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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고 한강가를 달리다 보면 양화대교 옆에 깎아지를 듯한 절벽 위 묘하게 생긴 봉우리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시민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절두산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지닌 이 봉우리의 원래 이름은 생긴 모양이 마치 누에가 대가리를 치켜든 것 같다 해서 '덜머리' 또는 '잠두봉'이라는 정다운 것이었다.

성당이 자리한 봉우리에 올라서면 주변의 한강일대가 잘 보인다. 경치 좋은 명당자리이기도 한 절두산은 옛날 옛적엔 풍류객들의 놀이터였다니 그럴 만하다. 이곳에 이역만리 아시아의 먼 곳까지 와서 선교를 하다가 이 땅에 묻힌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공원이 차분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계절마다 한 번씩 자전거를 타고 이 공원에 들를 때마다 특별히 신앙이 없는 내게도 종교를 떠난 경건함과 비석에 쓰여진 고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이곳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무덤을 돌며 상세히 설명을 해주는데, 어릴적 국사 교과서에서 보았던 아펜젤러, 언더우드, 베델 등의 친근한 이름들이 우리나라 근대의 역사적 배경과 함께 들려와 귀가 쫑긋 선다. 특히 고인들이 주로 활동하던 때가 19세기 후반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기 전후 격동의 시기인  것에 호기심을 느껴 묘역 관리소에 있는 자료나 책자를 자세히 눈여겨 보게 되었고, 색다른 역사공부를 하게 되었다.

입구의 크고 오래된 나무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 하다.
 입구의 크고 오래된 나무가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 하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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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객들의 놀이터에서 순교 성지가 되기까지

양화진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절두산과 옛날엔 있었던 한강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사신들이 절두산 봉우리에 올라가 구경을 하면서 주변 경치가 중국의 적벽(赤壁)이나 다름없다고 감탄을 했다는 이곳이 순교의 성지가 된 사연은 흥선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사건에서 비롯된다.

1866년 정부에서 천주교 신부들을 처형하자 프랑스 함대가 출동한 '병인양요' 사건으로 외국의 군함 두 대가 그해 9월 수도의 코밑인 이곳 양화진까지 쳐들어오게 된다. (10월에는 일곱척의 군함이 강화도를 점령) 다행히 프랑스 군대는 11월에 중국으로 철수하였고, 이 사건 후 서울 종로와 팔도 각 읍에다가 척화비를 세운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더욱 강행하게 된다.

프랑스 군함이 바로 서울 턱밑인 양화진과 서강 나루터까지 온 것도 물리치지 못한 치욕을 오랑캐가 머물던 자리에서 오랑캐를 끌어들인 천주교도의 피로 씻으리라고 하면서 양화진에서 천주교도들의 목을 베기 시작했던 것이다. 버들꽃 만발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양화 나루터는 이때부터 사형장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이로부터 연유한 절두산이라 이름은 당시의 참상을 지켜보던 민중들이 전해 온 말이라고 한다.  

묘비들의 생김새가 저마다 각기 달라서 묘역의 분위기가 색다르게 다가온다.
 묘비들의 생김새가 저마다 각기 달라서 묘역의 분위기가 색다르게 다가온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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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격동기를 살다간 선교사들의 극적인 삶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에 가보면 우리네 공동묘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든다. 맨 먼저 눈에 띄는 건 다양한 생김새의 비석들이다. 십자가 모양에서 네모 반듯한 묘비가 있는가 하면 울퉁불퉁한 바위처럼 생긴 것들도 있다. 더구나 몇몇 비석엔 심상치 않은 상흔이
있어서 물어보니 6.25 전쟁 때 전투중에 생긴 총탄자국이란다. 지난한 우리 역사의 거친 숨결이 실감날 정도다.

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가 시작된 때는 1890년으로, 처음 묻힌 사람은 존 헤론 (John W. Heron)이라는 분이다. 선교사이자 의사인 헤론은 당시 창궐하는 천연두, 콜레라 같은 전염병으로 마구 죽어나가는 조선사람들을 보다 못해 일선에서 열심히 치료하다가 그 자신이 전염병 이질에 걸려 1890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6.25 전쟁때의 상흔이 남아있는 묘비들도 있어서 안타까움과 함께 엄숙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6.25 전쟁때의 상흔이 남아있는 묘비들도 있어서 안타까움과 함께 엄숙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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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Horace G. Underwood)라고 하면 유명한 의류 브랜드도 생각나고 연세대학교 총장실 앞 마당에 동상이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선 유명한 분이다. 그가 이땅에 와서 맨먼저 한 일이 고아원과 고아학교를 세운 것인데, 그때 언더우드의 보살핌을 받고 양아들이 된 5살의 고아가 후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김규식이다(1881~1950 그는 1948년 남한의 단독 총선거에 반대하여 김구와 함께 북한으로 건너가 남북협상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자 정계를 떠났다).

언더우드는 1895년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당했을 때 고종 곁에서 안전을 지켰고,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빼앗을 때 가장 맹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우리 근대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분이다. 묘지공원에는 언더우드와 부인, 맏아들 내외, 손자까지의 가족들이 모두 함께 있다.

비석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써있는 무덤의 주인은 헐버트 (Homer B. Hulbert)로 한국 YMCA를 창설하여 교육과 계몽활동을 하였다.

