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7.01 18:10최종 업데이트 24.07.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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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83년의 <7사단 헌병대의 수사기록>, 2002년 발표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진상조사 결정문>, <국방부 과거사규명위원회의 조사기록> 1994년에 펴낸 '한영현열사 추모사업회'의 추모자료집 <부활하라 녹두꽃의 상흔이여>, 한영현의 한양대학교 동기 사학과 81학번 이문범님의 증언 등을 참고로 하여 한영현님의 죽음을 앞둔 과정과 고뇌를 재구성했습니다. [기자말]

대통령 재임 당시 국무회의 주재하는 전두환씨.1984.10.23 ⓒ 연합뉴스

 
- <'납치'되어 군에 끌려간 탈춤을 사랑한 한양대생>(https://omn.kr/299dm)에서 이어집니다.

정보과장이 다녀가고 과연 보안사가 언제 부를까 한영현은 하루하루 살얼음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는 간절히 빌었다. 제발 평온하게 군대생활을 마치게 해달라고. 하지만 한영현은 4월 20일 7사단을 담당하는 207보안부대로 끌려간다. 거기서 무려 일주일 동안 한영현은 고통받았다. 물론 영장 없는 연행이고 구속절차를 밟지 않았으니 불법 감금이었다. 그러나 항의할 수도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이 또한 전두환의 지시에서 비롯되었다. 강제징집된 대학생은 병영 내에서도 저항을 이어나갔다. 화장실 낙서가 대표적인 투쟁 방법이었다. 이는 보안사가 전두환에게 1982년 전반기 업무보고를 할 때 이슈가 되었다. "강제 징집자가 많아지면서 병영 분위기가 나빠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전두환은 당시 대공처장인 최경조에게 "야, 인마 똑바로 해"라고 질책한다.

이날 이후 보안사는 강제징집자에 대한 별도관리 대책에 착수, 최경조의 지휘 아래 1982년 11월 17일 <특수학적변동자 심사 및 순화계획>을 세웠다. 또 전담부서로 5과, 즉 심사과를 만들고 서의남 중령을 책임자로 앉힌다. 이렇게 계획과 조직을 정비한 뒤 1982년 말부터 학생운동 입대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심사·순화·활용작업을 벌였다.

보안사는 심사와 순화를 한다며 '특수학적변동자'라고 붉은 도장이 찍힌 서류철을 들고 나타나 생각과 신념을 바꾸라고 강요했다. 이를 위해 보안사는 심사 장교를 급하게 육성했다. 고시 출신이거나 명문대 출신의 입대자를 심사 장교로 채용하고 이들을 사령부 직속 진양분실과 과천분실 그리고 사단별 보안부대에 배치해 학생운동가를 요리하게끔 했다.

심사장교는 학생운동의 모든 정보를 이 잡듯이 캐물었다. 저항하면 고문을 했다. 이렇게 확보한 정보와 각 대학 학군단에서 올라온 첩보, 대학마다 상주하는 보안사 요원의 보고를 종합해 대학별 조직도를 그렸다. 문제학생의 명단을 작성하고 등급을 매기고 공격 계획을 세웠다. 학생운동을 타깃으로 한 이 작업은 모두 민간인 사찰이고 보안사의 직무에서 벗어난 활동이기에 불법이지만 보안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두환의 특명이 있었고 수많은 조작 간첩을 만든 이력이 있었기에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여겼다.

한영현은 입대한 지 20일도 안 돼, 자대 배치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녹화사업의 대상자가 되고 말았다. 한영현은 심사장교 앞에서 아버지가 수감된 가슴 아픈 사연을 적어야 했다. 형이 어린 시절 병마에 걸려 걸을 수 없는 장애상태인 걸 써내야만 했다. 뿐인가. 그들이 진정 노리는 한양대 학생운동의 현황과 주요인물에 대해 무엇이든 끄적거려야 했다. 한영현은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나름의 진술 전략을 세웠다. "학외 조직인 연합탈과 노동야학은 보호한다, 이를 위해 학내에 공개된 서클 성원을 적어내 보안사의 시선을 흐트러뜨린다"라고.

한영현은 보안사에서 일주일간 고통받으며 가슴이 터질 듯했다.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고함 소리, 수시로 날아오는 주먹, 일주일 내내 잠을 못 잤다. 까무룩 잠이 들어도 겨우 쪽잠, 비몽사몽 중에 몸은 한기에 시달렸고 엄마 얼굴이 무시로 스쳐 갔다. 어떤 고난이 와도 버티려 했으나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마지막 날 한영현의 진술서를 들고 심사 장교는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한영현이 진술한 내용을 보면 이것은 제2의 무림, 학림사건이다"라고 의견서를 썼다. 그는 한영현의 괴로움을 비웃듯 "앞으로도 이렇게 협조하면 좋아, 밥 두둑이 먹고 자대로 돌아가"라고 했다. 또 지프가 올 거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한 후 조사실을 나갔다.

