이 제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에 배치된 건 1983년 5월 9일. 그는 한양대 정밀기계과 3학년에 다니던 1983년 4월 2일, 느닷없이 군대에 끌려갔다. 그가 군대로 들어가는 과정은 납치와 다를 바 없었다. 대한민국 병역법에서 정한 징병절차는 신체검사 20일 전에 본인에게 알리고 입대 45일 전에 입영명령서를 전달하게 되어있다. 현역 판정을 받아 보충대에 입소해도 다시 한번 정밀검사를 통해 복무에 적합한지를 가려낸다. 한영현은 이 모든 과정이 생략되었다. 헌법이 정하는 적법절차가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한영현은 1983년 2월 성동경찰서에서 조사받고 나온 후 지도휴학을 당했다. 말이 지도지 강압이었다. 그의 학적변동은 곧바로 병무청에 통보되었고 거주지 관할인 동대문경찰서는 서울시경의 지시에 따라 그를 연행, 7사단 신병교육대에 밀어 넣었다. 한영현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군대생활을 위한 마음의 준비도 못한 채 군복을 입었다.

그의 잘못이라면 한양대의 민속문화연구회에 들어가 탈춤에 마음을 뺏긴 것뿐이다. 하나 더 꼽자면 부천에서 노동야학의 선생으로 노동자에게 국어와 영어를 가르친 일일 게다.

참호 앞에서 만난 개망초꽃

참호 쪽으로 이어진 능선길은 비에 젖어 흥건하고 비탈 가득한 소나무도 후줄근한 모습이다. 다른 부대는 아직도 훈련 중인지 인근 산자락에서 총소리가 이어졌다. 한영현이 군홧발을 옮길 때마다 수풀에 매달린 물방울이 무릎을 적신다. 그는 참호 앞에 이르러 서너 송이 개망초를 보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 공과대학 앞 화단에도 요놈이 널려 있었지, 밝은 노란색에 마음이 들떴는데. 이렇게 높은 곳에도 피는구나..."

1981년에 시작한 대학 생활, 한영현은 행복했다. 자신에게 이런 세상이 주어질지 몰랐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수감 중, 4형제만 덩그러니 남아 살아왔다. 종로구 낙산 줄기를 따라 부스럼처럼 판잣집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동네였다. 감옥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당숙이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정리했다. 거기서 다달이 18만 원을 보내주면 그 돈으로 4형제가 먹고 쓰고 학비를 냈다. 어떻게 중고등학교를 마쳤는지 신기할 뿐이다.

한영현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한양대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1학기 끝 무렵에 들어간 민속문화연구회에서 만난 탈춤, 신세계였다. 선배들에게 배우는 것만으론 성이 안 찼다. 양주별산대놀이, 봉산탈춤, 북청사자놀음을 익히려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한영현은 특히 통영과 고성에서 내려오던 오광대놀이에 빠졌다. 양반을 향한 신랄한 풍자, 말뚝이가 보여주는 신명이 그를 사로잡았다. 광주에서 수천의 민중을 학살하고도 뻔뻔스레 권좌에 앉아 있는 전두환을 비꼬는 데 오광대놀이는 안성맞춤이었다. 한영현은 오광대의 춤동작도 사랑했다. 양팔을 치올리고 하늘을 가를 듯, 땅을 내칠 듯하는 팔 동작, 무릎을 곧추세워 힘차게 발을 내딛는 큰 걸음, 거기에 어우러지는 날라리와 꽹과리. 그는 광주항쟁 마지막 날 도청을 사수한 시민군의 기개와 이 춤이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뜻은 민속예술에 자체에 충실하자는 '민속문화연구회'의 기존회원들과 부딪힌다. 3, 4학년 선배들은 1982년, 학교와 짬짜미가 되어 '민속예술연구회'란 이름으로 새로운 탈반을 만들고 등록 절차를 밟았다. 한영현은 현정길 등 남은 회원을 추슬러 '민속문화연구회'의 재등록을 추진했으나 학생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82년 당시 한양대를 비롯해 대부분의 대학에서 서클의 등록 요건이 까다로웠다. 최소 50명 회원에 지도교수가 있어야 하고 1년마다 재등록과정을 밟아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학생처의 심사를 통과하는 것. 당시 한양대에서 '사회철학연구회'란 서클이 신청을 했으나 이름이 불순하다고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학생처는 보직교수를 포함, 보안사, 경찰, 안기부와 의견을 나누며 일선에서 학생을 사찰했다. 한영현과 현정길이 '민속문화연구회'를 민중탈반으로 탈바꿈시킨 사실을 학생처는 파악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서클 재등록이 안 되었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이름하여 언더탈, 비공개 탈반을 만들고 회원을 모았다. UNSA 같은 공개 서클에 들어가 동지가 될 학우를 물색했다. 학교 담장을 뛰어 넘어 다른 대학과 연합탈 활동에도 나섰다. 한때는 덕성여대에서 오광대놀이 강사를 한 적도 있었다. 힘들어도 행복했다. 탈춤에 대한 이런 열정 때문에 그는 어느 순간 성동경찰서가 주목하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게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참호 안은 어둑신했다
   
