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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집과 오달제는 동문을 통과하여 서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 심양궁 동문. 윤집과 오달제는 동문을 통과하여 서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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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집과 오달제의 처형을 보고받은 소현세자는 충격에 빠졌다. 신하들이 죽어나가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의 무기력이 원망스러웠다. 처형을 저지할 힘이 없다는 것에 좌절했다. 왕세자가 볼모로 잡혀와 있고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젊은이들이 처형되는 조국의 현실이 한스러웠다.

잠을 이루지 못한 소현은 뜰로 나왔다. 고국에서 옮겨 심은 소나무 가지에 보름을 갓 넘긴 둥근달이 걸려있다.

'신하들이 처형되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는 나의 심정을 저 달은 알고 있을까? 찢어지는 이 가슴, 애달프다.'

4월이지만 심양의 날씨는 아직 쌀쌀하다.

'나는 누구인가? 왕세자?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다. 적장에게 항복한 임금의 아들이 무슨 왕세자란 말인가? 왕세자 좋다. 그럼 왕세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이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심양에 두 발을 딛고 서있는 나의 위상을 찾아보자. 포로? 인질? 볼모?'

적송 나뭇가지에 걸려있던 둥근달이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위상을 찾아 역할의 공간을 만들겠다

'저들이 하는 행동으로 보아 포로 취급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융숭히 대접하는 외교사절도 아니다. 거칠게 대하지는 않지만 인질 취급하는 것 같다. 나는 인질이 아니다. 조선과 청나라가 체결한 강화조약에 의하여 자진하여 온 왕세자다. 내 위상을 바로 잡아야 내가 해야 할 역할의 공간이 있다. 우선 나의 위상을 찾자.'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구름에 가려있던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저하,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어인 일로 밖에 나와 계십니까?"
"빈궁이 어인 일 이시오?"
"저하께 기쁜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나왔습니다."
"기쁜 소식이라니요?"
"원손이 살아있답니다. 우리 석철이가 살아서 환궁했답니다."
"그게 정말이요?"

소현의 입가에 모처럼 미소가 그려졌다.

"네, 그렇답니다. 신첩이 강화에서 위기에 처해있을 때 김내관에게 원손을 넘겨주며 '종사를 보존하라' 일렀는데 김인과 서후행이 원손을 모시고 교동으로 피난하였으나 오랑캐들이 교동을 침노하여 배를 타고 당진으로 옮겨가 구사일생 목숨을 보존하였다 합니다."

강빈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돌도 되지 않은 어린것이 교동에서 당진까지 뱃길에 시달렸을 것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하늘이 도우셨구려."

오랜만에 들어보는 기쁜 소식이었다. 소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아우 봉림대군이 이곳 심양에서 처형된다 하더라도 종사를 이을 수 있다는 안도의 숨결이었다. 이튿날, 소현세자는 대빈객 박황을 불렀다.

서연을 개강하라

"먼 길 오는 도중에 잃어버린 서책은 없소?"
"네, 저하. 잃어버린 것은 없습니다만 눈과 비를 맞아 훼손된 것은 있습니다."
"무슨 책이오?"

귀중한 책이라면 이역 땅에서 구할 수도 없다.

"성학집요와 근사록입니다."
"다행입니다. 서연을 개강하도록 하시오."
"서연이라니요? 새로이 짓는 집이 완공되면 거기에서 열까 했습니다."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위하여 새로운 집을 짓고 있었다.

"공부하는데 기다려서 한다는 말씀입니까?"
"집도 비좁고 그리하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치않습니다. 당장 내일부터 서연을 개강하도록 하시오."

추상같은 명이 떨어졌다.

"우선 조강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강이라니요? 삼강을 모두 준비하도록 하시오."

조강, 주강, 석강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서연이 시작되었다. 대빈객 박황과 부빈객 박노를 비롯하여 보덕 이명웅, 필선 민응협, 시강 이사 김진국, 이경석, 빈객 남이웅, 한형길, 최혜길, 이소한, 이경회, 이명한 등이 총동원되었다.

조용하던 동관이 새벽부터 불을 밝히고 책 읽는 소리가 해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청나라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선에서 붙잡혀온 사람들이 울고불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의관을 정제하고 책 읽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깊은 산속 신선들 같았다. 전쟁하고는 거리가 먼 딴 나라 사람들 같았다.

송나라 주희가 쓴 역사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자치통감강목. 송나라 주희가 쓴 역사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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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강원의 시강목은 효경, 소학과 같은 수신서와 사서오경을 기본으로 하는 유가서, 사략, 통감강목과 같은 역사서가 기본이었다. 때로 주자서절요, 성학집요, 근사록 등 성리학 서적을 강했다. 소현이 보덕 이명웅을 불렀다.

"지금 강하는 서경 일직편을 폐하고 다른 책으로 바꾸도록 하시오."
서경(書經)은 사서오경 중 하나다. 총 58편으로 편찬되어 있으며 상서(尙書)라고도 한다. 당우 3대에 걸친 중국의 고대 역사 기록이다.

"이제 제왈우신재부터 명백우충지야까지 왔는데 책을 바꾸시라면 어느 책으로 바꿀까요?"
"정관정요로 하는 것이 좋겠소."

소현은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 난세를 치세로 바꾼 당태종의 지혜를 찾고 싶었다. 정관정요는 당나라 오긍이 지은 책으로 총 10권이며 당태종의 치세를 담고 있다. 책을 바꾼 소현은 빈객들이 일어나기 전 인시(3시)에 기침하여 그날 공부할 강목을 예습했다. 이러한 습관은 소현세자가 영구 귀국하는 날까지 변하지 않았다.

소현세자의 전략은 기가 막히게 들어맞았다. 조선에서 잡혀온 왕자가 '나 왕세자이니 대접해주시오'라고 비굴하게 애걸하는 것보다 청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대접하도록 한 것이다. 가방끈이 짧은 청나라 사람들에게 학문으로 정면승부를 건 것이 주효했다.

동관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자 청나라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파견 나온 관리들의 모습이 공손해졌고 흠모하는 눈초리로 변했다. 동관의 시강소식은 높고 높은 황궁의 성벽에도 날아 들어갔다. 홍타이지가 소현세자를 보는 눈이 달라졌고 도르곤이 소현에게 대하는 예우가 달라졌다. 소현세자의 시강 전략은 적중한 것이다.


태그:#소현세자, #시강원, #사서오경, #자치통감, #정관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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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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