한영현은 순간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다. 머리를 마구 쳤다. 낭떠러지라도 있으면, 내게 권총이라도 있으면, 자신의 뺨을 후려갈기며 자책했다. 한영현, 이 병신 새끼야, 그러고도 네가 운동가냐. 자신의 진술서에 적힌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독교학생회, 운사, 탈반, 언더 서클까지. 아, 그들이 잡혀가면 어떡하나, 이제 겨우 싹이 튼 한양대 운동권, 나로 인해 망가지는 건 아닐까. 가슴이 터질 듯했다. 주먹을 움켜쥐고 허공을 향해 휘두르다가 그는 맥없이 의자에 주저 앉고 말았다.

실탄 한 발을 꺼내고
  

실탄.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합니다. ⓒ 연합뉴스

 

한영현은 바지 주머니에서 실탄 한 알을 꺼냈다. 6월 27일부터 7월 2일까지 적근산 줄기에서 '칠성 83' 훈련이 진행되었다. 한영현은 훈련 마지막 날인 7월 2일 새벽 2시, 분대장의 실탄 한 발을 몰래 훔쳤다. 실탄은 분대장급 이상에게만 지급되기에 한영현은 불침 보초를 설 때 기회를 엿봤다.

다행히 모든 훈련이 새벽 6시에 끝나고 08:30시에 시작된 아침 식사까지 분대장은 모르는 눈치였다. 한영현은 실탄을 꺼내 M-16에 장전했다. 빗줄기는 거셌다. 간간이 번개가 치는지 강렬한 빛이 참호 안으로 들어왔다 사라지곤 했다. 그는 청자 한 모금을 다시 빨았다. 참호 안에 붉은 빛이 감돌다 금세 사그라든다. 한영현은 꼬물꼬물 앞으로 나가는 실지렁이를 응시하다 다시 한 모금을 깊게 들이마셨다. 

한영현에 대한 보안사의 공작은 4월 27일 마친 심사와 순화로 끝나지 않았다. 83년 6월 15일 입대한 지 3개월도 안 된 그에게 7사단장은 돌연 휴가를 주었다. 명목은 사단체육대회 응원 활동에 대한 포상이었다. 하지만 207보안부대의 6월 16일 자 문서에는 휴가 시 임무가 '학원 접촉'이라고 쓰여 있고 서울 충무로에 있는 진양분실에서 지시를 받게끔 되어 있었다. 207보안부대의 이 조치는 한양대에서 5월 9일에 학내 시위가 일어나고 6월 초에 다시 유인물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한양대를 비롯해 동부 지역을 관할하던 보안사 활동관은 이 상황을 보고서에 담았을 것이다. 결국 포상휴가를 빙자해 첩보활동을 지시한 것이다.

한영현만이 아니라 강제입대 당해 1983년 5월에 죽은 성균관대생 이윤성도 이 같은 보안사의 지시를 받았다. 녹화공작 중 가장 악랄한 프락치 활동, 사실상 간첩 활동을 강요받은 것이다. 강제징집이 강제납치, 강제구금으로서 규탄받아야 하지만 프락치 공작은 더더욱 인도에 반하는 범죄였다. 전쟁 시에도 포로로 잡힌 적군을 간첩으로 만들어 정보전에 활용하는 것을 인류 사회는 전쟁 범죄로 규탄한다. 왜냐하면 포로가 자신이 속했던 민족, 부족, 형제 자매를 대상으로 공작 활동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프락치 활동 요구가 바로 이랬다. 학생운동 조직에 몸 담았던 이들에게 친구와 선후배를 배반하게끔 하는, 간첩 노릇을 하게끔 하는 공작이었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를 고문해 밀정으로 삼은 악랄한 범죄, 국제 사회에서도 반인도적 범죄로 꼽히는 짓을 어린 학생에게 자행한 것이다.

한영현은 휴가 기간 내내 보안사의 감시를 받고 미행을 당했다. 혹여 한영현이 변심할까 혹은 보안사의 공작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이라도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일일보고를 압박했다. 한양대의 현황만이 아니라 야학을 같이 한 사람의 동향 파악도 요구했다. 성동서 형사들도 한영현의 휴가 소식을 듣고 얼굴을 비추라고 보챘다. 한영현은 어쩔 수 없이 학교의 후배와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는 이미 후배의 편지를 통해 자신의 진술이 학내 조직에 미친 영향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주 앉아 얘기를 듣는 건 고역이었다.

"형, 언더 탈반의 팀방이 털렸어요. 82학번이 죄다 조사를 받았고요."
"현정길이 구속된 건 알죠? 앞으로 헤쳐갈 길이 막막해요."

여관이었던가. 벽지는 뜯어지고 형광등이 푸르딩한 방안에 담배꽁초는 수북하고 빈 병이 늘어만 가는데 한영현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자리를 박찰 수도 없었다. 보안사에서 한영현이 한 진술은 파장이 컸다. 줄 지어 연행이 이어지고 학내 조직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가 신병교육대에서 성동서 정보과장에게 한 진술이 몰래 녹음되어 동료들에게 들려졌다. "한영현이 이렇게 말했으니 너도 불어"라며 경찰은 친구들을 압박했다.