한영현은 개망초에서 눈을 거두고 참호 안으로 들어갔다. 양팔을 뻗은 것보다 폭이 조금 넓고 안으로는 두세 걸음, 장병 두셋이 들어가면 어깨가 부딪히는 크기다. 빗줄기 사이로 아침 햇살이 은은하게 들어왔으나 안은 어둑신했다. 멀리서 우레 소리가 포소리에 실려 들려온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있는 M-16을 확인했다. 한영현은 고참 대원 하나가 M-16을 텐트에서 가까운 이 참호에 놓아둔 것을 눈여겨 봤었다.    

1982년 12월 2학기 말 시험을 앞둔 어느 날, 느닷없이 한양대 학생회관 앞에 많은 학생이 모였다. 1983년부터 공대를 반월로 이전한다는 정보가 학생들에게 전해지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전 반대를 외쳤다. 공대는 한양대의 상징이기에 전교생이 흥분했다. 삽시간에 모여든 학생은 2000명이 넘었고 시위는 3시간 넘게 이어졌다. 학생운동의 변방이었던 한양대학교, 70년대에는 '유신대학'이라고 손가락질받고 80년 서울의 봄에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던 한양대에서 일어난 '사태'에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성동경찰서에도 비상이 걸렸다.

한양대 학생운동권도 이 자연발생적인 시위를 보고 놀라면서 내심 반겼다. '공대 이전' 반대 시위를 한양대 학생운동의 발전 계기로 삼고 싶었다. 공대 이전 이슈를 계속 살려 나가기로 하고 "학기말 시험이 끝나면 모이자"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겨우 100장 정도 화장실에 뿌려졌다 금방 수거되었지만 성동경찰서는 긴장했다. 2월 10일부터 3월 4일까지 조금이라도 꼬투리가 있는 학생을 무조건 잡아들여 조사를 벌였다. 83년 신학기를 앞두고 한양대 학생운동을 사전 제압하는 의미도 있었다. 이때 민속문화연구회 재등록 건으로 주목을 받은 한영현도 수사선상에 오른다. 성동서는 거주지가 불분명한 한영현을 붙잡기 위해 여자 친구의 졸업식에 잠복하거나 고등학교 동창의 집을 수색해 마침내 한영현을 연행했다.

집중 조사를 받은 한영현은 A급 문제 학생으로 분류되고 '특별동향관리카드'에 이름이 오른다. 이 카드는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한영현의 죽음을 조사할 때 서울경찰청 정보기록보관실에서 발견됐다. "전 민속반원으로 회원에게 의식화 수련을 주도한… 대정부 불만 포지자"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한영현은 이렇게 A급 분류를 계기로 학교 당국에 의해 강제 휴학을 당하고 군대에 끌려가고 만 것이다.

