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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이 어려운가? 수성이 어려운가?

<정관정요>는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태평성대 당태종 치세를 다룬 책으로 당 헌종과 문종이 애독했고 선종은 병풍을 만들어 침전에 두고 읽을 정도로 황제의 필독서였다. 소현은 '군주는 배, 백성은 물'이라고 갈파한 정관 6년에 나오는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천하의 제후도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난파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가 참인 것 같았다.

당태종이 물었다. 창업이 어려운가? 수성이 어려운가? 방현령은 창업이 어렵다고 답했으나 위징은 달랐다. 천하는 천명으로 받을 수 있으나 백성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성이 더 어렵다고 말했다. 소현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부왕이 백성의 마음을 얻었다면 과연 자신이 여기에 와있을까? 의문이 생겼다.

"천하를 지키는 일이 어려운가? 쉬운가?" 당태종이 물었다. "매우 어렵다." 고 위징이 대답했다. "나라 일을 현명한 사람에게 맡기고 간언을 받아들이면 어려울 것이 없지 않은가?" 태종이 다시 물었다.

"나라에 근심스러운 일이 있고 위태로울 때는 현자에게 맡기고 간언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태평한 세상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느슨해지고 게을러집니다. 안락을 믿고 태만을 탐하면 간하고자 하는 자가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동안에 쇠퇴하여지고 위망의 지경에 이릅니다. 편안할 때일수록 경계해야 합니다. 어찌 어렵지 않다고 하십니까?"

위징의 대답이 존경스러웠다. 사세가 위태로울 때는커녕 편안할 때도 부왕 곁에는 현자가 없었던 것 같았다.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부왕에게 큰 그림의 간언을 한 신하가 있었는가? 손꼽아 보았다. 꼽히는 사람이 없었다. 주화다 척화다 소리만 요란했지 그러한 주장을 아우르는 큰 그림을 제시한 신하는 없지 않았는가. 모두가 협소했고 공허했다고 생각되었다. 
심양에 있던 소현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대 규장각소장
▲ 심양일기. 심양에 있던 소현세자의 일거수일투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서울대 규장각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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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이 시강원 학사들과 <정관정요>에 빠져 있을 때 용골대가 찾아왔다.

"포로를 매매할 것이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조선에서 붙잡아 온 포로를 팔겠다는 것이오."
"포로를 팔겠다니요? 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소현은 전쟁포로를 재물로 인식하는 청나라의 태도에 아연실색했다.

"붙잡아 온 자들을 우리 맘대로 팔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리 많소?"
"그들은 전쟁포로입니다. 그들은 조선으로 돌려보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청나라와 조선이 체결한 강화조약이 성실히 이행되면 그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돌려보내고 안 보내고는 우리 마음이오. 조선에서도 사람을 사고팔고 있지 않소?"

용골대의 반격에 소현은 찔끔했다. 조선에서도 노비가 매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15세 이상 40세 이하 건장한 조선의 노비는 오승포(五升布) 150필에 매매되고 있었다. 말 한 마리 값이 오승포 400~500필이니 노비 셋과 말 한 마리 값이 같았다.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내가 왔소

"노비와 전쟁포로는 다릅니다. 조선은 반상의 나라이기 때문에 노비를 노비문적에 따라 사고팝니다."
"노비와 포로가 다를 게 뭐가 있겠소? 다 같은 사람인데."
"노비는 태어날 때부터 노비로 태어났고 이곳에 잡혀온 이들은 왕실과 사대부집 규수 그리고 선량한 양민들입니다."
"그러니까 값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지 않겠소? 우리가 이들을 데리고 올 때 괜히 끌고 온줄 아십니까? 다 생각이 있었습니다."

용골대의 입가에 득의의 웃음이 그려졌다.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할 때 지휘관들에게 포로 소유권을 부여했다. 소속 부대장의 부가가치로 인정한 것이다. 철군 길에서 포로를 가지고 지휘관들끼리 실랑이를 벌이는 속셈을 소현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들을 매매하면 아니됩니다. 그들은 고국에 돌아가야 할 포로들입니다. 양국이 체결한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하여 저부가 여기에 와 있지 않습니까. 청나라는 그들을 조국에 돌려보내 주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그것이 서로의 약속입니다."
"강화조약 따위는 나는 모르는 일이오. 포로 매매는 황제의 명령이오."

논리에서 밀리던 용골대가 황제의 명이라는 말을 남기고 동관을 빠져 나갔다. 소현은 빈객 박노를 불렀다.

포로 매매시장이 있던 곳이다.
▲ 심양 남탑. 포로 매매시장이 있던 곳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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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매매시장이 어디에 열린다 하더냐?"
"용골대 말로는 남탑 어름에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남탑이라면 여기에서 얼마 정도 되느냐?"
"3천보쯤 됩니다."
"냉큼 차비를 놓거라. 내 그리로 나가보아야 하겠다."

갑자기 동관이 부산스러워졌다. 아무리 이국 땅 볼모생활이라 하지만 세자 차비는 간단치가 않다. 세자는 물론 시종하는 신하들 의관 정제하랴 사관 지필묵 준비하랴 여간 요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준비를 마치고 동관 정문을 나서려는데 수문장이 제지하고 나섰다.

"세자 저하 나가시는 길을 왜 막느냐?"

익위 서택리가 청나라 관리를 향하여 눈알을 부라렸다.

"세자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하이기 때문에 그렇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세자 저하 출입은 명령이 없으면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철저히 통제받는 조선의 왕세자

세자 출입은 상부 명령사항이라는 것이다. 결국 세자 출입은 허용되지 않았다. 거처하는 관사에서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소현으로 하여금 좌절이라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아, 역시 나는 내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몸이구나."

조선의 세자이지만 이곳에서는 볼모라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청나라는 가함대신을 비롯한 동관의 조선 관리들의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면서 세자만은 철저히 통제했다. 조선에서 오는 사은사와 속환사들마저 자신들이 심사한 후 세자를 만나게 했다.

이튿날, 세자의 출입이 허가되었다. 허락받지 않고서는 거소를 출입할 수 없는 조선의 왕세자 소현은 동관을 나섰다. 빈객 박노, 보덕 황일호, 겸필선 이명웅, 익위 서택리와 양응함이 호종했다. 남탑 거리는 동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야트막한 집들이 엎어져 있는 거리 곳곳에 손이 묶인 포로들이 양지를 찾아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허름한 차림에 얼굴은 씻지 않아 구정물이 줄줄 흘렀다. 한인도 있었고 몽고인도 있었고 조선인도 있었다. 남탑 거리는 청나라의 공인된 포로 시장이었다.

조선인들은 행색으로 보아 금세 조선인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산발한 머리에 바지저고를 걸치고 있었다. 흰색이었으나 입고 자고 세탁을 하지 않아 청인들이 걸친 청의(靑衣)와 색깔이 비슷했다. 여자들도 많았다. 치마저고리를 걸쳤으나 헤지고 찢어져 보이지 말아야 할 속살을 드러 내놓고 있었다.


태그:#소현세자, #심양, #남탑, #시강원, #정관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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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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