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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미드와 카리브 해, 그 궁합이 가히 환상적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해변 피라미드.
▲ 눈부신 피라미드 경치 피라미드와 카리브 해, 그 궁합이 가히 환상적이다. 세계에서 유일한 해변 피라미드.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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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여긴 피라미든데?'

여행에 치명적인 저주받은 센스를 장착한 나였지만 유적지 개장시간에 맞춰 줄 서 있는 여행자들의 패션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내가 서 있는 여긴 분명 마야문명의 역사가 흐르는 유적지.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주위 사람들로부턴 여행자의 아우라가 팍팍 느껴졌다.

그런데 배낭 멘 사람들은 거의 없고, 동네 마실이나 나가는 아낙네들 마냥 한 손에 가벼운 가방만 들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몇몇 남정네와 꼬마들은 도무지 마야 역사를 관조하러 온 진중한 맛이 없는 옷차림이었다. 아예 '빤스' 바람이다. 여자들 앞에서 아무 생각 없는 것처럼 실실거리는 남자들이 눈에 가시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하지만 오히려 당당한 그들의 시선이 나를 주눅 들게 만든다.

뚤룸은 "enclosure"(에워싸인 토지), "wall"(벽)이란 뜻을 지니는데, 예전에는 "Zama"(dawn - 새벽)의 이름으로 불렸었다.
▲ 뚤룸(Tulum) 전경 뚤룸은 "enclosure"(에워싸인 토지), "wall"(벽)이란 뜻을 지니는데, 예전에는 "Zama"(dawn - 새벽)의 이름으로 불렸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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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팬티입고 오지 당신처럼 자전거 져지 입고 오나요?'

아이, 낯 뜨거워라. 세계 유일의 바닷가에 위치한 뚤룸 피라미드. 해변에 성이 위치한 곳은 많이 봤다. 그리고 정글이나 사막에 피라미드가 세워져 있는 것도 많이 봤다. 그런데 바닷가에 피라미드가 버젓이 세워져 있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정녕 몰랐다. 이곳이 유적지인지 휴양지인지 헷갈릴 정도로 눈부시도록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는 사실을. 아니 마치 소설 속에나 나올 법한 마법의 사원을 끼고 도는 환상적인 바닷가라는 사실을. 그래서! 여행자들이 이 에메랄드 빛 파도에 몸을 싣기 위해 수영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매표소 뒤로 조용히 갔다. 그리곤 관리직원을 향해 배시시 웃었다. 급하게 옷 좀 갈아 입을테니 사정 봐달란 소리다. 져지는 이 무리에서는 정말 몹쓸 패션이었다. 감사하게도 직원의 무관심 속에 일을 치르고 나자 세상이 달라보였다. 꽉 끼는 져지를 벗어던지고 반바지 차림으로 변신한 나 역시 해변으로 뛰어 들어갈 암묵적 동의를 얻어낸 것이다. 그제야 신나는 기분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유적지 사이를 헤쳐 나갔다.

사원 안에 또다른 사원이 있는 이중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 핀투라스(Pinturas) 사원 사원 안에 또다른 사원이 있는 이중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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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뚤룸 문화의 중요한 유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건물 뒤로는 종교적 의식을 담당했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 화려했던 궁전 이곳은 뚤룸 문화의 중요한 유산으로 여겨지고 있다. 건물 뒤로는 종교적 의식을 담당했던 성스러운 곳이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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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마야문명지인 뚤룸 유적지는 그리 화려하지 않다. 마야 언어로 '벽'이라는 뜻의 이곳은 A.D. 1200년 경에 상업으로 번성하였던 항구도시였다고 한다. 군사적으로는 지리학적 위치에 따라 감시기능을 담당했고, 카리브 해를 오고가는 뱃사람들의 이정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탁 트인 공간에 세찬 바람을 안고 서 있는 유적지들은 작고 낮게 형성되었으며, 식물군들 역시 줄기가 심하게 휘어져 있어 마치 허리케인 후 폐허가 된 듯한 이미지가 연출되었다.

멕시코에 들어오면서 숱하게 관람한 피라미드는 이제 이골이 났다. 그간 피라미드는 유적 자체 내에 부여된 역사와 문명의 흔적들을 토대로 그 정신을 음미하는 매력이 있었다. 따져보면 학자풍 관람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뚤룸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기를 유도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를 재촉했다.

잔디밭에선 푸르던 녀석의 피부는 바위에선 회색빛으로 위장한다.
▲ 이구아나 잔디밭에선 푸르던 녀석의 피부는 바위에선 회색빛으로 위장한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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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지른 뚤룸의 절벽 끝에서 장엄하게 내리는 일몰을 바라보며 카리브 해의 바람을 맞는 대자연의 풍경이 예상 가는가? 발 앞에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 남빛 바다 사이로 격하게 밀려드는 흰 포말을 보며 한 마리 돌고래가 되어보는 상상은 감히 아무 곳에서나 피어오르지 않는다. 바다와 피라미드의 환상적인 만남을 통해 얻은 섬광처럼 스치는 예지는 나를 단숨에 단조로운 여행의 껍질을 깬 몽상가로 만들어 버린다.

유적지 관람을 잽싸게 끝내고 해변으로 내려왔다. 가파른 계단을 사이로 이 두 세상이 만나는 조화가 참으로 기기묘묘하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보드라운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헤집고, 밀려오는 파도에 감쪽같이 다시 쓸려간다. 이미 수영복 차림이었던 사람들은 잘 차려진 밥상에 수저 하나 더 놓은 듯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긴다. 난 지겨울 만큼 한가로운 풍경을 병풍 삼아 늘어지게 하품하며 연신 사진기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개장 시간이 꽤 흐른 후 뒤늦게 들어온 한 무리의 사람들….