이 강제징집은 1981년 4월 2일 전두환이 주영복 국방부 장관에게 "소요 관련 학생들을 전방 부대로 입영 조치하라"고 내린 지시에서 비롯되었다.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을 겪은 학생운동은 정권에 위협이 될 정도로 성장했다. 대학마다 '광주학살 원흉 처단하라'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의 촘촘한 감시망을 뚫고 전투경찰의 최루탄 세례에 맞섰다. 종교계도 재야도 아닌 학생운동이 전두환 내란 집단에 가장 두려운 세력이 되었다. 전두환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방안을 궁리하다 마침내 국방의 의무를 악용하기로, 군대를 감옥으로 써먹기로 작정한 것이다.

지시가 떨어지자 정부 부처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국방부가 중심이 돼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안)'을 세웠다. 경찰은 A, B, C 등급 등으로 분류된 학생을 연행했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이들을 최전방부대로 보냈고 문교부는 강제휴학 조치로 이를 뒷받침했다. 불법, 무법 천지였다. 마치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의 '최종 해결책'을 지시했을 때 나치의 모든 조직이 동원되어 체포, 이송, 가스실 감금, 사체 처리를 하는 양상과 다를 바 없었다. 정치적 반대 진영, 학생운동 진영에 대한 체계적인 제노사이드, 국제 사회에서도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강제징집은 1981년 230명, 1982년 371명이었다가 1983년 들어서는 무려 461명이나 될 정도로 극심해졌다. 1983년이 되면서 전국 대부분의 대학에서 지휘 체계와 동원 체계를 가질 정도로 학생운동이 눈부신 발전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해에 포문을 연 것은 성균관대의 3·22 시위, 주동자가 10명이나 될 정도로 강력한 학내 시위였다. 이 소식은 대학가를 강타했고 경찰에 비상이 걸렸다. 치안본부는 3월 말 산하 경찰서에 긴급지시를 내려 관할 내에 거주하는 문제 학생을 즉각 연행, 군부대에 처넣도록 했다. 1983년 4월 2일 많은 학생이 한꺼번에 군대에 끌려가는데 한영현도 이 무리에 포함되었던 것이다.
   

강제징집으로 끌려가 숨진 이들. 오른쪽 끝이 한영현이다. 왼쪽 위부터 김두황(고려대 80학번), 최온순(동국대 81학번), 김용권(서울대 83학번), 이진래(서울대 77학번), 최우혁(서울대 84학번), 한희철(서울대 79학번), 이윤성(성균관대 81학번), 정성희(연세대 81학번), 한영현(한양대 81학번). ⓒ 강제징집·녹화·선도공작 진실규명추진위원회


청자 담배 한 개비에 불을 붙이고

M-16이 놓여있음을 확인한 한영현은 바닥에 앉아 청자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참호 안이 잠시 환해지더니 금세 어두워진다. 그는 깊게 한 모금을 마셨다. 빗물이 들이쳤는지 바닥이 축축하고 버려진 건빵에서 올라오는 듯 곰팡내가 역했다. 옅은 빛을 등에 업은 실지렁이 두어 마리가 꿈틀댄다. 한영현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담배 끝을 골똘히 쳐다보았다. 

성동경찰서 정보과장과 이형구 형사가 7사단 신병교육대까지 찾아온 건 4월 15일이다. 공대 이전 시위로 된서리를 맞은 성동서는 새 학기 초인 3월 28일 한양대 교내에 '광주학살 원흉 전두환 처단'을 내건 유인물이 뿌려지자 또 다시 긴장했다.

한양대가 있는 곳은 서울 동부 지역의 관문. 서울시경은 한양대에서 공대 이전 반대 시위가 벌어졌을 때 성동서를 강하게 질책했다. 담장 옆으로 한양여대가 있고 한달음이면 갈 곳에 세종대학교와 건국대학교가 있어, 불씨가 서울 동부 지역 전체로 번질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성동경찰서는 2월 10일부터 3월 14일까지 문제 학생을 어느 정도 솎아냈다고 자신하던 터에 허를 찔리고 만 셈이었다.