휴가를 마치고 6월 21일 귀대할 때 그는 괴로웠다. 7사단으로 복귀하면 진양분실에 보고했던 내용을 207보안부대에도 보고해야 한다. 휴가 때 귀동냥으로 들은 한양대 학생운동의 잔존 실태를 써내야 한다. 거듭 무릎 꿇어야 하고 거듭 배신해야 한다. 그는 21일 밤 늦게 귀대 길에 올랐다. 소주를 병째 거푸 마셔 몸을 가누지 못한 채로.

마지막으로 담배 한 모금을 더 빨았다

한영현은 청자 담배 한 모금을 더 빨고 반이나 남은 담배를 밖으로 총을 쏠 수 있게 만든 구멍의 턱에 올려놓았다. 한 가치 다 태우면 하나 더 피우고픈 마음이 일 것이고 시간이 늦어지면 빨리 볼일 보고 오라던 분대장이 자신을 찾아나설 것 같았다. 한영현은 자신의 명찰과 수첩을 바닥에 가지런히 놓았다. 거센 바람에 갑자기 빗물이 후두둑 들이닥쳐 참호 안에는 서늘한 정적이 내려앉는다. 참호 옆 막사에서 들리던 고함 소리도 잦아들었다. 한영현은 깊게 숨을 들이 쉰 다음 왼손으로 M-16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총구를 입 안으로 밀어넣었다.
  
여러 기억이 스쳐간다. 정겨운 벗들, 무에 그리 할 얘기가 많아 우리는 수많은 밤을 새웠을까? 눅진눅진한 담배 연기 사이로 말간 햇살이 스며들 때야 새벽이 된 것을 알았지. 보안사에 끌려갔을 때, 심장이 내려앉았다. 두려웠다. 방 색깔이 붉은 색이었나, 남산 밑 어떤 호텔로도 끌려갔던 것 같은데. 잠을 못 자 온통 안개처럼 버무려진 기억이다.

형과 동생이 보고 싶다. 아버지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번 보면 좋으련만, 세상 우리 가족만큼 사연 많은 집이 있을까? 사랑했던 그녀에게 간청했다. 나는 이미 동지를 배신했다. 선배와 친구를 팔았다. 그래도 나를 받아줄 수 있느냐고. 오랜 침묵만 흘렀다. 나는 수수깡 같은 다리를 들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선배 하나를 붙잡고 밤새 뇌까렸다. 죽어버리고 말겠다고. 차라리 군에 가서 죽으라고 했지, 물론 용기 내 살아야 한다는 말임을 안다.

살고 싶다. 이 눈부신 청춘을 내 손으로 묻어야 하나. 정녕 살고 싶다. 무기징역을 사는 아버지, 중증장애를 겪는 형을 대신해 내가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 집안 형편을 들어 의가사 제대가 가능한지 물어봤었지. 부대장은 가당찮다는 듯 손사래를 저었다.

학생운동이 나의 존재이유라고 생각했다. 인생의 먼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지만 '혁명가'를 꿈꿨다. 만주 벌판의 초인처럼 형형한 눈빛으로 눈보라를 헤치며 살고 싶었다. 늑대 무리를 벗 삼아 달빛을 등에 지고 백두산을 오르고 싶었다. 보안사가 인생의 큰 패배를 안겨줬으나 다시 일어서면 안 될까, 순백의 혁명가는 이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상처받고 뒹굴며 운동가는 성장하는 게 아닐까? 지금보다 더 깊게 더 단단하게 더 멀리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첫사랑에게도 편지를 했지. 고맙게도 그는 죽지 말고 살아 돌아오라고 했어, 받아주겠다고. 하지만 나의 입놀림으로 선후배, 친구들이 고초를 겪고 한양대 운동권이 쑥대밭이 되었는데, 보안사가 이 정도면 좋다고 나를 놔줄까? 앞으로도 3년 내내 프락치 공작을 시키면 어떡하지. 감당할 수 있을까. 이미 처절한 패배를 했는데… 칠흑 같은 어둠이다. 도대체 빛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오광대 놀이의 춤사위가 눈앞에 스칠 때 한영현은 오른손 엄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참호의 천장으로 한영현의 정수리에서 솟구친 붉은 피와 뇌수가 달라붙었다. 한영현의 몸은 옆으로 기울었고 그의 얼굴로 벽을 타고 내려온 피고름이 한방울씩 떨어졌다.

그 순간 참호 옆 텐트에서 분대장은 "뭐야, 이 소리는... 폭발음인가?"하며 뛰쳐나갔다. 그는 전방을 살피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한영현이 방아쇠를 당긴 참호로 달려갔다. 그의 군홧발 뒤로 목이 꺾인 개망초 몇 송이가 흙탕물 속에 뒹굴었다. 참호안에는 청자 담배가 피워올린 몇 가닥 연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춤을 추듯. 

- <한영현의 죽음 이후 밝혀진 사실>(https://omn.kr/299do)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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