"연결시켜라. 그러면 기적을 맛보게 되리라." - 아리스토텔레스
▲ 피라미드와 해변을 이어주는 계단 "연결시켜라. 그러면 기적을 맛보게 되리라." - 아리스토텔레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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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여행자들이었다. 조금 더 사실을 추가하자면 여자들이었다. 한 꺼풀 더 솔직해지자면 여기저기 단체 여행자 다들 비키니 차림이었다. 난 맹세코 피라미드 구경 왔을 뿐이고, 하지만 눈은 벌써 그녀들을 향해있고, 방금 전까지 예찬했던 뚤룸의 아름다움은 이미 포맷된 지 오래고, 그녀들은 내 카메라 앞에서 자신 있는 포즈 취하고 있고…….

고맙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즐기러 온 부류였다. 고상한 유적지 관람 레시피를 따르듯 점잖게 행동한 내 앞에서 그녀들의 파도타기는 너무나 솔직하면서도 제대로 된 '100% 뚤룸 유적지 체험법'이었다. 아이들도, 남자들도, 다른 무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경직되어 있으며 바다에 뛰어 들어가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나 혼자 뿐.

그들은 피라미드 관람의 묘미를 알고 수영복을 가져왔을 뿐이고, 난 피라미드 모습을 담으려 사진기를 가져왔을 뿐이고.
▲ 비키니 그들은 피라미드 관람의 묘미를 알고 수영복을 가져왔을 뿐이고, 난 피라미드 모습을 담으려 사진기를 가져왔을 뿐이고.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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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가 맑고 파도가 적당히 거칠어 물놀이 하기엔 최고다.
▲ 해변의 아이 해수가 맑고 파도가 적당히 거칠어 물놀이 하기엔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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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 자아를 잃어버린 난 비참해진다. 무엇이 나를 자유롭지 못한 채 마음만 불타오르도록 구속시키는 것일까? 왜 작고작은 한 청년은 천둥벌거숭이처럼 있는 모습 그대로 흐름을 타지 못하고, 대사의 법술에 갇혀버린 손오공처럼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건가? 선비시대 피를 이어받은 태생적 한계일까, 활달한 척하면서도 나름 내성적인 원래 성격 때문일까?

섹시한 비키니 차림의 여자들과 어울려 놀고 싶다는 그런 초(超)유치한 생각이 아니라 정말 순간의 감정에 충실해 마음껏 격정적인 아드레날린을 분비하는 짜릿한 그 순간. 그 바람 같은 자유로움이 없다는 것이 자전거 여행을 하고 있다는 내겐 너무 씁쓸했다. 나를 위로하는 건 뚤룸 입구에서부터 함께 동행 해 온 이탈리아계 아르헨티나 출신의 어거스틴.

"그렇게 보고 있지만 말고 자네도 뛰어들지 그래. 보는 것과 즐기는 것의 가장 큰 차이점이 뭔 줄 알아? 이 여행에서 남기는 추억의 주체냐 객체냐의 문제지. 하지만 보다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어. 그건 능동적 움직임이 스스로를 정말 사랑하는가에 대한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어떤 상황에 대해 피하거나, 가만있거나, 무시하는 것도 때론 자신을 사랑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지만 그건 교묘하게 내면의 진실을 숨기는 가식적 사랑일 수도 있거든.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고, 주어진 것을 누려 봐. 잘못한 것이 없다면 뭐든지 두려워 할 필욘 없잖아?"

"그럼, 난 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건가요?"
"아니, 내가 봤을 땐 뭔가 자신에 대한 본질을 억제하려는 게 느껴져. 스스로를 좀 더 사랑했으면 해.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그만큼의 자유를 경험하지. 단, 이기적이어선 안 되겠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네."
▲ 어거스틴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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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는 조용히 내게서 멀어지더니 무릎까지 차오르는 해변을 거닐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진정한 자유를 경험한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울렸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조용히 신발을 벗어 바위에 올려놓고, 그와 반대편으로 향했다. 사람들 사이를, 파도 사이를, 이 위대한 풍경 사이를 거닐며….

뚤룸 유적지는 그 빼어난 경관 뿐 아니라 나를 더 사랑할 수 있는 묵상의 시간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내 주위를 사랑해야 함은 늘 길 위에서 배워 나가고 있다. 그래서 풍성한 여행의 열매들이 맺혀지기를 나는 고대한다. 그 열매가 무르익을 땐 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지금보다 조금 더 자라 있겠지. 바람이 훑은 상쾌함에 하릴 없이 오후의 망각을 즐기고 나니 어느 새 비키니 입은 아가씨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지고, 해변은 일광욕을 즐기려는 단체 노인 여행객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나도 슬슬 자리를 뜰 시간과 맞아 떨어졌다.

다시 계단을 올라 뚤룸에서 카리브 해의 눈부신 물비늘을 보자니 뜬금없이 용기가 샘솟았다. 그 까닭도 알지 못한 채 왠지 모를 행복감으로 주먹은 불끈 쥐어져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였을까, 앞바퀴에 청춘을, 뒷바퀴엔 꿈을 실어 이곳까지 달려 온 사나이 기개가 터지고 있었다. 뚤룸의 아름다움에 살짝 묻어 간 나의 아름다움이 미토콘드리아만큼이나마 느껴지는 것이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다시 느껴보는 뚤룸 피라미드의 매력.
▲ 유적지? 휴양지? 다른 각도에서 다시 느껴보는 뚤룸 피라미드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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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멕시코, #세계일주, # 자전거여행, #피라미드, #라이딩인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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