유인물 배포 이후 학교 사정은 날로 뒤숭숭했다.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분위기, 이 사태를 수습하려면 한양대 운동권의 핵심, 지도부를 잡아야만 했다. 성동경찰서 정보과장은 한영현을 떠올렸다. 성동서는 그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점을 이용해 장학금을 지급하며 망원으로 활용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한영현이 돌연 군대에 끌려가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던 터였다. 하지만 그를 어르거나 옥죄면 핵심 정보를 얻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7사단 신병교육대를 찾아갔다.

한영현은 군대까지 찾아온 성동서 정보과장의 모습에 당황했다. 정보과장은 "협조하면 군 복무 기간이 단축될 수도 있다"며 한영현을 꼬드겼다. '거부하면 보안사에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을 수 있다'고 암시했다. 강제입대하면서 한영현은 보안사의 조사를 제일 두려워했다. 한영현만이 아니라 군대에 끌려간 대학생이 모두 이 공포에 시달렸다. 숨을 곳도 도망갈 곳도 없는 군대, 가족과 친구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고 변호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그야말로 도살장에 갇힌 어린 양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영현은 보안사의 안내를 받아 군에까지 온 정보과장, 이 자가 어떻게 입을 놀리느냐에 따라 향후 자신이 받을 보안사의 수사 강도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에 몸이 파르르 떨렸다. "한영현, 고마워. 휴가 나오면 경찰서로 한번 놀러와," 정보과장은 이야기를 마치자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는 눈치였다. 한영현은 한사코 마다하며 그를 돌려세웠다. 연병장에서 터져 나오는 고함을 배웅 삼아 그들은 영문을 빠져나갔다. 함께 따라온 보안사 대원도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며 떠났다. 한영현은 어깨를 늘어트린 채 소대로 돌아가며 자책했다. 내가 너무 많은 말을 늘어놓은 게 아닌가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저 멀리 날아가고 싶은데 연병장을 에둘러 담장이 높았고 그 위로는 철조망이 몇 겹이나 쌓여 있었다.

- <'내 탓에 한양대 운동권 쑥대밭' 그는 실탄을 꺼냈다>(https://omn.kr/299dl)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1) 문교부는 1982.12. 8일 「1983년도 학원대책」을 수립하여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응책으로 '소요사태 관련자 엄중처벌'을 언급하면서 "관련 서클은 해체 또는 활동 정지시키고, 관련 학생은 중징계 및 군 입대조치 한다"는 방침을 만들어 시행했다. 이는 1983년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 아니라, 1981,1982년에도 마찬가지였다.
2) 한영현에 관한 경찰의 카드는 두매인데  첫 번째는 1983년 3월 12일 자로 작성되었다. 기재내용은 "전 민속반원으로 회원에게 의식화 수련주도 및 근로청소년의 야학필요성을 주장해오며 3차 성적불량 학사경고처분자로 의식화 및 대정부 불만 포지자' 이다. 관리자는 성동서 순경 김정식, 확인자는 경정 김광룡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3) 지도휴학제도는 1980. 2.29. 대통령(최규하)의 복권⋅복학조치와 함께 폐지됐으나, 전두환(합수본부장)이 1980. 5. 3. 계엄사령부에 <학원소요 문제점 및 대책 강구>를 지시한 바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고 국보위를 설치하여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후 1980. 7. 15. 지도휴학제는 부활되었다. 1981년 1학기 동안에만 운동권 학생 1727명을 선별 지도했고, 112명을 제적시켰으며, 86명을 강제 휴학시킨 후 59명을 징집 조치했다.
4) 문교부작성 <1983학년도 학원대책> 12쪽에 "1983년 1학기 동안 264명을 징집 조치했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특히 4월 2일 전후한 시기, 1학기를 앞둔 3월말과 4월초가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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