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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호텔 안의  안뜰. 안뜰은 가운데 연못이 있고, 연못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다.
 전통호텔 안의 안뜰. 안뜰은 가운데 연못이 있고, 연못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차도 마시고 식사도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있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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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내게서 <트레인스포팅>이라는 영국영화는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약에 취해 길거리를 떠돌던 부랑자 청년의 한마디가 가끔씩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텔레비전 냉장고,  남들 갖고 있는 것 다 갖고 싶어. 그리고 아내와 아이와 함께 좋은 가정을 이루고 싶다."

쓰레기처럼 길거리를 굴러다니던 청년에게 어느날 생겨난 꿈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꿈은 중산층의 삶을 누리고 싶다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내가 왜 그 청년의 꿈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느냐면, 청년이 그리는 이상이 바로 자본주의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담한 2층집을 소유하고, 실내는 최신 가전제품과 튼튼한 가구로 채우고, 차고에는 고급 승용차가 한 두 대 서있으며 한 가족이 평화롭게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광경, 아마도 이런 풍경이 자본주의의 이상향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의 이상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질입니다. 남들이 갖고 있는 걸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인생은 그리 행복한 인생이 못 되는 것이지요. 정말 그럴까요?

나의 대답은, 아니다, 입니다. 물질에 그다지 비중을 두지 않는 난 잠자리나 음식에 연연해하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우리 돈으로 500원 하는 길거리표 햄버거나 고급 호텔에서 대접하는 뷔페식 아침이나 행복에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이 저렴한 방에서 묵고 값싼 음식을 먹는 배낭여행이었지만, 꽤 만족했습니다.

실재로 우리 일행 중 어떤 선생님은 그간 좋은 호텔에서 묵고 고급 음식을 먹는 패키지 스타일의 여행을 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가난한 배낭여행을 시도했는데  앞으로도 배낭여행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배낭여행이 훨씬 재미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걸 보면 물질의 차이가 행복과 꼭 비례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전통호텔 안. 보이는 건 안락의자와 안뜰을 향한 실내창. 고급호텔 안의 가전제품은 우리나라의 삼성과 엘지제품이었다. 뿌듯했다.
 전통호텔 안. 보이는 건 안락의자와 안뜰을 향한 실내창. 고급호텔 안의 가전제품은 우리나라의 삼성과 엘지제품이었다. 뿌듯했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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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페르시아 전통호텔'이라는 이름표를 단 4성급 호텔은 내게는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었습니다. 매우 친절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는 프런트 아가씨나 우리가 충분히 들 수 있는 짐인데도 1천토만을 기대하며 굳이 방까지 짐을 날라다주는 종업원은 모두 사람을 돈으로 생각하는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들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만난 이란 사람들하고 정말 달랐습니다. 이전에 만난 이란인들의 친절이 진심이 느껴지는 친절이라면 이곳 사람들의 친절은 대가를 바라는 도식화된 친절로 보였습니다.

아마도 이런 차이가 자본주의에 물든 사람과 신의 가르침을 중심 삼아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물질이므로 인간이 중심에 설 자리가 없으며, 또한 자본주의적 인간은 정신보다는 육신을 잘 먹이고 잘 입히는 데 치중하는 편입니다. 반면에 종교에서는 정신에 중점을 두며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중요한 덕목으로 삼습니다. 사람을 돈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보지는 않지요.

그래서 난 자본주의에 비록 몸 담고 있고 어느 부분은 깊이 세뇌돼서 완전 포맷을 하기 전에는 절대로 뜯어고칠 수 없는 성질도 갖고 있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자본주의에 깊은 혐오를 느끼고 있는 편입니다. 자본주의를 잠시 떠나고 싶어서 종교성이 강한 나라 이란으로 왔는데 다시 자본주의의 소굴로 굴러들어왔다는 생각을 하면서 종업원을 따라 우리가 묵을 방을 찾아갔습니다.

이번 이란 여행에서 묵은 숙소 중 가장 고급호텔인 페르시아 전통호텔은 야즈드 올드시티 안에 있다. 흙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도시 안에 번듯한 숙소가 있었다.
 이번 이란 여행에서 묵은 숙소 중 가장 고급호텔인 페르시아 전통호텔은 야즈드 올드시티 안에 있다. 흙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도시 안에 번듯한 숙소가 있었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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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방으로 돌아와 아이들의 요란한 함성을 들었을 때는 기분이 좀 나아졌습니다. 아이들은 그간 손바닥 만한 중고 텔레비전만 보다가 커다란 평면 TV를 보자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누군가 한 번도 안 쓴 것처럼 깨끗하고 보송보송한 침대 시트에 몸을 날리자 하늘 위 구름에 올라탄 것처럼 마음이 부풀었는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비닐에 포장된 부드러운 실내화도, 깨끗한 화장실, 샤워 커튼까지 달린 욕조와 고급 샴푸, 우리나라 '삼성' 로고가 박힌 에어컨과 푹신한 안락의자 등 아이들이 감탄할 게 넘쳐났습니다. 그야말로 유토피아에 들어선 아이들 같았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우린 그간 7천원짜리 숙소에 주로 묵었는데 이런 숙소는 청결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침대 시트에 벼룩이 사는 곳도 많아서 침낭 속에서 자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또한 화장실은 공용 화장실이었으며 물론 샤워장도 공용이라 밖에서 누군가 들어오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면서 몸을 씻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생활하다가 몇 단계를 껑충 건너뛰었으니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흥분해서 하늘이라도 뚫고 올라갈 상황인 게지요.

물론 우리가 묵은 호텔보다 더 비싸고 좋은 호텔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간 벼룩이 나올지도 모르는 침대에서 웅크리고 잤던, 그리고 공용화장실의 좁은 변기를 이용했던 아이들에게 이곳은 갑자기 가난한 서민이 벼락부자가 된 기분을 안겨주었고, 그래서 그 기분에 꽤 오랫동안 취해서 뒹굴었던 것 같습니다.

신선놀음에 기둥 썩는 줄 모른다는 옛 속담처럼 아이들에게 호텔체험은 신선노름이나 다름없었고, 다음 날 아침 호텔에서 제공하는 양식 뷔페까지 먹고 나자 호텔을 벗어나 다시 가난한 여행자가 되는 것에 심한 거부반응을 보였습니다. 하룻밤만 여기서 더 묵어가면 안 되겠느냐며 보채기까지 했습니다.

물질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중독성을 갖고 있다는 걸 예전에 이미 알았지만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실감했습니다. 하룻밤을 좋은 침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뿐인데 아이들은 벌써 꿀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꿀벌처럼 물질의 향락에 취했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호텔을 나와 또 다른 곳을 향해 길을 떠날 때 아이들의 얼굴은 몹시 어둡고 두려워보였습니다. 맛있는 음식과 푹신한 침대에 대한 집착과 몸을 괴롭히는 가난한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감정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난 압니다. 페르시아호텔이 비록 좋지만 그곳에서 한 달이고 1년이고 묵다보면 어느 날에는 처음의 그 쾌적함은 잊어버리게 된다는 걸요. 그러니까 물질이 주는 행복은 아주 짧다는 것을요.


태그:#야즈드, #페르시아 전통호텔, #올드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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