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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까지 이곳이 세자관 터로 알려져 왔으나 새로운 세자관 터가 발견되었다.
▲ 심양아동도서관 최근까지 이곳이 세자관 터로 알려져 왔으나 새로운 세자관 터가 발견되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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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지은 세자궁은 조선식 기와집

소현세자를 위하여 짓고 있던 집이 완공되었다. 새로 지은 집은 황궁에서 1km 정도 거리에 자리 잡았다. 세자가 사신들의 임시 숙소 동관에 입주한 지 27일 만이다. 건물은 맞배지붕의 조선식 기와집이었다. 청나라는 조선에서 목재와 기와를 들여오고 조선인 목수를 징발하여 집을 지었다.

정원도 조선식으로 꾸몄다. 조선의 토종 적송은 물론 화화나무와 향나무도 심고 모란도 심었다. 조선에서 끌고 온 왕족이 2세를 낳으면 황제의 신하가 된다고 생각해서일까? 다남(多男)을 기원하는 대추나무도 심었다.

모든 과정은 세자와 상의 없이 청나라의 일방적인 집행이었다. 청나라는 소현이 심양에 도착하기 전부터 세자가 거처할 집을 짓고 있었다. 여기에 청나라의 복안이 있다. 청나라는 소현이 조선을 출발할 당시부터 조선의 왕세자를 장기 억류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세자관은 짐을 꾸려 이사했다. 사신들이 머물던 동관보다 훨씬 넓었다. 세자전과 대군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고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소현세자는 동쪽관사에, 봉림대군은 서쪽관사에 들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이들 모두를 세자궁이라 불렀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제법 큰 집이었다. 그러나 2백여 명이 살아가기에는 비좁았다. 하인들은 동관에서처럼 세자관 밖에 별도의 거처를 마련했다.

인조의 처소 양화당 앞길
▲ 창경궁 인조의 처소 양화당 앞길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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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한 첫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소현은 뜰로 나왔다. 동관에서 옮겨 심은 조선 소나무는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지만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있었다. 하늘에는 별빛이 쏟아지고 비슬나무 가지에 초이레 상현달이 걸려있었다.

"보이지 않은 반쪽을 고국에 계신 아바마마께서는 보실 수 있을까?"

상현달은 반달이다. 보이지 않는 반쪽마저도 보고 싶었다.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반쪽이 고국에서는 보일 것만 같았다. 청나라의 심장부 심양에 와 있지만 하늘에 떠있는 반달처럼 청나라의 속내를 알 수 없어 안타까웠다.

소현세자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를 행하던 부왕을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오고가는 신하들을 통하여 부왕의 소식은 듣고 있었지만 중전도 없는 부왕의 안위가 항상 걱정이었다. 그러나 한성에 있는 인조는 소현의 염려와 달리 숙의 조씨에게 푹 빠져 있었다.

새집을 지어주는 것이 오히려 두렵습니다

"저하, 주무시지 않고 어인 일 이십니까?"
강빈이었다.

"빈궁은 어인 일 이시오?"
"잠이 오지 않아 나왔습니다."

두 사람은 함께 걸었다. 모처럼의 동행이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시종 신하들을 물리치고 단둘이 걸어보는 것은 혼례 이후 처음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오붓하고 흐뭇해야 할 한밤의 산책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저하, 새집을 지어주는 것이 오히려 두렵습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고국에 돌아갈 날이 있을 것입니다."

"저들이 저하를 돌려보내려면 왜 새 집을 지었겠습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만 희망을 잃지 맙시다."
"저 달을 쳐다보면 원손 생각에 가슴이 미어집니다."

강빈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지금 몇 개월째이지요?"
"이제 갓 돌이 지났습니다. 14개월째입니다."
"많이 자랐겠구려."

소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9년 만에 낳은 맏아들을 만나볼 수 없는 애비, 원손을 볼 수 없는 세자. 무기력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보고 싶습니다."
강빈의 옷고름이 젖었다.

"눈물을 거두시구려.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좋은 소식이라니요?"

물기에 젖어있던 강빈의 두 눈이 반짝거렸다.

석철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들뜬 강빈

"능성부원군의 인질로 와있는 구인전이 친모상을 당하여 용장에게 부탁했더니 고국에 나가 장례를 치르고 가을에 들어오라고 허락했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인륜을 무시하는 무지몽매한 사람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저하도 고국에 돌아가 주상전하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어마마마의 대상일입니다. 저들에게 청을 넣어볼까 합니다."
"하루 빨리 그러한 날이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슬이 맺혀 있던 강빈의 얼굴이 밝아졌다. 입가에는 석철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그려져 있었다.

이사를 완료한 소현은 가함대신 남이웅 이하 빈객들을 소집했다.

"강독을 하루라도 쉬어서는 안 될 것이오. 차질 없도록 준비하시고 저들이 우리가 있는 이곳을 뭐라 부르던 우리는 조선관이라 불러야 할 것이오."

청나라에 있는 조선 대표관이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후부터 세자 처소는 상황에 따라 달리 불리었다. 청나라는 고려관이라는 명칭을 일관되게 유지했으나 조선은 조선 스스로 부를 때는 조선관이라 불렀고 청나라 관리들 앞이나 본국에서 청나라 사신에게 낮추어 부를 때는 심양관, 또는 심관(瀋館)이라 불렀다. 즉 조선은 주 심양 대사관과 같은 성격을 부여하며 자존을 지키려 했다.

화양절충식 대리석 건물이다.
▲ 아동도서관 내부 화양절충식 대리석 건물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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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세자관터에 대해서 설왕설래 말들이 많다. 지금까지는 심양시내에 있는 시립아동도서관 자리가 세자관터로 알려졌으나 잘못 알려졌다는 것이다. 아동도서관은 1900년대 초, 심양을 점령한 일본이 석조 건물을 지어 봉천영사관으로 사용했고 종전 후 도서관이 들어섰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1907년 일본이 제작하고 중국에서 발견된 지도가 뒷받침해주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도 세자관은 잊혀진 건물이었다. 조선 사대부들에게 심양은 치욕의 땅이었고 세자관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물이었다. 소현세자가 몰락한 120년 후, 영조는 북경 연행 길을 다녀오는 김창업에게 심양에 들러 세자관터를 찾아보고 지도를 그려오라 명했다. 이 때 그린 지도가 1996년에 발견되었다.

두 지도가 추정하는 지점은 현 아동도서관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500m지점에 있는 아파트 옆 공터다.


태그:#소현세자, #강빈, #고려관, #심양관, #조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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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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