1905년 일제의 식민지가 되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미국과 일본의 상호 이권보장인 비밀조약 (가츠라 태프트 조약)을 몰랐던 고종황제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밀사를 워싱턴에 보냈는데 그가 바로 헐버트다. 그는 1907년 이준 등과 함께 헤이그에도 밀사로 파송되었다. 해방 후인 1948년 84세의 고령의 나이에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으로 초대되어 광복된 한국이 보고 싶어 왔다가 불귀의 몸이 되고 말았다.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오후 각 두번씩 자원봉사자들이 방문객들과 함께 묘역을 돌며 안내와 설명을 해준다.
 일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오후 각 두번씩 자원봉사자들이 방문객들과 함께 묘역을 돌며 안내와 설명을 해준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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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들, 낮은자들의 친구

영국의 특파원으로 내한했다가 항일 언론 투사가 된 분도 이 묘역에 잠들어 있는데 바로 베델이다 (Ernest T. Bethel). 1904년 한글, 영문판의 항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맹렬히 비판 규탄하는가 하면, 을사조약 후 고종 황제의 친서를 게재하여 일본의 침략만행을 국내외에 폭로한 사람이다.

1908년 친일 미국인 스티븐스를 쏘아 죽인 전명운과 장인협의 거사를 찬양하는 보도를 낸 후 결국 일제에 의해 상하이로 국외추방을 당하고 일년 후 돌아왔으나 이미 심신에 깊은 병이 나서 37세의 아까운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나는 죽지만 <대한매일신보>는 영생케하여 한국 동포를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양화진 외인 묘지에 묻히는 날 추도시에 참석한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영국인인 베델 씨가 우리나라에 바친 것이 이와 같을진대 어찌 우리가 가만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열변을 토하셨다고 한다.

당시 우리나라에도 인도의 카스트와 같이 양반, 중인, 상인, 천인의 계급제도가 있었다. 천인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인간 대우를 못받는 직업인 중의 하나가 가축 도살업으로 먹고 사는 백정이다. 개척교회를 지은 선교사 무어(Samuel F. Moore)는 교회에서 일반 교인들이 백정들과는 같이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며 교회 출석을 거부하는 일이 생기자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때부터 5백년간 사람 대접을 못받는 이들을 위해 정부에 호소문을 쓰는 등 백정해방 운동에 주력하게 되고 그 덕에 동료 선교사들과 한국인 양반들에게서도 따돌림과 미움을 받기도 하며 살던 중1906년 그만 장티푸스 전염병에 걸려 숨지고 말았다.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 정부의 문화훈장을 받은 사람, 일본이라면 무조건 적대시하던 일제 시대에도 한국 고아의 아버지로 존경 받던 일본 사람이 양화진에 묻혀 있다. 이름은 '소다 가이찌'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에 묻혀 있는 유일한 일본인이다. 그는 청년시절 홍콩, 중국, 대만등지를 방랑하다가 1905년부터 1945년 8.15해방까지 40년간 한국 땅에서 살았다. 그동안 오로지 한국 고아들의 행복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기도 전에 특별히 허락을 받아 한국에 와서 이 땅에 묻힐 수 있었다. 그의 묘비 옆면에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이 지은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언 손 품어주고
쓰린 마음 만져 주니
일생을 길다 말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이어늘

이외에도 고종이 학교명을 지어주었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창설자 아펜젤러 등 150여명의 고인들이 양지바른 이곳에서 안식중이다. 묘역 안내장에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써있던데, 고인들의 삶과 약소국에서의 치열했던 삶을 보니 이분들의 순교는 자유의 씨앗이기도 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묘비석에 새겨진 '무명인'이란 이름들에서 동병상련의 심정이 느껴져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묘비석에 새겨진 '무명인'이란 이름들에서 동병상련의 심정이 느껴져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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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절두산 성당 옆에 있는 무명인 비석들이다. 이름없이 죽어간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무명인"이라는 이름아닌 이름을 새겨넣은 비석앞에 서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당시 이웃 일본이 선비 또는 지식인 중심의 교회로 창설된 데 반하여 우리나라는 천민과 서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가난한 사람과 억눌리고 천대받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천주교를 종교에 앞서 새로운 희망과 개화의 사상으로 마음속에 품었으리라.   

미국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수필집 <나라없는 사람 (A man without a country)>에 칼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유명한 말에 대해 나온다.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등의 독재자들이 자주 활용했던 이 말은 사실 마르크스가 그 말을 했던 1844년 당시, 아편과 아편 추출물은 누구나 복용할 수 있는 유일한 진통제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도 아편을 복용한 적이 있었으며 그는 아편을 먹고 통증이 일시적으로 가라앉자 대단히 고마워했단다. 마르크스는 그저 종교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탄에 빠진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지 그것을 비난하려던 게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창궐하는 전염병과 지긋지긋한 가난, 제국주의 국가들의 간섭과 침략에 시달리며 도탄에 빠졌던 우리나라의 백성들도 그런 심정으로 양화진 묘역에 묻힌 선교사들과 천주교를 받아들였겠구나 싶다.

덧붙이는 글 | - 수도권 전철 2, 6호선인 합정역에 내려서 걸어가도 됩니다.
- 19세기 후반 당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의 생생한 기록과 그들의 수기, 회고록이 실린 책이 있어 추천합니다. <양화진 선교사 열전 (전택부 지음/홍성사)>



태그:#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공원, #자전거여행, #절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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